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26. 23:45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질문자 : 진아를 깨닫는데는 시간이 걸립니까, 아니면 시간은 깨닫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진아 깨달음은 시간문제입니까, 아니면 시간 아닌 다른 요인에도 달려 있습니까?
마하리지 : 모든 기다림은 부질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에 의지하는 것은 자기 기만입니다.
알아서 하게 내버러 두면 미래는 과거를 반복할 뿐입니다. 변화는 지금에만 일어날 수 있으며, 미래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질문자 :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지 : 수정같은 명료함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보십시오. 이것이 전부입니다.
질문자 : 진아 깨달음은 물질 안에서 일어납니까, 그 너머에서 일어납니까? 그것은 몸과 마음에 의존해야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체험 아닙니까?
마하리지 : 모든 체험은 환(幻)이며, 제한되어 있고 일시적입니다. 체험에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깨달음 그 자체는 하나의 체험이 아닙니다. 비록 그것이 새로운 체험의 어떤 차원으로 이끌어주긴 하지만, 그 새로운 체험들이 아무리 흥미롭다 해도, 예전의 체험들보다 더 실재하지 않습니다.
단언하건대 깨달음은 하나의 새로운 체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체험에 들어 있는 무시간적 요소의 발견입니다. 그것은 자각이며, 그것이 체험을 가능케 합니다. 모든 색깔 안에 있는 빛이 무색의 요소인 것과 꼭 같이, 모든 체험 안에 자각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체험이 아닙니다.
질문자 : 자각이 하나의 체험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자각은 항상 존재합니다. 그것은 깨달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의 덧문(샷타)을 여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빛으로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질문자 : 물질이란 무엇입니까?
마하리지 :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물질입니다.
질문자 : 과학은 물질을 이해합니다.
마하리지 : 과학은 우리의 무지의 변경을 뒤로 밀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질문자 : 그러면 자연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지 : 의식하는 경험들의 전체가 자연입니다. 의식하는 자로서 그대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각으로서, 그대는 자연을 넘어서 있습니다. 자연을 단지 의식으로만 보는 것이 자각입니다.
질문자 : 자각의 수준들이 있습니까?
마하리지 : 의식에는 수준들이 있지만 자각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한 덩어리이며, 동질적입니다. 마음 안에서 그것이 반사되는 것이 사랑이고 이해입니다. 이해의 명료함과 사랑의 강렬함에는 수준들이 있지만, 그것들의 근원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 근원은 단순하고 단일하지만, 그 선물은 무궁합니다. 다만 그 선물들을 근원으로 오인하지만 마십시오. 그대 자신을 강으로서가 아니라 그 근원으로서 깨달으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
질문자 : 저는 그 강이기도 합니다.
마하리지 : 물론 그렇지요. 하나의 '내가 있다'로서, 그대는 육신의 둑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또한 그 근원이고 바다이며 하늘의 구름이기도 합니다. 생명과 의식이 있는 한, 그대도 있습니다. 가장 작은 것보다도 작고, 가장 큰 것보다도 큰 그대가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있는 듯이) 나타나 보입니다.
질문자 : 존재한다는 느낌과 살아 있다는 느낌 - 이것들은 같은 하나입니까, 아니면 다릅니까?
마하리지 : 공간 안에서의 동일성이 전자를 창조하고, 시간 안에서의 연속성이 후자를 창조합니다.
질문자 : 당신께서는 언젠가 보는자, 봄, 그리고 보이는 것이 단 하나이지 셋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는 그 셋이 별개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의심하진 않습니다. 단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마하리지 : 면밀하게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봄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둘은 봄의 속성들입니다. 우리가 '내가 이것을 보고 있다'말할 때, '내가 있다'와 '이것'은 봄과 함께 나타나지 그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것'이나 보지 않는 '내가 있다'를 가질 수 없습니다.
질문자 : 저는 '나는 보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하리지 : '내가 이것을 보고 있다'가 '나는 내가 보지 않음을 알고 있다'나 '나는 어둠을 보고 있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봄은 그대로 있습니다. 알려지는 것, 앎, 아는 자의 3원성에서 앎만이 하나의 사실입니다. '내가 있다'와 '이것'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누가 압니까? 무엇을 압니까? 앎이 있다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질문자 : 왜 저는 앎을 확신하면서, 아는 자는 확신하지 못합니까?
