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33)

2021. 4. 6. 22:51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런 다음에는 ?'이라는 생각을 건드리지 마세요.

"이걸 한 다음에는 요가를 하고 또 그 다음에는 - - -"과 같은 생각을 모두 내버려 두세요.

계획표를 없애 버리세요.여러분은 계확표가 아닙니다. 

계획표는 그저 여러분이 할 일에 불과합니다. 그 차이를 깨달으세요. 

 

제가 직업적인 이유나 동료로서가 아니라 그저 여러분 자체를 만나기 위해서 여러분을 만나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저는 여러분의 일상생활이나 의도, 혹은 전에 했던 일들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제가 만나고자 하는 존재는 그런 것들이 아니예요. 

저는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게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행동하는 사람 뒤에 있는 그 존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 존재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것은 행해지고 있는, 혹은 앞으로 행해질 모든 것이 관찰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동이라는 비눗방울 속에 결코 갇히지 않지요. 

 

이리저리 딴 길로 새는 생각이나 의도를 붙잡지 말고,

그저 조금만 더 이 무(無) 속에 머무세요.

 

이 무(無) 속으로 들어오길 원하는 뭔가가 있나요?

여러분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나요?

 

이 공간, 이 자리는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그 위치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그 어떤 의도와도 연관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단지 이를 의식하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냥 있습니다.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여기에 계세요. 

 

여러분은 물으시겠지요. 

"그것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나요? 의지를 가지고 있나요? 

그것은 오래되었지만 낡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것은 늘 부드럽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그것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지 마세요. 

"이것은 그저 색다른 경험일 뿐이야. 나는 지금 이걸 한번 해보고 싶을 뿐이지, 그렇지만 곧 필라테스 수업이 있고 

그 다음에는 하이킹도 가야 해." 

대신 이런 자세를 가지세요. 

"나는 지금 여기에 있기로 정했으니까 사소한 일상사는 잠시 뒤로 미뤄놓을 거야." 

 

이렇게 머물러 계세요. 

자신이 곧 참자아임을 아세요. 

그것은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실재입니다. 

그것은 어떤 시간의 틀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에 속할 수도 

인위적 노력에 의해 만들어질 수도 없습니다. 

그저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표현되는 모든 것은 

그것 안에서 생겨나고, 그것 안에서 움직이고, 

그것 안에서 성장하고, 확장되고,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늘 본래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그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따금 말합니다. 

그것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여기에 있지만, 

그것이 '기다림'인 것은 아니라고. 

 

바로 이 현존으로부터 주의와 신념의 에너지가 발생하여 시간과 변화와 관련된 모든 작용을 지어 냅니다. 

주의, 습관, 조건화, 정체성 - - 이 모든 것은 오고 가고, 

우리는 그 움직임을 지켜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고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존재라면, 예를 들어 우리 생각이 어디론가 획 사라졌을 때 우리도 더 이상 여기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주의가 다른 데로 흐른다면, 우리도 그것과 함께 흘러가고 말겠지요. 

그러나 '지금 주의가 오락가락하고는 있지만 나 자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지켜보고 인지하는 무언가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냥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 완전히 여기에 계세요. 

하고 싶은 만큼 요가나 태극권을 하세요. 

원하는 만큼 많은 나무를 오르고 

많은 강을 헤엄쳐 건너세요.

그러나 아무리 멀리 헤엄을 친다고 해도,

이 한 없는 바다를 헤엄쳐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세상은 이 '하나'의 마음 안에서 한낱 현상으로 존재할 뿐, 

어떤 세상도 이 하나를 정복할 순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내가 있음'을 알고 지금 당장 그것을 확인해 본다면,

'내가 있음'이 어떤 움직임과도 무관함을 알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있습니다.'

'내가 있음', 즉 현존의 상태에 익숙해진다면, 

설령 매우 피곤한 마음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느끼더라도 

오래지 않아 거기서 저절로 빠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켜봄'으로부터 그런 혜택을 얻으려면 

고요함 속에서 관찰하는 태도를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온전한 하나'의 향기에 완전히 젖어들 때까지 계속 관찰자로 머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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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으로 머무세요.

별다른 저항 없이 떠나거나 사라지는 관념들이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고 순순히 떠나지 않으려는 문제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의 뿌리 깊게 박혀 있던 그 부정적 패턴, 즉 바사나(vasana)를 직시해야 합니다. 

자아탐구의 빛 아래 그것을 드러내세요. 

 

내가 인지하는 것이 내가 아니듯이, 나의 경험은 내가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런 좋거나 나쁜 경험을 '당하는' 대상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일까요? 멈춰서 내면을 바라 보세요. 

 

제가 여러분께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하세요.

현상적 마음에 쏠렸던 주의를, 실제가 아닌 모든 것 - 정의될 수 있고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 이 버려진 뒤에 

남아 있는 그 텅 빈 공간으로 돌리세요. 

그 안에서 확인하세요. - 이것이 바로 나뉘지 않는 우리의 참자아입니다. 

 

우리의 의식이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의식 그 자체는 어떤 현상에도 동요되지 않을 뿐더러 창조된 적 없이 늘 그 자리에 있어 왔습니다. 

이 순수의식이라는 참자아의 자리에서, 우리는 의식의 드나듦마저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식이 일어나는 의식보다도 앞선 존재이며, 형상들이 나타났다가 다시 무(無)로 흩어지는 것이 

지각되는 현상계보다도 앞선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순수 의식으로 머무세요. 

 

왜 우리는 이런 식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이 질문들 - 나는 어디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가?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갖고서 보고 있는가? 

나라고 하는 이 '보는 자'는 누구인가? -을 살펴보는 것이 형체가 없는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단계이기 때문이지요. 

만일 우리가 자신의 본질인 형체없는 궁극의 '보는 자'라는 점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자신을 현상계를 '경험하는 자'인 에고로 여길 것입니다. 

그후 어떤 생각, 기억, 혹은 사건이 필연적으로 나타나서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을 테고,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평정을 잃고, 익숙하지만 불안정한 개인성의 상태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갈 것입니다. 

그렇게 떨어지면서, 사실 기억조차도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기회를 놓치게 되겠지요. 

 

                             -무지 저, <드높은 하늘처럼, 무한한 공간처럼, 참된 나를 찾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