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5. 22:56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마하리지 : 이른바 탄생은 무지의 출현인데, 소위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그것이 지배합니다. 이른바 지(知)는 모두가 쓸모없다는 것을 관찰하는 사람은 드믑니다. 진인은 삶이 그것이 요구하는 수고 만큼의 값어치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배우는 것은 다른 데서는 듣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서는 여러분이 활동에 말려들 것입니다.
방문객 : 브라민들의 순수성과 하층 카스트들의 불가촉성은 어떻습니까?
마하리지 : 그런 모든 것은 순전히 무지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진아지 속에서는 지(知), 심지어 '내가 있다'는 앎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씻겨나갑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까?
방문객 : 아닙니다.
마하리지 : 어떤 스승들에게는 의식이 상한선입니다. "그대는 몸이 아니라 역동적인 의식(Chaitanya,의식의 파동력, 생명기운)이다 " 그들은 의식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제 스승님조차도 저에게 "너는 의식인 신이다, 그 너머에 있는 것, 그것은 네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방문객 : 진인은 늘 지복 속에 있습니까?
마하리지 : 이 몸은 불타고 있습니다. 진아지는 이상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견딜 수 없습니다.
통역자 :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은 의식입니까?
마하리지 : 어떻게 그 질문을 했지요? 의식 말고, 견딜 수 있거나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영적인 공부에서 우리는 어떤 비이원성 상태에 도달합니다. '내가 있다'도 없고 다른 것들도 없습니다.
하나가 있을 때는 다른 것들도 수반되게 되어 있습니다. 진아지는 심오하고 불가사의합니다.
하나가 있을 때는 우리가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아주 최소한의 필수품들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존재의 지복을 체험해 보려고는 결코 시도하지 않습니다. 대신 계속 무엇을 얻어서 더 많은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분투합니까?
통역자 : 의식과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고, 활동 속에서 그것을 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하리지 : 사람들이 진아의 지복으로 만족합니까? 의식이 주의를 의식하게 됩니까, 아니면 주의가 의식에 주의를 기울입니까? 그대의 체험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은 의식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의식 없이 어떤 앎이 있습니까? 앎은 핀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지 않습니까?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활동을 관여합니다.
스승의 은총없이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아닌 것을 우리 자신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괴로움과 불행의 원인입니다.
만일 그대가 모든 것이면 어떤 두려움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방문자 : 아닙니다. 저는 어디서도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마하리지 : 모든 말은 진아 아닌 어떤 근원이서 나옵니다. 진아는 그 자신의 어떤 언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두 살짜리 아이는 자신의 언어가 없습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배웁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언어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다가 남들에게서 그것을 배웁니다.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은 결국 사라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오래 살면 언어가 우리를 떠납니다.
방문자 : 진아는 행복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마하리지 : 진아는 슬픔에서 벗어나 있고, 따라서 그것은 행복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영원자가 유일한 진리입니다. 비진리는 시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오고 갑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삶이 전개되는 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의식은 신적이지만, 그래도 영원자와 무한정 어울릴 수는 없습니다. 의식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진인은 형상을 가진 영원자의 한 표현입니다. 그는 형상이 아니고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가 곧 영원자입니다.
의식은 진인과 무한정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통역자 : 그것은 의식은 진인을 떠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마하리지 : 형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삶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보편적 의식의 경험은 문제들로 가득합니다. 그 외에는 거기에 어떤 이익이나 손해의 문제도 없습니다. 고통은 무지로 인한 그릇된 정체성에 기인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자신이 아닌 어떤 것으로 여기는 데 대해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지(知)를 나눠주어야 합니까?
통역자 : 진지한 구도자들은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마하리지 : 진아지를 포함하여 최상의 것을 늘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그것에 대해 댓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비디(인도식 담배)를 아껴주고 남에게 내놓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와서 듣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대담 도중에 가 버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는 질문들을 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시간과 기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존재성이 왜, 그리고 어떻게 출현했는지만 알아내려고 하십시오.
이 존재성은 백 년 전에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직접 아는 것입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나타났는지도, 책을 찾아 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묻지 않고 직접 알아야 합니다.
방문객 : 우리의 지식은 개념들로 가득합니다.
마하리지 : 그 개념들이 무지를 유지하고 두려움을 야기합니다.
언젠가 한 스승이 제자들 사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화만들이 가득 든 바구니에 대해 각기 따로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제자들은 한 사람씩 스승께 화만을 걸어드려야 했습니다. 어떤 의심이 있을 경우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화만걸어드리는 것을 생략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제자가 바구니 뚜껑을 들어 올리고 화만을 하나 집었지만, 즉시 그것을 바구니 안에 떨어뜨렸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코브라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같은 동작을 반복했습니다. 스승에 대하여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제자는 신선하고 예쁜 꽃들로 만든 화만을 집었습니다. 이 제자는 개념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래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개념들이 망상과 오해를 가져옵니다.