마하리지 : 앎은 존재와 사랑을 수반하는 그대의 참된 성품의 한 반영입니다.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은 마음에 의해 부가됩니다. 주체나 대상이 없는 곳에서 하나의 주체- 대상의 이원성을 창조하는 것이 마음의 본성입니다.
질문자 : 욕망과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지 : 분명히 과거의 고통과 쾌락에 대한 기억이지요. 거기에 무슨 대단한 신비는 없습니다. 갈등은 욕망과 두려움이 동일한 대상과 관계 될 때만 일어납니다.
질문자 : 기억을 어떻게 끝낼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그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은 의식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과 그대가 바로 의식의 뿌리요 근원이자 토대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세계는 일련의 경험들에 지나지 않으며, 그대는 그것들을 의식하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경험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것은 열, 불길 그리고 불타는 나무와 같습니다. 열이 불길을 유지하지만, 불길은 나무를 태웁니다. 열이 없으면 불길도 연료도 없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자각이 없으면 의식도 없고, 물질을 의식의 탈것(운반수단, 즉 육체)으로 변형시키는 생명도 없을 것입니다.
질문자 : 당신께서는 제가 없으면 세계도 없을 것이고, 세계와 세계에 대한 저의 앎은 동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과학은 아주 딴판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즉, 세계는 구체적이고 연속적인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반면, 저는 1차적으로 의식의 한 자리라기 보다는, 개체와 종(種)으로서의 생존 메커니즘인 신경 체계의 생물학적 진화의 한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견해는 완전히 주관적인 반면, 과학은 모든 것을 객관적인 용어로 묘사하려고 합니다.
이런 모슨은 불가피한 것입니까?
마하리지 : 그러한 혼동은 외관상의 것이며 순전히 언어적인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실재)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관적이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물질과 마음은 별개가 아니라 한 에너지의 두 측면입니다. 마음을 물질의 한 기능으로 보면 우리가 과학을 갖고, 물질을 마음의 산물로 보면 종교를 갖게 됩니다.
질문자 : 그러나 무엇이 진실입니까? 무엇이 먼저 옵니까? 마음입니까? 물질입니까?
마하리지 : 어느 것도 먼저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것도 혼자는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물질은 형상이고 마음은 이름입니다. 그들은 함께 세계를 만듭니다. (거기에) 두루하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 실재, 곧 순수한 존재-자각-지복이며, 바로 그대의 본질입니다.
질문자 : 제가 아는 것은 의식의 흐름, 즉 끝없는 사건들의 연속이 전부입니다. 시간의 강이 흐르면서 (그것들을) 사정없이 데려오고 데려가 버립니다. 미래를 과거로 변형시키는 과정이 항상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하리지 : 그대는 자신의 말의 희생자 아닙니까? 그대는 마치 자신은 정지해 있는 듯이 시간의 흐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어제 목격한 사건들을 어떤 사람은 내일 볼지도 모릅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대이지 시간이 아닙니다. 움직이기를 멈추십시오. 그러면 시간도 그칠 것입니다.
질문자 :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시간이 그치다니요?
마하리지 : 과거와 미래가 영원한 지금 안에 합일될 것입니다.
질문자 : 그러나 실제 경험에서는 그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당신께 시간이 그쳤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마하리지 : 그것은 과거와 미래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일어난 모든 일과 일어날 모든 일은 마음대로 읽어볼 수 있는, 하나의 펼쳐진 책이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질문자 : 저는 얼마간의 수련에 의해 접근할 수 있는 일종의 우주적 기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상 못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있을 겁니다.
마하리지 : 한 수준에서 예상 못하는 일이 더 높은 수준에서 보면 일어날 것이 확실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마음의 한계 안에 있습니다. 실제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모두 (있는 듯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질문자 :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무 것도 없다니요? 당신께서 공백상태로 되십니까, 아니면 잠이 드십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세계를 해체하여, 당신의 다음 번 생각이 깜박여 저희들이 다시 소생할 때까지 저희들을 정지시켜 두시는 것입니까?
