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34)

2021. 4. 15. 22:44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이제 염송, 명상과같은 수행으로 마음의 일념집중을 얻는 것이 자기주시에는 어떻게 큰 장애가 되는지를 하나의 비유로써 설명해 보자.

어떤 사람이 자전거로 따루반나말라이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50마일(80킬로미터)쯤 떨어진 벨로르까지 가기로 결정했지만 자전거 타는 법을 모른다고 하자. 

만일 그가 타루반나말라이에서 남쪽으로 20마일 쯤 떨어진 띠루꼬일루르까지 도로를 따라가며 자전거 타는 연습을 한다면, 여러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힌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띠루반나말라이에서 남쪽으로 20마일, 즉 자신의 목적지인 벨로르에서는 70마일이나 떨어진 곳까지 와 있다. 그러니 이제 베로르에 당도하려면 훨씬 많은 노력을 하고 훨씬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지 않고 처음부터 벨르르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자전거 타는 연습을 했다면, 같은 시간이 지난 뒤에는 벨로르에 20마일이나 가까이 가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무렵에는 자전거 타는 기술을 익힌 상태이므로 나머지 30마일은 쉽게 완주하고 불필요한 시간과 노력의 소모 없이 목적지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염송과 명상을 수행할 때도 위의 사람이 띠루꼬일루르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며 자전거 타기를 연습할 때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염송과 명상을 통해 얻는 힘은 반대방향으로, 즉 2인칭 쪽으로 계발되는데, 그것은 우리를 자기 주시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 활동 아닌가? 

반면에 우리가 처음부터 자기주시를 수행하면, 

그것은 벨로르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며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는 것과 같다. 

자기주시, 즉 자기탐구는 이처럼 모든 불필요한 노력을 피하고 진아 성취를 직접 안겨 주므로, 스리 바가반은 <진아지> 제 4연에서 "모든 길 중에서 이 길(자기탐구)이 가장 쉽다네."라고 했고, 

<우빠데샤 운디아르>제 17연에서는 "이것이 누구에나 직접적인 글이라네"라고 하였다. 

 

염송이나 명상의 수행은 마음이 감각 대상에 속하는 다양한 생각들로 분화되어 약해지는 것을 막아주므로, 

스리 바가반은 <나는 누구인가?>에서 그런 수행들이 마음에 힘을 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말한 것은 한 가지 이익, 즉 감각대상들로 향하는 습으로 인해 마음이 무수한 생각들로 분화되는 화를 면하게 한다는 점만을 고려해서 였다. 

더욱이 거기서 스리 바가반이 말한 힘은 자기 탐구에 필요한 힘, 즉 앞서 <나는 누구인가?>에서 당신이 "거듭거듭 이렇게 수행하면 마음이 자신의 근원에 머무르는 힘이 증가한다."고 했을 때의 그 힘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아닌 어떤 대상 위에, 즉 2인칭 위에 머무르는 힘을 뿐이다. 

본서의 여기에서 지적하는 것은, 진아성취만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염송과 명상을 통해 얻는 이런 종류의 힘이 하나의 장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임을 독자들은 이해해야 한다. 

 

염송과 명상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자기 탐구의 성공에 도움이 되는 것은 띠루꼬일루르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며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데서 얻는 도움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띠루꼬일루르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는 것은 길게  보면 벨로르에 도착하는데 하나의 간접적인 보조수단이 될 수 있듯이, 염송과 명상을 수행하는 것도 길게 보면 진아를  성취하는데  간접적인 보조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염송과 명상에 의해 산출되는 것으로서 자기탐구의 성공에 장애가 되는 것은 띠루꼬일루르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며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데서 만들어지는 장애와 비슷하다. 

왜냐하면 띠루꼬일루르로 가는 도로 상에서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면 그 사람이 목적지에서 멀어지게 되듯이, 

염송과 명상을 수행하면 우리가 집안에서 더 멀어지게 되어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음의 일념집중을 얻는 것은 자전거 타기의 기술에 숙달되는 것에 비유된다. 

이 일념집중의 마음은 날카로운 칼, 불 혹은 원자력 같은 놀라운 무기여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익을 줄 수도 있고 해를 까칠 수도 있다. 

날카로은 칼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외과적 수술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다. 

같은 방식으로, 불과 원자력은 건설적인 목적에 쓰일 수도 잇고 파괴적인 목적에 쓰일 수도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염송이나 명상과 같은 수행을 통해 계발된 일념집중의 힘은 이익을 줄 수도 있고 해를 끼칠 수도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초능력이나 관능적 쾌락을 좋아한다면, 

그는 그런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이 일념집주의 힘을 아무 미묘하고 능란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염송이나 명상을 통해 얻은 일념집중의 힘은 어떤 2인칭에 대한 일념집중에 불과하므로 - 즉, 밖으로 향하는 일념집중이므로 - 그것은 그 구도자로 하여금 비진아(非眞我) 쪽으로만 나아가게 유도할 것이다. 