여러분의 존재성(의식)을 신으로 간주하고, 존재의 느낌만 가지고 그것을 숭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존재성이 실제로 신이 될 것입니다. 신은 의식 혹은 지(知)이고, 스승도 지(知)입니다.
속성있는 헌신에서 이런 숭배를 권장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 지(知)를 알 때, 그것의 참된 성품이 무지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겉보기에 지(知)로 보이는 것이 근원에서는 순전히 무지입니다.
이와 같은 지(知)가 무지를 제거하면, 남는 것은 완벽한 질서 속에 있습니다.
방문객 : 그렇다면 사람은 세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마하리지 : 만일 그대가 나무 한 그루를 연구하고 싶다면 잎들을 관찰해야 합니까, 뿌리를 관찰해야 합니까?
방문객 : 뿌리입니다.
마하리지 : 그대의 질문은 뿌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만일 누가 별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하면, 저는 거기서 그를 비틀어줄 뿐입니다.(약간 핀잔을 준다는 뜻임)
방문객 : '내가 있다'는 앎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마하리지 : 그것없이 그대가 그대의 세계에 대한 앎을 얻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과소평가할 수 있습니까?
방문객 : 탄생과 죽음의 개념을 어떻게 해야 없앱니까?
마하리지 : 그대의 의식의 기원과 원인을 알면 그대에게 어떤 탄생이나 죽음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도둑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있다'는 앎이 없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도둑처럼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도둑이 든) 밤은 무지를 의미합니다. 영원자는 결코 '내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들어온 도둑이 '내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도둑이 어디서 들어욌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이 도둑(존재성)은 혼자 들어오지 않고 뿌루샤(우주의 영)와 뿌라그리띠(우주적 본체), 즉 남성의 측면과 여성의 측면을 데리고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대는 비이원성의 상태에 있었는데 거기서는 존재의 느낌이 없었습니다. 이 도둑으로 인해 '내가 있다'와 세계에 대한 경험이 있는 이원성이 시작되었습니다.
뿌루샤는 침묵의 체험이고 그 안에는 어떤 말도 없습니다. 말은 쁘라끄리띠와 함께 시작되는데 그것은 여성적 측면입니다(* 뿌루샤(+극)와 쁘라끄리띠(-극) 간에 의식의 진동, 즉 파동성이 시작됨).
존재의 느낌이 없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존재의 느낌이 출현하면서 활동(파동운동)이 시작됩니다. 깊은 잠 속에서나 삼매 속에서는 존재의 느낌이 없고, 만족감이 있습니다 존재의 느낌이 출현하는 것이 갈등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없는 곳에 평안과 고요가 있습니다.
다른 데서는 여러분이 성공과 행복을 위한 임무들을 충실히 준수하라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에게 행위의 부질없음을 보여 주고 번뇌의 원인자체를 없애 줍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진정한 만족을 위해서는 행위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필요치 않은 지를 보여줍니다.
행위를 하면 한 동안은 더 잘 할지 모르지만 그런 행위들 중 어느 것도 여러분에게 영원한 만족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존재의 느낌이 없었을 때는, 있으려는, 곧 존재하려는 갈망을 포함하여 어떤 욕구도 없었습니다.
존재의 느낌이 온갖 욕구를 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공부로 돌아서는 것은 그들 안에 잠재적 상태로 있는 진아지가 떠오르기 때뿐입니다.
이른바 탄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듯이, 진아지의 떠오름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지(知)의 떠오름(일출)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영적인 공부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 잠재적 상태는 이 수건 속에 불(火)이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스승들은 여러분에게 완전함을 성취하는 법을 말해 주겠지요.
무엇을 하기 이전에 여러분이 이미 완전하다고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직접 아는 것 뿐입니다.
(새로운 방문객에게) 그대는 스승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대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스승이 있었던 것 같군요.
방문객 : 정말로 저는 스승이 없습니다.
마하리지 : 그대는 뭔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영적인 공부에서는 솔직하고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대는 스승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방문객 : 영적인 선생님입니다.
마하리지 : 스승은 의식 혹은 지(知, jnana)를 의미합니다. 그대가 그를 만났을 때, 그가 그대의 내면에서 지(知)를 깨웠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진아지에 대한 관심을 계발한 것입니다. 영적인 공부는 지(知)의 주고받기입니다.
주는 자인 스승이 지(知)이고, 받는 자인 제자도 지(知)입니다.
-대성 옮김, <무가 일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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