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4)

2020. 7. 18. 15:28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나타난 세상 -- 

 

질문자: 세계의식10은 다른 영적차원에서도 자신이 있음을 알까요? 

 

라메쉬: 세계의식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세계의식은 세상에 관심이 없어요. 모든 일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지요. 모두가 다 에너지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일부러 관찰하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세상은 재미있고 신비로우며 매력적인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은 전혀 문제없이 기능하고 있어요. 그런데 물리학자들은 세상을 관찰하면서 세상이 자신들의 상식대로 기능하기를 바라는데, 세상이 상식에 벗어나서 기능하는 것을 발견하면 이런 식으로 얘기하죠. "어떻게 입자가 입자처럼 행동하다가 뜬금없이 파동처럼 행동할 수가 있지? 어떤 파동은 파동처럼 행동하다가 느닷없이 입자가 되버리질 않나." 물리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입자는 때때로 파동처럼, 

파동은 때때로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고 어쩔 수 없이 "파동입자"라는 단어를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관찰하면서 문제를 만들어 낼 때만 해결책이 필요해지지요. 하지만 세상은 자기만의 재미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죠. 전혀 문제가 없어요. 오직 관찰하면서 개인의 입장에서 "이것은 이래야만 한다거나 이러지 말아야한다"라고 할 때만 문제가 생기지요. 

 

질문자: 그럼 다른 차원에 있는 신과 영들은 한 개별 관찰자가 그들을 보고 개념화해서 해석할 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실로 그렇습니다. 

 

질문자: 세계의식은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군요? 

 

라메쉬: 활동하는 세계의식은 자신을 알죠. 하지만 세계의식은 전체 계획을 하나의 전체적인 계획으로 보기 때문에 각 개인을 알 필요가 없어요.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우리 인간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여신들이 실재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렇습니다. 그들도 당신만큼이나 실재합니다."라고 답하셨죠. 창조도 없고 파괴도 없으며 세상 모든 것은 단지 참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알아서 자기 갈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신이나 여신들에 관한 의문은 일어나지 조차 않습니다. 개별적인 존재라는 것만큼이나 신과 여신들도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창조물일 뿐입니다. 

 

질문자: 저는 선생님 가르침의 원리가 이해가 안 되는데, 도덕적 반감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에 모순이 있어서 입니다. 우리는 개인으로 존재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는 개인의 육체와 경험, 기억들로 결정되는데, 선생님은 개인이란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세요. 그러면 개인의 자아라는 영역을 제외하고서 어떻게 참의식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라메쉬: 참의식은 당연히 존재하죠. 보시면, 참의식은 오직 유기체를 통해서만 자신을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어요. 만일 한 순간 모든 유기체가 죽어버린다면 참의식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문은 전혀 있지도 않지요. 참의식은 자신을 세상으로 나타내 보이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진정한 참주체입니다. 이 말은 주체인 참의식이 어떤 표현이든 하려면 반드시 객체를 통해서만 할 수 있다는 뜻이죠. 

 

질문자: 참의식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라메쉬: 참의식의 근원은 참의식이죠.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니까요.

 

질문자: 참의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너머에 있군요? 

 

라메쉬: 그렇죠. 참의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데, 이 까닭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현상세계의 일부이고 이 현상세계는 참의식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 나타난 세상의 작용 -- 

 

질문자: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해낼 때 전생과 관련된 기억이 전혀 없는데도 자연 발생적으로 한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있는데 이것이 전생의 기억인가요? 

 

라메쉬: 생각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죠. 물론 어떤 생각도 일어날 수 있지만 의사에게 일어날 만한 생각이 변호사나 기계 정비사에게는 좀 처럼 일어나지 않지요. 특정한 몸-마음 유기체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타고난 성격들과 관련이 있어요. 아인슈타인의 두뇌에서 일어난 그 방정식에 대한 생각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여기서 기본적으로 주의할 핵심은 인간의 마음이 자신의 한계를 완전히 너머서 있는 어떤 것을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하면서 엄청난 역설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마음은 삶을 이해하지 못 하기때문에 삶 전체가 역설이 되지요. 예전에 뉴턴주의 물리학자들은 세상의 일부만 이해하면 세상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부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부분을 이해하려면 전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데, 이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상당히 혼란스러워지죠. 왜냐하면 이렇게 큰 것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이 가진 지능의 한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예요. 숙명을 자유의지에 반대되거나 대비되는 뜻으로 말하면 안됩니다. 자유의지도 숙명의 일부이기 때문이죠. 자유의지를 어떤 생각의 결과로 갖게되는 무언가로 여겨요. 하지만 이런 자유의지로 이끌어주는 그 생각 조차도 전체 작용의 일부예요. 그래서 자유의지를 숙명에 반대되는 뜻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이런 모든 어려운 점을 논의하는 짧막한 글이 여기 하나 있어요. 천천히 읽어드리죠.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많은 혼란이 없어지는지를 보면 놀랄 겁니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조하다.

