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식 없이 '내가 있다' 안에 있으시오

2020. 12. 8. 23:11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질문자 : 그 이해는 왜 그렇게 금방 사라지고 변합니까? 

 

마하리지 : 그것은 육체의 느낌에 달려있소. 모든 사람이 여기서 지식을 얻겠지만, 각자의 행동은 다를 것이오.

 

질문자 : 저 자신은 똑같은 의식을 붙잡고 있는데, 그 의식 안에서 반영되는 이해가 날마다 완전히 변합니다. 

 

마하리지 : 그렇소, 마음의 습, 마음의 이해라는 범위 안에 있는 이 앎은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소. 그것은 매 순간 변하고 있어서. 결코 한 가지 앎에 안정되게 머무르지 않을 것이오. 

 

질문자 : 말하자면 최종적인 이해같은 것은 없습니까?

 

마하리지 : 이 이해의 시작과 끝은 다 '내가 있다'는 앎이오. 개념들의 시작은 1차적 개념인 '내가 있다'와 더불어 출발했는데, 모든 개념들 속을 방황하다가 그것들을 배격하고 나면, 이 마지막 혹은 최초의 개념도다  버려야 하오. 

 

질문자 : 그 개념들을 버리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개념이 없어져야 합니까? 아니면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까? 

 

마하리지 : 담배 라이터의 이 불꽃을 보시오. 나타났다 사라졌소. 그것도 이와 같소. 이 불꽃이 무슨 개념을 가지고 있었겠소? 개념없는 것이 가장 완벽하고 적합한 것이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대가 어떤 대상을 집중하려고 할 때에 해야 하오. 그대가 라마, 끄리슈나, 그리스도에 집중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럴 때 집중하거나 주의를 기울인다는 문제가 있소. 이것은 '내가 있다'는 앎일 뿐이오. 

 

질문자 : 문제는, 제가 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면 기울릴수록 마음 속에 나타나는 개념들이 더욱 커진다는 것입니다. 

 

마하리지 : 의식에 어떻게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이오? 의식 그 자체가 집중해야 하오. 

 

질문자 : 제가 한 말도 그런 뜻입니다.

 

마하리지 : 의식을 이해하고, 의식은 그대 자신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하오. 

 

질문자 : 잘 안됩니다. 잘 안된다구요 !

 

마하리지 : 푹 놓아 버리시오. 그대가 무엇을 요구해도 나는 만족시켜 줄 수가 없소. 그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그대가 원하는 어떤 것도 들어 줄 수가 없소. 나는 그저 그대의 실체를 이야기해 주고, 그것만 강조할 것이오. 그대는 자신을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거나 변형시키고 싶어 하고 있소. '나는 이것이 되고 싶다', '나는 저것이 되고 싶다'하고 말이오. 나는 그대에게 그대의 뿌리가 무엇인지, 가장 내면에 있는 핵심, 그대의 실체만을 말해 줄 것이오. 이것봐요, 나는 조각가가 이니오. 나는 그대를 위해 어떤 상(像)을 만들어서 그대가 이 상(像)같이 되도록 히지는 않소. 

 

질문자 : 의식이 그 자신을 만물로 보아야 할 이 필요성은 어디서 나오나요?

 

마하리지 : 그대는 그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존재하는 것을 사랑하오. 그래서 그런 필요성이 나오는 것이오. 그대가 이해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딘가에 어떤 걸림돌이 지금 있소. 그렇지 않소?

 

질문자 : 한 장의 카드입니다. 저는 그 한 장의 카드를 숨기고  있습니다. 

 

마하리지 : 그것을 내버리시오! 손해 볼께 어디겠소? 게임을 포기하시오. 내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든지, 아니면 아예 듣지 마시오. 여기 오든지 아니면 오지 마시오. 나는 그대가 무엇인지, 그대의 '내가 있음'이전에 그대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소. 그대의 부모님이 서로 만나기 전에도 나는 그대를 알고 있소. 나는 그대의 부모님들이 만난 뒤에 그대의 존재성을 알고 있소. 그것이 여러 단계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것이 서로 다른 모습들로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모두 잘 알고 있소. 어떤 사람이 125세라고 합시다. 어린 시절 이후로 그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성장해서 많은 속세적 삶을 알게 되었소. 이제 그가 배웠거나 얻는 것이 무엇이든, 모든 것은 사라지고, 그는 침상에 누어있소. 그리고 지금 무엇이 남아 있겠소? 저 아이 의식, 저 아이 무지만 남아 있소. 그리고 그것들 마저 사라질 것이오. 그것이 천당이나 지옥으로 가져가겠소? 아니오. 그 무지는 솟아 니왔던 것이고, 그 무지는 이제 사라질 것이오. 

 

질문자 : 그러면 문제는, 그 무지가 시간의 과정을 통해서만 사라질 수 있는가, 아니면 지금 멈추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하리지 : 바로 그 중간이오. 그것은 음식과 물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오. 그것을 공급하지 않으면 그것은 없어지고 사라질 것이오. 

