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7. 22:23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환상과 현실 --
질문자: 깨달음이 일어난 뒤에도 현상세계가 여전이 남아있습니까?
라메쉬: 그럼요. 진정 깨달음이 뜻하는 바는 주체 행동 의식이 사라진다는 것뿐이예요. 모든 행동이 참전체성이 하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지요.
질문자: 하지만 현상세계가 여전히 있는데도 그렇다고요?
라메쉬: 그럼요!
질문자: 현상세계는 환상일 뿐이지 않습니까?
라메쉬: 물론 그렇지요! 현자는 행동하는 자신의 몸도 환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어요. 바로 이점을 현자는 정확히 이해합니다.
질문자: 그렇다면 여기서 환상은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나요?
라메쉬: 환상은 시간을 너머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환상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이죠.
질문자: 그러면 "환상"은 "개념"과 같은 말이군요?
라메쉬: 그렇고 말고요!
질문자: 그럼 모든 것이 변하는군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신비주의자는 이 사실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말해왔는데, 이제는 과학자가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바라는 환상은 그 자체가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고정된 것, 변하지 않는 어떤 것, 안전의 보장이라는 환상은 마음이 원하는 것으로, 기본적인 환상이지요.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고히 이해한다면 안전의 보장을 끊임없이 바라는 마음은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독자성도 환상인가요?
라메쉬: 모두가 다 개념이예요. 이 현상세계의 바탕이 되는 '독자성'조차도 개념일 뿐입니다. 개인은 이 세상이 일어나기 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하지요. 오직 생각이 부재하는 침묵만이 사실입니다.
질문자: "환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헷갈리네요. 뱀으로 착각할 수 있는 밧줄이 아니라 자전거처럼 확실한 것을 보면 어떨까 하는데, 밧줄은 전혀 뱀이 아닌데도 뱀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자전거는 그냥 자전거이지 않나요? 자전거는 환상이 아니죠.
라메쉬: 일차적 환상과 이차적 환상이 있습니다. 베단타에서 주로 드는 예가 뱀으로 착각하는 밧줄이지요. 뱀으로 착각한 밧줄은 이차적 환상인데, 불을 비추어 보면 뱀이 아닌 것을 바로 알고 이 환상은 사라지지요. 하지만 밧줄 그 자체는 일차적 환상이죠. 밧줄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일차적 환상입니다.
질문자: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일차적 환상인가요?
라메쉬: 이렇게 말해보지요. 기본적으로 밧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의식 안에서 나타나는 것일뿐이죠. 밧줄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예요. 밖에 나가서 태양 아래에 서면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림자는 존재해요. 당신이 그림자를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림자는 사실이지만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환상이죠. 그래서 이 그림자는 이차적 환상입니다. 아주 꽉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몸 자체는 일차적 환상이고 이 일차적 환상은 현상세계라는 전체 환상 안에 있지요.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고 본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환상이고 본체도 알 필요가 없군요.
라메쉬: 그렇죠! (웃음) 저를 8년 동안 찾아오는 제 친구가 있는데, 현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렇게 묻더군요. "자네는 현실이 개념이라고 말하는 건가?" 그래서 저는 "그렇지. 현실을 내게 한번 보여줘 보게나."라고 대답했죠. 현실은 비현실이라는 개념을 상호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입니다. 지능이 비현실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으면 현실이라는 개념은 필요가 없어요. 깊은 잠을 잘 때는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묻지 않아요. 하지만 잠에서 깨어날 때 존재의 부재는 현실의 존재로 바뀝니다. 이 때문에 현실의 존재도 없고 존재의 부재도 없다는 이중부정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게 되지요. 이 모두가 다 개념일 따름입니다.
-- 모두가 다 개념이다 --
질문자: 우리는 개념화가 일어나기 전에 존재하는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그냥 '그것'으로 존재할 수만 있습니까?
라메쉬: 우리는 오직 '그것'으로만 존재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 또한 개념일 뿐이지요. (웃음) 다른 말로 해보자면, 라마나 마하리쉬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에 창조도 없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남는 것은 일하는 마음이 완전히 부재하는 침묵뿐이라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이 침묵속에 알아야할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개념이지요.
