2023. 2. 17. 23:34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한 사람이 다소 주저하면서 마하리지에게 질문 하였다.
질문 : 속박과 자유의 문제가 정말 육체와의 자기동일시에서 생겼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자기 동일시가 일어나는 건지요?
그는 이 질문이 얼마나 초보적인 질문인지를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주저하면서도 이왕 꺼낸 질문이니
끝까지 하자는 심정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을 이었다.
질문 : 사람이 죽고나면 깨달은 사람이나 보통 사람이나 결과가 똑 같은데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합니까?
죽고 나면 어차피 육체는 다섯가지 원소로 다시 분해되고 의식은 구나(Guna) 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닌가요?
마하리지는 가끔 (특히 질문자가 마라티어로 말할 때) 눈을 감은 채로 질문을 듣는데, 이번에도 마하리지는 눈을 감고 질문을 듣고 있었다. 질문을 듣는 표정이 굳어져 있어서 "무슨 그 따위 질문을 해?" 하고 역정을 내지는 않을까 싶었으나, 곧 표정이 풀어졌고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은 채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마하리지 : 우선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드러난 모든 우주는 의식이 만들어 낸 것일 따름입니다.
선생이 의식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이 세상은 선생에게는 없습니다.
현상화된 우주를 인식할 수 있게 해 주는 이 의식이 한계 지어진 우리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살 동안 알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입니다.
우리가 현상의 꿈에서 깨어날 때, 꿈을 꿈으로 이해 할 때, 개념화와 객관화를 그만 둘 때,
그때 우리는 "참나"일 수 있습니다.
"본체는 실재이고 현상은 단순한 투영일 뿐이며, 이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 이것이 핵심입니다.
질문 했던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아주 주의 깊게 마하리지의 말을 들어 나갔다.
마하리지가 계속 설명했다.
마하리지 :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현상세게에서 "당신"은 "그것들"을 보지만 그 둘 모두 다 의식에서 투영된 객체라는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즉, 의식에서 투영된 객체가 마치 꿈 속의 등장인물처럼 자신이 뭔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주체라고 착각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객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입장에서는 그것들 모두가 투영된 객관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오직 봄(seeing)만이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잠재적인 근본의 작용이며 듣고, 만지고, 맛보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작용하고"있을 뿐입니다.
이런 작용은 육체, 즉 감각기관을 매개로 일어납니다.
(감각기관은 본체가 아니며, 마치 그림자가 물건의 비추어진 상(相)인 것처럼 본체의 투영에 불과합니다.)
내가 결정해서 움직인다는 생각이 없는 한, 모든 현상에서의 작용은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며, 여기에는
"속박"이니 "자유"니 하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각기관의 작용핵심(분석의 편의를 위해 이것을 '개인적인'의식이라고 부릅시다. 사실에 있어서는 이렇게 나눌 수가 없습니다) 에 독립된 존재라고 하는 가상의 주체감이 생기게 됩니다.
사실은 이것도 근본의 입장에서 보면 투영된 객체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이제 이 가상의 주체감으로 해서 태어나서 죽는다는 허환의 존재가 만들어집니다.
이 헛된 존재는 마치 자기가 마음대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양 행동합니다.
또한 현상계에서 작용에 의해 생긴 것들, 예를 들면 고통이나 미리 정해 놓은 나쁜 일과 선한 일 등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따라서 "얽매임"과 이에서 벗어나고자 "자유"를 찾아 나섭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참된 모습이 아닌 헛된 존재를 '자기'인양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구속은 이러한 헛된 존재를 자기로 여기는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책감과 얽매임에 빠져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것도 이 가상의 존재입니다.
진정한 '나'는 감각을 느끼는 기관조차 없기 때문에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은 나라고 불리우는 환상일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깨달은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봅시다.
깨달은 사람은 "외견상으로만 뚜렷해 보이는" 자신의 배역이 저절로 일어나는 표현 작용으로 생긴 현상으로서의 시현된 우주처럼 근본적으로 환영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현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삶이라는 주어진 여정이 끝나면 " 집으로 되돌아 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마치 다른 사람의 삶을 살 듯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과 더 큰 차이는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를 헛된 존재와 동일시하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고,
따라서 전혀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사실은 환상에 불과한 헛된 존재가 일견 결단력을 가진 독립된 실체인 것처럼 투영된 이 세상을 살아 갑니다.
그리하여 이 가상의 존재는 환생은 물론 카르마라고 하는 업을 스스로 짊어지고 고통 속에 헤메게 됩니다.
절대적인 본체는 매순간 창조와 파괴가 반복되는 셀수 없을 만큼 많은 형태를 통해서 그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자발적인 작용에 어떠한 실체의 개념도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개별적 실체라는 개념을 기본으로 행해지는 행동으로는, 그것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인 행동이든지에 관계없이 불이원론(Advaita) 근본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가상의 존재가 자신을 찾는 사람으로 여기고 "자유"를 찾아 돌아 다니는 한 계속헤서 "속박" 속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찾는 자와 찾고자 하는 자가 같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깊히 알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가상의 존재인 찾는 자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라메쉬 발세카 지음, 이명규 역 < 담배가계의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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