그가 영원한 것과 찰나적인 것에 대한 좋은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또 그 다음에는 자신의 행로를 2인칭에 대한 주의에서 1인칭에 대한 주의로 바꿀 수 있어야만, 그러한 일념집중의 힘이 그를 자아탐구로 이끌어 줄 것이며, 

그렇게 오랫동안 힘써 노력한 뒤에 (마치 띠루꼬일루르로 가는 도로 상에서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사람이 벨로르까지 70마일을 가려면 오랜 시간 힘들게 노력해야 하듯이) 진아 안주 - 즉, 참된 지(知)의 성취- 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영적인 길에서 염송과 명상을 하는 구도자들이 통상 초능력을 얻거나, 기타 그런 찰나적인 쾌락을 얻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는 염송이나 명상을 통해서 얻는 일념집중의 힘은 아무래도 위험하고, 

따라서 처음부터 자기 주시의 수행으로 일념집중의 힘을 얻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마음의 일념집중을 성취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염송이나 명상을 할 때에도 마음이 다른 생각 위에서 헤멜 때는 주의력(마음)을 거듭 거듭 돌이켜 단 하나의 생각 위에 고정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자기 탐구를 수행할 때에도 헤메는 마음을 돌이켜 그것을 우리의 존재 -의식에 고정하기 위헤서는 같은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두 종류의 수행 모두에서 마음의 일념집중을 얻으려면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구도자가 처음부터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 있는 자기 주시를 수행하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스리 바가반의 친존에서 일어났던 다음 사건이 이 점을 더 잘 조명해 줄 것이다. 

 

스리 바가반의 친존에서 한동안 앉아 있던 한 헌신자가 당신에게 여쭈었다. 

"바가반, 저는 자기 탐구를 못하겠습니다. 저에게는 어렵습니다. 그 대신 명상을 할까요?"

"좋습니다. " 스리 바가반이 대답했다. 

그 직후 그 헌신자는 회당을 떠났다. 

그러자 스리 바가반은 당신 가까이 있던 사람들을 돌아 보며 말했다.

"그는 자기 탐구가 자기 한테는 어려워서 못하겠다면서 명상을 해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하는군요. 본인이 못하겠다는데 제가 그에게 자기 탐구를 하라고 강요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명상을 하고 싶다고 할 때는 제가 "좋습니다." 라고 할 수 밖에요. 내일은 그가 와서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바가반, 제 마음은 명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송을 할까요?" 저는 또다시 "좋습니다."라고 말해야겠지요. 

마찬가지로 그는 어느 날 이렇게 불평할 것입니다. '제 마음은 염송에 가만히 머무르지 않습니다. 제 혀만 진언을 염하지, 마음은 많은 것들 위에서 헤멥니다. 예공을 올리고, 찬가를 하고, 이런 저런 것을 할까요?'

그런 모든 불평에 대해 저는 답변으로 ' 좋습니다.'  외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찬가든, 염송이든 혹은 다른 어떤 수행이든, 어떤 사람이 수행을 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할 수 있다면, 

같은 노력으로 자기 탐구를 할 수 있겠지요 ! 

이런 모든 불평은 어떤 수행도 진지하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고, 그냥 그런 것일 뿐입니다. 

 

어떤 수행에서도 필수적인 것은 달아나는 마음을 수습하여 그것을 단 한가지 위에 고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수습하여 자기주시에 고정하면 안 됩니까? 

그것이야말로 자기 탐구입니다. 

해야 할 일은 그뿐이지요 !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차츰차츰, 지극히 용기있는 지성(분별력)으로써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고,

그 마음을 진아 안에 확고히 고정하여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게 하라'(제6장25절)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불안정한 마음이 어떤 것 쪽으로 헤매든, 

거기서 마음을 거두어 늘 진아에 고정하고 거기에 확고히 안주하게 하라'(제6장 26절)는 뜻입니다. 

 

'나는 브라흐만이다'와 같은 생각에 집중하는 것은 명상의 최고 형태로 간주되지만, 

스리 바가반은 그것조차도 <실재사십송 제32연>에서 '힘이 약한 탓'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염송, 명상 등의 대상인 2인칭이나 3인칭을 표적으로 삼아 마음이 얻는 것은

실은 힘이 아니라 약함에 불과하다 ! 

앞으로 질주하는데 익숙한 경주마를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는데 쓸 수 있겠는가? 

물을 길어 오려면 말이 뒤로 움직이는 것이 필수적이므로, 경주마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스리 바가반이 <나는 누구인가?>에서 "거듭거듭 이렇게 수행하면 마음이 자신의 근원에 머무르는 힘이 증가한다." 고 했을 때 이야기한 저 자기 주시의 수행만이 마음에게 진정 필요한 힘을 주는 올바른 수행이다! 

진아 아닌 표적(외부대상)들 쪽으로 잘못 훈련되어 버려지지 않은 그런 마음, 나태함의 자취라고는 없고 엄청난 열의와 아이같이 의심없는 복종의 정신을 지닌 마음을 가지고 스리 바가반을 찾아온 구도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나는 누구인가?' 형태의 자기 주시 수행으로 바로 돌렸고, 

그럼으로써 위에서 말한 진정 필요한 힘을 얻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가지고  "아, 진아를 아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네! 실로 그것이 가장 쉽다네 !"

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대성 옮김 <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