 

확률이론 - 큰 수의 법칙 

라메쉬 : 세상이 간직한 최고의 비밀들 가운데 하나는 원자 아래에 있는 미시세계의 소립자들이 어떻게 동시에 파동입자이기도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미시세계에서는 엄격한 결정론과 역학적 인과관계를 거스르면서 동시에 거시세계에서는 이토록 확실하고 질서있는 일상의 경험과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는 지에 관한 의문과 관련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거시세계는 아주 결정적이고 아주 확실하고 아주 정확한 원인과 결과를 갖지만 이런 거시세계의 바탕이 되는 미시세계는 인간의 마음과 지능이 보기에는 완전히 혼돈의 세계입니다. 이런 혼돈과 무질서로부터 어떻게 거시세계의 질서가 일어나는 걸까요? 현대 과학자들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이런 불가사의해 보이는 묘기는 확률 이론, 즉 "큰 수의 법칙"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답합니다. 그렇지만 이 큰 수의 "법칙"은 물리적인 힘들로써 설명이 안됩니다. 인간의 지능은 "자연법칙은 특정한 물리적 기반을 가져야만 한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된 가정입니다. 이 법칙은 물리적 힘들로써 설명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허공에 붕 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예를 보면 이점을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처음 두 예는 워런 위버(Warren Weaver)의 '확률 이론' 책에 나오는 고전적 사례들입니다. 첫 번째 예로, 뉴욕 보건국에서 나온 통계를 보면 1955년에 개가 사람을 무는 하루 평균 횟수는 75.3번으로 보고됐습니다. 1956년에는 73.6회, 1957년에는 73.5회, 1958년에는 74.5회, 1959년에는 72.4회입니다. 어떻게 개들이 언제부터 사람들을 물기 시작하고 언제부터 물기를 멈추어야 하는지 아는 걸까요? 비슷한 확률의 신빙성은 지난 세기 동안 독일 육군 병사들에게 치명적 발길질을 가하는 기마대 말들에서도 보입니다. 이 일도 확실히 일명 확률의 방정식이라는 것에 따라 좌우됐습니다. 그리고 영국과 웨일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동기에 의해서 살인이 일어났지만 똑같이 통계의 법칙을 따랐습니다. 세계 일차 대전이 끝난 뒤, 1920년부터 1929년까지 10년간 평균 살인 사건 수는 100만 명 인구당 3.8명이었습니다. 그리고 30년대에는 3.7명, 40년대에는 3.9명, 50년대에는 3.3명, 60년대에는 3.5명입니다.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왜? 인간의 지능은 본디 "왜?"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유일한 답은 "왜 아닌가?"입니다. 이 기괴한 예들은 수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창시한 파스칼 때부터 철학자들을 난감하게 만들어왔던 확률이 가진 역설적 본성을 잘 묘사합니다. 금세기 최고의 수학자라고 할 수 있는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은 이것을 "흑 마술(Black Magic)"이라고 불렀습니다. 큰 수와 관련해서 보면 개별 사건들에 대한 종합적 결과를 확률 이론으로 기괴할 정도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지만 각각의 개별 사건만을 놓고 볼 때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런 역설을 잘 보여줍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확실성을 제공하는 불확실한 것들의 큰 수, 타당하고 완전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무작위 사건들의 큰 수, 역설적이든 아니든 이 큰 수의 법칙은 작용합니다! 신비로운 점은 왜, 어떻게 작용하는가 입니다. 큰 수의 법칙은 물리학과 유전학, 경제 계획가, 보험 회사, 도박 카지노와 여론 조사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너무도 많은 곳에 쓰여서 이 "검은 마술"은 의심의 여지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힘이 이렇게 통제하고 바로잡으며 영향력을 발휘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됩니다. 어떻게 뉴욕의 개들이 언제 물기를 멈추고 언제 일일 할당량을 채우는지 아는가? 어떻게 영국과 웨일즈의 살인자들이 백만 명당 희생자가 네 명에 이를 때 살인을 멈추게 되는 되는가? 어떤 신비한 힘이 룰렛의 공으로 하여금 장기간에 걸쳐 게임의 균형을 맞추도록 유도하는가? 우리는 확률의 법칙 때문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칙에는 법칙을 강제하는 물리적 힘이 없습니다. 이 법칙은 중요하면서, 또한 사실상 전능합니다. 이런 비 인과적 힘이 가지는 목적과 의도는 알 수 없는데, 더 정확히 말해서 인간의 지능으로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대체적인 우주의 진화를 관찰해 보면, 이것은 더 높은 형태의 질서와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노력과 관련있음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파이먼이 결론을 내렸듯이 무질서에서 나오는 질서의 원칙은 더는 파헤칠 수 없고 불가해하며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왜?'라고 묻는 것은 '왜 우주가 있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왜 공간이 3차원을 가지는가?'라고 묻는 것과도 같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간에 세상은 3차원으로 존재합니다. 데이비드 봄(David Joseph Bohm) 교수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부분들을 통해서 세상을 분석할 수 있다는 고전적인 견해를 부정하고 나눌 수 없는 전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이끌어 주고 있다." 한 도가(道家) 스승은 "풀 한 잎을 뽑아 들며 세상을 흔든다."