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다'는 느낌이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탐구를 해서 그 뿌리로 들어가시오.

2020. 12. 22. 22:46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질문자 : 업은 어떻게 해서 생에서 생으로 작용을 하며, 그러면 신은 어떻게 됩니까? 

 

마하리지 : 신이란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신이오.

 

질문자 : 존재성의 앎이 해소되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마하리지 : 이것 보시오. 지금 라이터를 켰는데, 이제 이것이 꺼졌소. 이것을 불이 죽은 것이리고 생각하는 것이오? 저 존재성이 소멸되면 그것이 본래 나왔던 브라흐만 속으로 되돌아가서 합일되는 것 뿐이오. 

 

질문자 : 존재성이 사라지면 어떤 업도 없습니까?

 

마하리지 : 존재성이 없으면  무슨 행위가 있을 수 있겠소? 존재성이 있으면 현상계가 있고, 행위들은 의식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겠지만, 어떤 행위자도 거기에는 없소.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된 것이 자신을 행위자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오. 저 '내가 있음'은 과육이 많은 과일 씨앗과 같소. 그 과일 씨앗 안에는 그 과일 나무 씨앗들의 숲이 잠재적인 상태로 이미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내가 있음'은 행위들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계의 씨앗이며, 그  안에 어떤 특정한 행위자라는 것은 없소. 과실 속의 씨앗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오? 그 과실즙의 정수에서 그 씨앗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씨앗이 만들어 질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나무 자체 안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그 나무가 생기고 성장하는 모든 상(相)의 기억을 그것이 기록하는 것이오. 그래서 때가 되면 그것이 확장되어 또 하나의 나무가 되는 것이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씨앗 안에 기록될 뿐이오. 

인간의 씨앗도 마찬가지인데, 그 씨앗이 언제 심어져서, 그것이 언제 부모의 이미지를 기록해서, 그 특정한 씨앗이 그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을 띠고 특정한 몸의 형상을 얻겠소? 그 원리는 무엇이오? 

TV화면을 예로 들어 봅시다. 그 화면상에서 그대는 온갖 장면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데, 이 영상들은 어딘가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가 지금 재생되어 상영되는 것이오. 그래서 그것들에게 멈추라고 우리들이 소리를 지른다 해도 그들은 멈추지 않는 것이오. 이것은 별로 적절한 예는 아닌데, 인간의 씨앗이나 자연의 씨앗은 그와 같은 혹은 비슷한 이미지를 기록해 둔 데서 자발적으로 성장하지만, TV녹화물은 인간 지성의 기술에서 나오니깐 말이오. 

 

질문자 :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완전한 해법이 없습니다. 남아 있는 집합체들이 있어서 그것이 새로운 존재를 형성하게 됩니다. 

 

마하리지 : 붓다의 철학이 어떤 것이든, 그런 것은 모두 다양한 관념, 다양한 개념들이오. 각 개인 안에서 그 개념들이 싹이 트는데, 그것들이 자발적으로 나올 때에 그는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오. 그는 그 관념들이 좋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오. 

나는 남들의 다양한 관념이나 판단에 따르고 싶은 마음은 없소. 그 판단들 중에서 최선은 주 크리슈나가 내린 것이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판단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개념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말했소. 다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마시오. 

이제 그대는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그대 자신의 궁극적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 그대의 진실된 정체성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오. 거기서 안정되어야 하오. 나의 스승님이 나에게 궁극적인 목적지를 가리켜 주었고, 나는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안정시켰소. 

한 사람이 있다는 것('내가 있다'는 앎)이 그 사람의 주의(主意)에 떠오르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주의 안에 없을 때는 그 원리가 없었겠소? 있었소. 그 원리는 오염되지 않은 상태이고, 주의가 없어도, 있는 것이오. 비주의(非主意,절대진아상태)  안에서 그것이 영원히 지배되는 것이오 

그리고 획득한 모든 것은 브라흐만에게 봉헌물로 바쳐진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소? 

이 모든 지식, 이 모든 지각성은 브라흐만에게 바쳐지는 것이오. 

 

질문자 : 만약 몸이 존재성의 음식이라면 우리는 몸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평안이나 고요함이 아니겠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몸을 통해서 존재성을 걱정할 테니까요. 

 

마하리지 : 그대가 몸을 떠나면 그 평안을 누가 사가겠소? 

 

질문자 : 제가 비록 몸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성의 음식이라는 것을 알기에 걱정이 좀 됩니다.

 

마하리지 : 몸을 보존하기 위해 조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좋지만, 이 나타난 몸은 그대가 먹는 음식기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식물들의 정수 혹은 즙으로부터 모든 종(種)이 생겨나는 것이오. 곤충,동물, 인간 등이 말이오. 존재성의 성질은 그 즙 안에, 식물들 안에  잠재적인 상태로 있소. 각각의 종(種) 안에 저마다 지각성이 있소. 그 원리란 그냥 아는 것(아는 성품)인데, 그것은 누구의 지각성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존재성이나 지각성이 있다는 것 뿐이오. 

 

질문자 : 존재성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까?

 

마하리지 : 여러 가지 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표현들은 다양하오. 몸의 형태가 다르고, 음성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소리가 다르고, 맛이 다르오. 무한하고 다양하오. 

 

질문자 : 존재성이 어떻게 다를 수가 있나요? 존재성은 오직 하나 뿐이 아닙니까? 

 

마하리지 : 소리 그 자체는 동일하지만 여러 악기들을 통해서 나오는 그 표현은 서로 다르오. 같은 의식으로부터 나와도 끄리슈나의 몸을 형성하면 끄리슈나가 태어나고, 당나귀의 몸이면 당나귀가 나오지만, 의식은 동일하오. 

 

질문자 : 구나들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의존합니까? 아니면 이미 존재합니까? 

 

마하리지 : 초기 단계에서는 일체가 잠재적으로 이 음식 가치를 갖는다고 이해해도 되오. 그대는 이 음식 가치와 생기의 이 조합과 저 ' 내가 있음'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이 '내가 있음'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탐구하고 이해해야 하오. 그 뿌리로 나아가야 하는데, 뿌리는 '물라(mula)를 뜻하고 물라는 아이를 뜻하오. 그 아이의 형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탐구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그 근원자체로 나아가면, '내가 있음'이 하나의 씨앗처럼 이 현상적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오.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꿈 세계의 예를 들어 봅시다. 그대는 깊은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 '내가 있음'이 하나의 꿈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오. 

마찬가지로 이 현상세계는 저 '내가 있음'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오. 진리를 추구하다 보면 나중에 이것을 깨닫게 되는데, 궁극적인 발전은 그대가 이 '내가 있음'조차도 초월하여 절대진아 안에 안정되게 머무는 것이오.

'이 모든 세간적 지식을 이해했으니 나는 지혜로 충만해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심하게 변비에 걸린 상태와 같소. 

내가 지금 그대에게 설명한 이 모든 것은 그대가 직접 깨달아야 하오. 

이 존재성이 그대에게 다가오기 전에도 그대는 항상 존재했지만, 그것을 의식하지는 못했소. 

절대자는 그 자신을 전혀 모르오. 우리의 참다운 상태는 지(知)의 상태가 아니라 지(知) 이전이오. 

 

                                                              - Seeds of Consciousn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