질문자: 여기서 들은 수많은 말씀들이 제 머리 속을 꽉채우고 있습니다만, 그냥 간단하게 제가 이해한 것을 말하자면 '모든 것이 그냥 일어날 뿐이다'는 것입니다. 이 몸-마음은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이 모두를 행하는 것은 참의식이죠. 그리고 이 몸-마음이 "생각"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든 것도 바로 참의식이죠.
라메쉬: 그렇고 말고요!
질문자: 제가 아는 한 그렇게 간단히 줄여볼 수가 있군요.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그렇기에 당신이 하는 말은 자신의 몸-마음에 깨달음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신경쓰는 이는 정말 없다는 말이돼죠! 뭣하러 신경씁니까?
질문자: 그 말씀을 들으니 질문이 하나 생기는데요, 깨달음도 개념입니까?
라메쉬: 당연히 개념이죠. 깨달음뿐만 아니라 현실 자체가 개념이죠!
-- 참의식과 참각성 --
질문자: 선생님, 단어에 관한 문제인데, 어떤 책들에서 보면 참의식과 참각성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을 기억하는데요.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라메쉬: 그냥 잊어버리세요.
질문자: 하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참각성...
라메쉬: 참각성은 모리스 프리드만(마하라지의 책 '아이 앰 댓'의 편집자-옮긴이)이 활동하는 참의식을 참의식이 '나는'으로 일어나기 전의 상태인 잠든 참의식, 즉 본체와 구분하기 위해서 쓰던 말입니다.
질문자: 그럼 그 두가지 참의식은 다른 것이군요.
라메쉬: 사실 "참각성"이라는 말은 그 둘이 분리된 다른 상태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 둘은 다르지 않아요. 하나의 상태가 잠들어 있거나 움직이는 거죠. 두가지 다른 참의식이 아니예요. 오직 하나의 참의식만 있을 뿐이며, 이 참의식이 잠들어 있거나 움직이는 것이지요.
질문자: 참각성을 참의식의 에너지라고 부르더군요.
라메쉬: 그래요. "에너지"라는 말을 쓰니까 이렇게 말해드리죠. 잠든 참의식은 잠재적 에너지인데, 이 잠재적 에너지가 자신을 활성화 시키면서 활동하는 참의식이 됩니다. 과거라는 개념을 가지고 생각하면 달라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잠재적인 형태로 있든지 활성화된 형태로 있든지간에 에너지일 뿐이죠. 잠들어 있든지 활동하든지 간에 같은 참의식입니다. 일단 이해가 일어나면 정말 어떤 말도 필요가 없어요. 어떤 개념도 필요가 없어요.
-- 존재감, 우리의 진정한 자산 --
질문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외의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존재한다"와 소유를 의미하는 "나의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 마치 "나의 몸"이나 "나의 생각들", "나의 집" 따위로 생각이 되지만 존재 그 자체에는 논쟁의 여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메쉬: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개념일 수 밖에 없지요. 유일하게 개념이 아닌 유일한 진리는 존재감이죠. '나는', 나는 살아있다, 나는 존재한다, 이것만이 진리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 이 진리 조차도 현상세계 안에 있죠.
질문자: 그리고 그 진리도 개념이죠.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궁극적으로 '나는' 조차도 개념이죠. 하지만 다른 모든 개념이 사라진다면 우리에게 남는 유일한 것은 '나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존재감입니다. 만일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감지력을 가진 존재가 당신뿐이라고 상상해보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존재감뿐이죠. 이때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의식조차 없을 겁니다. 차라리 "존재가 있다."라고 인식 하겠죠. 이때 인식을 하는 까닭은 현상세계가 남아 있어서 인식할 뭔가가 있기 때문이죠.
질문자: 그리고 인식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그것이 사실이군요.
라메쉬: 그렇죠. 그것이 참현실입니다.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나는"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인가요?