라고 말하며 이것을 아주 생생하게 알려줍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들 가운데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지 않는 사건은 없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그 풀 한 잎을 땅에서 뽑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그 풀 한 잎이 뽑혔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그 풀을 뽑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원리는 형이상학적으로 근본적인 사실을 암시합니다.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가 자신의 유명한 방정식을 만들기 전인 1925년에 "세상을 보는 나의 시점"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자신의 인생은 그저 존재 전체의 한 조각이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그 전체입니다. 이런 전체가 구성된 방식은 우리가 한번 언뜻 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인도인에게 익숙한 브라만의 신성하고 신비한 관용 어구인 "그대가 그것이다."에 담긴 뜻을 말해줍니다. 이 표현은 아주 간단하지만 완전합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나는 동쪽에도 서쪽에도 있다. 나는 아래에도 위에도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 생활에서 어느 정도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다른 의지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무기력한 희생자라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런 다른 의지는 믿기 힘들 정도로 높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데,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이것을 "형이상학적 존재"라고 불렀고 개인의 의식을 꿈이라고 하면 이것은 보편적 의식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계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명백한 무질서에서 나오는 초자연적 규칙이 존재하고 불확실성에서 나오는 어떤 확실성의 확률 이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 들이면, 해석을 찾지 않고 그냥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역설이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쉬울 겁니다. 이것은 그냥 있습니다. 있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작용이고 그 속에서 인간은 정말 작은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설이 있는 세상에 살지만 관찰한 것들을 한데 묶는 완전한 규칙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무언가가 빠진 것이 나타납니다. 역설이 있으나 그 역설에는 절묘한 규칙이 있는데, 제한된 인간의 지능이 보기에는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그것을 관찰해서 패턴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에 동의하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지능은 규칙을 좋아합니다. 이런 확률이나 불확실성의 이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 물리학자가 쓴 다음과 같은 문구를 찾았는데, 이렇습니다. "왜 우리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가? 왜 우리는 확실성을 가질 수 없는가? 우리는 확실한 세상을 가질 수 없다. 이런 세상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현 불가능하다. 확실성의 세계는 작동될 수가 없다." 불확실한 세상의 대안은 확실한 세상입니다. 확실한 세상에서 소립자는 매번 잘 정해진 모든 지점에서 정확한 위치의 경로를 따를 겁니다. 인간의 지능은 이렇게 이해가 가능한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안이 되는 확실한 세상은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런 확실한 세상에서는 모든 원자 속의 조그마한 전자는 매번, 매 순간마다 에너지를 사방으로 방출해야 합니다. 그러면 에너지를 모두 잃고 순식간에 원자의 핵으로 떨어집니다. 모든 원자는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 전자기 에너지는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모든 신경조직이 활동을 멈출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멈추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삶은 오직 불확실성이라는 축복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안전을 보장 받는다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이런저런 찾는 과정을 따라가거나, 어떤 제자들을 따라서 이런저런 시간 동안 명상을 하면 깨달음을 기대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이런 종류의 확실성, 이런 종류의 기대는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질문자: 그럼 찾는 이가 50명이 있다면 이 가운데서 깨달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웃음) 

 

라메쉬: 수 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몇 명이나 마음을 내면으로 돌립니까? 몇 명이나 자신이 누리던 "행복한 삶"을 포기하고 가련한 찾는 이가 됩니까? 이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질문자: 왜 참의식은 자신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싶어하죠? 