 

질문자 : 하지만 선생님의 경우에는 그것이 사라졌는데도 음식과 물의 공금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쭤보는 것은, 그 과정이 불가피한가, 아니면 그것이 지금 그냥 바로 끝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하리지 : 그대가 명상을 해야 하오. (그런 지식이) 거저 얻어지지는 않소. 넘어야 할 문턱은 의식을 통하는 것뿐이오. 의식을 흡수하여 의식 그 자체가 되어야 하오. 의식 안에 머무는 과정 속에서 거기서 빠져 나오게 되고, 거기서 그대가 알게 되는 것이오. 그래서 명상이 유일한 구제책인 것이오. 

 

질문자 : 의식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하리지 : 그것을 공정하게 시험해 보시오. 존재성 안에 있으시오. 존재성 안에 있도록 노력하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알지는 못할 것이오. 제 1단계로 그대 자신이 되시오. 그대의 존재성 안에 있으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내재된 영(靈)인 '내가 있다'이기는 하지만, 그대는 육체의식이 없이 그 존재성 안에 있어야 하오. 

그대는 자신이 지금 자신이 몸이라고 느끼지만, 저 존재성 안에 안주할 때는 몸 없이 어떻게 있는지 알게 될 것이오. 한편 그러면서도 몸과 생기는 아주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이 세가지(몸, 생기, '내가 있다'는 앎)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그대는 그것들과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이 세 가지를 아는 자는 부모들에 의해 붙잡히지 않을 것이오. 

 

질문자 :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존재성 안에 잠기셨을 때, 정확히 무엇을 이해하셨기에 의식을 초월하실수 있었습니까?

 

마하리지 : 명상을 해 보시오. 그러면 TV를 보는 것만큼이나 구체적으로 알게 될 것이오. 그때야 알게 될 것이오. '나'는 TV화면이 아니고, TV를 보는 자는 스크링 안에 없다는 것을 말이오. 명상을 하다 보면 더 많은 지혜에 눈 뜨고, 더 많은 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이오. 또한 같은 과정 속에서 그대가 무엇을 이해했든 그대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오. 

 

질문자 : 그래서 앞에서 제가, 의식이 그 자신을 더 의식하면 할수록 개념, 즉 지식은 더 커진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마하리지 : 그렇소. 그렇게 되오. 살아있는 하나의 대우주, 백만 개의 우주들이 그대의 의식 안에 들어 있소.

 

질문자 : 아는 자는 어떻습니까?

 

마하리지 : 아는 자와 알려지는 모든 것, 둘 다 사라질 것이오. 안정되게 머무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오. 

아버지, 어머니, 그대 라는 이 삼각관계는 어떻게 일어났소?  그것을 탐구하고, 그것에 대해 명상하시오. 

 

질문자 :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저는 같은 것이고, 저 의식의 한 흐름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마하리지 : 말을 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시오. 먹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배가 부르지는 않소. 

실제로 먹어 보아야 하오. 말에서 나온 지식을 가지고 영원한 평화를 얻지는 못하오. 진아지, 진아 깨달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소. 

 

질문자 : 마하리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그대의 존재성을 항상 기억하시오. '내가 있다'는 앎은 그대의 사뜨와 구나, 즉 존재성으로부터 그대에게 온 것이오. 사뜨와, 라자스, 따마스, - 이 세 가지 구나는 여기 현상계 안에서 활동하고 있소. 사뜨와의 성질, 즉 본질은 그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대가 움직일 수 있는 토대를 그대에게 제공하는 것이오. 라자스는 동기 유발 요인이고, 그대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 것이오. 따마스는 부동성, 응집력이오. 이 '내가 있다'는 앎이 다가오는 것은 그대의 몸이 태어난 이후에 나타난 것이오. 그리고 어릴 때의 그 몸이 저절로 자라나다 늙어가는 것이오. 모든 야망, 모든 욕망이 충족되고 모든 행위들이 타고난 상황에 따라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무엇이 남아있겠소?

마지막 남는 것은 단 하나, '내가 있다'인 것이오. 따라서 평생토록 이 '내가 있다'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 탐구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존재성에 탄생과 죽음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 존재성도 몸이 죽고 나면 해체될 테니까요.

 

질문자 : 몸이 죽고나면 존재성이 해체됩니까?

 

마하리지 : 이 존재성이란 음식 몸의 기운이 갖는 성질이오. 실은 이 존재성은 그대의 몸이라고 하는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이오. 모든 몸은 음식이오. 저 존재성의 느낌은 몸 안에서 나타나고 몸이 떨어져 나가면 없어지는 것이오.

존재성은 그대가 저 자아의 느낌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사랑은 존재성 안에 포함되어 있고, 그 사랑은 몸이 성장하면서 함께 성장하오. 그 존재성에 더 많은 사랑을 주기 위해, 그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나툼, 그 많은 다른 사물들이 필요한 것이오. '저것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나는 이것을 원한다.' 몸 안의 위안, 그리고 저 존재성, '존재애(있음에 대한 사랑)의 위안 말이오. 그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대는 아내가 있어야 하고, 집이 있어야 하고, 옷 기타 위안꺼리들이 있어야 하는 그런 식이오. 그런데 이 존재성은 업(業)을 창출할  뿐이오. 실은 누구도 태어나지 않고 누구도 죽지 않소. 사실을 말하자면, 저 존재성이 나타나고 존재성이 사라지는 것이오. 

 

                                                         - Seeds of Consciousne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