마하리지 : 오, 아니지요. 그것은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마음과 물질, 이름과 형상들의 세계는 지속되지만, 그것이 저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자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그림자는 제가 어디를 가든 저를 따라다니면서 존재하지만, 저를 전혀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경험들의 한 세계로 남아 있으나,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저와 관련되는 이름과 형상들의 세계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경험들은 굳이 말하자면 성질(속성)이 없는 순수한 경험들입니다. 그것을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 나은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다 표면의 파도들과 같아서, 항상 존재하지만, 바다의 평화로운 힘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질문자 : 어떤 경험은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규정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마하리지 : 처음에는 모든 경험이 그렇습니다. 거기에 이름과 형상을 부여하고 그것을 다른 경험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기억에서 생겨난 욕망과 두려움일 뿐입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경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경험들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면서도 여전히 하나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자 : 만약 그것이 의식적이지 않다면, 왜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십니까?
마하리지 : 그대가 하는 경험들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입니다. 의식적인 경험들은 아주 적습니다. 그대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대에게는 의식적인 경험들만이 중요하니까요. 무의식적인 것을 자각하십시오.
질문자 : 무의식적인 것을 우리가 자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마하리지 : 욕망과 두려움이 (자각을) 가로막고 왜곡하는 요인입니다. 마음이 그것들로부터 벗어났을 때, 무의식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 :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이 의식적으로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마하리지 : 오히려 그 반대지요. 의식적인 것이 무의식적으로 됩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 그 구별은 사라집니다.
질문자 :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자각하면서 무의식적일 수가 있습니까?
마하리지 : 자각은 의식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은 이원성에 대한 것입니다. 자각은 이원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인식의 단일한 덩어리입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고요하지만 그러면서도 절대적으로 실재하고, 강력하며, 효과적인,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창조말입니다. 그것들을 묘사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들에 조금도 영향은 없습니다. 그것들은 무의식적인 반면에 본질적입니다. 의식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변할 수가 없고 수정될 수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물이 변하려면 죽음을 통과해야 하고, 은폐와 해체를 통과해야 합니다. 금 장신구들은 그것을 녹여야만 다른 형태로 주조할 수 있습니다. 죽기를 거부하는 것은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질문자 : 육신의 죽음말고, 어떻게 죽는다는 것입니까?
마하리지 : 물어남, 초연함, 놓아버림이 죽음입니다. 충만하게 살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수적입니다. 모든 종말은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다른 한편, 살아있는 자(생명)가 아니라 죽은 자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대 안의 살아 있는 그것은 불멸입니다.
질문자 : 욕망은 어디서 그 에너지를 끌어옵니까?
마하리지 : 그것은 자신의 이름과 형상을 기억에서 끌어 옵니다. 그 에너지는 근원으로부터 흐릅니다.
질문자 : 어떤 욕망들은 아예 그릇된 것입니다. 그릇된 에너지가 어떻게 고상한 근원에서 흘러나올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그 근원은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습니다. 욕망도 그 자체로는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행복을 얻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그대 자신을 한 점의 육신과 동일시하고 나서 그대는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고, 이른바 행복이라고 하는 충만함과 완전함의 느낌을 필사적으로 찾습니다.
질문자 : 제가 그걸 언제 잃어버렸습니까? 저는 그것을 가져 본적이 없습니다.
마하리지 : 오늘 아침 깨어나기 전에 그것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대의 의식을 넘어가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질문자 : 어떻게 해야 넘어갈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그대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십시오.
질문자 : 그것은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마하리지 : 하지만 반복하겠습니다. - 그대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그것을 하십시오,
넘어가서, 그대의 정상적이고 본래적인 지고의 상태로 돌아가십시오.
질문자 :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마하리지 : 눈에 티끌이 하나 있으면 그대는 자신이 눈이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씻어내고 보십시오.
질문자 : 보기는 봅니다. 그러나 어둠 밖에 안보입니다.
마하리지 : 그 티끌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그대의 눈이 빛으로 가득 차서 넘치게 될 것입니다.
빛이 있습니다. - 기다리면서, 눈이 있습니다. -준비하고서. 그대가 보는 어둠은 그 작은 티끌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제거하고 그대의 본래적 상태로 돌아가십시오.
- 아이 엠 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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