 

라메쉬: 참의식이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면 그것은 자연히 일어나는 과정이죠.

 

질문자: 자연히 일어난다고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나는', '나는'이라는 의식.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다 개념입니다. 고동치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가 있습니다. '없음'이나 '아무것도 아님'과 같은 이런 에너지가 죽어 있다면 이 '아무것도 아님'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의 잠재적 근원이기 때문에 이 잠재적 '없음'은 고동치고 있는 것이고 고동치는 잠재적인 에너지는 나타나야만 하고 자신을 활성화 시켜야만 해요. '나는' 또는 빅뱅, 아니면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이것으로 나타나면서 그 잠재적 에너지는 이 현상세계로 폭발하고 터지는 에너지가 스스로 고갈 될 때까지 기능하다가 잠재적인 에너지로 돌아가서 다시 나올 때를 기다릴 것입니다. 

 

질문자: 짧은 이야기를 하나 하고 제 질문을 하겠습니다. 곤충들, 특히 딱정벌레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이 하는 놀이가 하나 있습니다. 이들 곤충학자는 매년 아마존 정글 우림지역으로 가는데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딱정벌레 수천 종을 새로 발견합니다. 일반적 곤충이 아니라 딱정벌레 한 종만 가지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곤충학자들은 발견한 딱정벌레들에게 이름 붙이기 놀이를 하는데, 자신과 자기 주변 사람들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이죠. (웃음) 경쟁이 심하죠. 새로운 딱정벌레 종을 가장 많이 발견한 사람은 그 분야에서 거물이고 그 방에서는 신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딱정벌레들이 이미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런 놀이의 과정에서 새롭게 창조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이 생각 때문에 참 난감합니다. 마야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내"가 마야의 일부라는 식으로 생각을 하다보면, 과학처럼 보이는 그런 일이 '절대'라는 꿈으로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면 그냥 '절대'가 놀이하는 사람들과 그 놀이 자체를 꿈꾼 것일 뿐인지 정말로 헷갈립니다. 

 

라메쉬: 하신 질문이 장자(莊子, 고대 중국의 현자)가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서 한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군요.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이 장자인가? 아니면 지금 나비가 장자라고 하는 인물을 꿈 꾸고 있는 것인가?" 관찰자 자신이 어떤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로 질문한 것이라면 답은 '그렇다'입니다. 자, 누가 말하든지 어떤 경전, 어떤 무엇에서 말하든지 다 여전히 개념일 뿐인 것처럼 제가 하는 말도 다 개념이예요. 최초의 개념, 최초의 생각은 '나는'이라는 존재감입니다. 존재감이 있는한 모든 것은 계속 변합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라는 말을 제 방식으로 해석하면 딱정벌레를 찾는 자가 무엇을 찾든지 찾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찾는 천문학자가 무엇을 찾든지 찾을 거예요. 그래서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라는 말은 낙원이나 천국 따위를 일컽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자: 우리가 오늘날 보는 은하계와 이 우주 전체가 개념적으로 100억년에서 160억년 전에 나타났습니까? 아니면 절대의 투영으로 처음부터 죽 여기 있었습니까? 아니면 갈릴레오가 목성에 있는 4개의 달을 처음 관찰하면서부터 존재하기 시작했습니까? 

 

라메쉬: 보시면, 이 시점에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는데,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묻곤 하셨고 그분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궁극의 무기라고 불렀던 질문은 이렇습니다. "누가 알고자 하는가?" (웃음) 당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것은 바로 지능이죠. 핵심은 우리의 개인 꿈처럼 이 꿈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의 우주도, 그 천문학자도, 우주의 탄생을 찾는 과학자도 모두 포함하면서, 한 순간 갑자기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이 꿈이죠. 우리가 개인 꿈에서 이 깨어있는 꿈으로 깨어날 때는 깊은 잠에서는 있지도 않는 똑 같은 의문과 똑 같은 문제들을 갖고 깨어나지요. 질문하는 "누구"가 남아있는 한, 그 "누구"는 난감한 채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어요. 

 

                       -웨인 리쿼만 편집, 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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