라메쉬: 맞아요. '나는', 여기 그리고 지금, 이 현재의 순간에.
질문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나요?
라메쉬: 그것을 모른다고요?
질문자: 제가 그것을 아는 방법은 내가 있고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계속하는 겁니다.
라메쉬: 아니죠. 그게 아니죠!
질문자: 존재감 그 자체입니까?
라메쉬: 그렇죠. 존재감은 늘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당신'이 존재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존재감은 이미 거기 있어요.
질문자: 대상이 없어도요?
라메쉬: 그럼요. 최초의 존재감은 비개별적이예요.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날 때 드는 첫 번째 존재감은 비개별적입니다. 이 존재감이 있고 난뒤에 나는 무엇 무엇이라는 의식이 일어나는 거죠. 개인의 비개별적입니다. 이 존재감이 있고 난뒤에 나는 무엇 무엇이라는 의식이 일어나는 거죠. 개인의 정체성은 나중에 일어납니다. 최초에는 오직 존재감만이, 비개별적 존재감만이 있을 뿐입니다.
질문자: 선생님은 "내"가 전혀 아니군요. 그러니까 "나"라는 의식이 없군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존재감은 육체가 있을 때만 일어나요. 육체가 없으면 존재감이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도구가 없는 거지요.
질문자: 아주 부서지기 쉬운 도구죠.
라메쉬: 물론이죠!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런 도구가 수십억개가 있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하나가 없어져도 문제가 안됩니다. 사람의 몸 속에서는 늘 수 많은 세포들이 죽고 새로 만들어지고 있어요. 누가 개개의 세포를 생각이나 합니까? "불쌍한 세포, 눈 깜짝할 시간 동안만 살다가 죽었구나!"라고. 아시겠죠?
질문자: 받아들임에 관해서, 지금 존재한다고 의식하는 것에 관해서,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삶 그자체로 보는 것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라메쉬: 그래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가 말하는 모든 것은, 그리고 누가 말하든지 간에, 또한 어떤 경전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다 개념에 지나지 않아요. 찾고 있는 것이 마음 자신의 이해력을 너머서 있다는 사실을 마음이 깨우치는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의사소통을 위해서 개념이 필요해요. 그 단계에 도달하면 마음은 저절로 조용해지고 침묵이 지배할 겁니다. 그때가지는 우리가 말하는 이 존재감 조차도 현상세계 안에 있어요. 보시면, 깨어있는 지금은 존재감이 존재합니다. 깊은 잠을 잘 때나 약물로 진정된 상태에 있을 때는 존재감이 부재합니다. 존재감이 존재하고 존재감이 부재합니다. 이렇게 존재감이 존재하고 부재하는 것 모두 현상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잠자는 참의식, 즉 잠재적인 상태인 본체의 상태에서는 존재감이 존재한다는 것과 존재감이 부재한다는 것 모두 다 부재합니다. 이렇게 한번 말해보죠. 사실 대상을 가지고 예를 들어야하기 때문에 어떤 예를 들어도 그 자체로 결코 완벽할 수 없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 주제에는 객관적 실재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들으세요. 아침에 한 남자가 잠에서 깨서 일어납니다. 이때 수염이 존재합니다. 면도를 하고 나면 이제는 수염의 존재가 부재하죠. 하지만 어린 남자 아이에게는 수염이 부재하지만 '잠재적'으로는 존재합니다. 이때는 수염의 존재가 부재하는데, 수염의 부재도 부재하죠. 수염이 난적이 없으니까요. 잠재성은 있죠. 그래서 제가 가리키고 있는 상태는, 존재감의 존재와 존재감의 부재의 부재, 이 둘 다가 부재하는 본연의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NX5)
'성인들 가르침 > 라메쉬 발세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의식이 말하다(9) (0) | 2020.08.21 |
---|---|
참의식이 말하다(8) (0) | 2020.08.14 |
참의식이 말하다(6) (0) | 2020.07.31 |
참의식이 말하다(5) (0) | 2020.07.24 |
참의식이 말하다(4) (0) | 2020.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