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1)

2020. 6. 17. 12:35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제1장 가르침을 시작하며 (라메쉬 발세카)

 

저는 대담이나 세미나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늘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제가 누구도, 아무것도 팔아넘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문뜩 깨달았어요. 

실제로 어떤 개체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닌, 신이라는 존재로 대표되는, 이 아무것도 아닌 무엇을 제가 팔아넘기고 있었어요. 

그리고 참으로 웃긴 사실은, 제가 이 아무것도 아닌 무엇을 당신, 이미 전혀 아무것도 아닌 당신에게 팔아 넘기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농담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이 농담이 농담으로써 받아들아 들여지기 전까지는 이 농담은 아주 비참한 농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제 대담에서 한 사람이 "누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라고 제게 물었어요. 

과학이 우리에게 그 "누가"는 특정한 패턴에 따라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동하는 생생한 에너지의 한 패턴일 뿐이며, 이 에너지의 패턴 이외에는 "누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 "누가"는 형체없이 사라집니다. 

찾는 대상인 그 "무엇"은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무엇"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찾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 속으로 사라집니다. 순수한 본체의 침묵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 순수한 본체의 침묵에는 찾는 이도 없고 찾아지는 것도 없고 찾음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머리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이해한 것이 지능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하지만, '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진리를 체험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한번 해봅시다. 

모두 두 눈을 감고 편안히 있어보세요. 

제가 "편안히 있으라"고 했지, "등을 빳빳이 세워 앉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편안히 앉으셔서 편안히 있어보세요. 

제가 이렇게 말해도 여러분은 편안히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시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심지어 그 말이 "편안히 있어요."라는 말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편안히 있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편안히 앉아 있다가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자세로 똑바로 고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진리를 찾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찾음은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찾음에는 찾는 이가 없어요. 찾음은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눈을 감고 자신을 편안히 하고서 그 "누가"란 정말로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보세요. 

이 "누가"는 단지 상상 속의 개념일 뿐입니다. 

"누가"도 없고 찾고자 하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해가 될 때, "누가"도 없고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느낄 때 여러분은 엄청난 '아무것도 아님'의 느낌을, 온전한 자유의 엄청난 느낌을 경험하고 현재의 순간, 이 영원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사실, 영원의 순간, 이 현재의 순간이 바로 그 경험 자체입니다. 

이 순간에는 무엇을 경험하는 경험자가 없습니다. 

있는 모든 것이 그 경험이고 이 경험이 바로 현재의 순간이며, '여기 그리고 지금'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의 순간, 현재의 순간에는 "나" 도 없고 시간의 흐름도 없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습니다. 

"내"가 없고 시간의 흐름도 못 느낄 때 있는 모든 것은 침묵입니다. 

 

이 침묵에서는 개념화가 일어날 수 없어요. 

개념화하는 일은 오직 "나"와 시간의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나"와 시간의 흐름이 없다면 개념화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개념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가 현재의 순간이며 영원의 순간입니다. 

어떤 경험이든지 우리가 "경험한 것"이라는 경험은 오직 우리가 그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만 생깁니다. 

 

우리가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 경험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언제나 과거에 있어요. 

우리가 경험에 관해서 생각할 때, 오직 우리가 경험에 관해서 생각할 때만, 그 경험은 과거 속의 한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실제로 경험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는 언제나 경험자는 없습니다. 

모든 경험은 필연적으로 비개인적인 경험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을 생각해 볼 때만 그 경험은 개인적인 양상을 띠고 개별성이 부여되지만 그 경험 자체는 비개인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때 그 경험은 이미 과거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이든 환희든, 경험 그 자체에는 "내"가 절대 없는데, 이 까닭은 경험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있기 때문이며 이 현재의 순간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 현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재는 현재가 아닌데, 그 까닭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이런 모든 경험이 바로 현재의 순간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과 결부되지 않는 영원한 순간인 현재의 순간입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되면 많은 혼란과 많은 의문이 자동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경험이든지, 당신은 "그래 맞아! 하지만 난 바로 이 현재의 순간에 그 경험한 것을 생각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럼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 경험은 기억입니다. 

 

당신은 결코 그 경험을 다시 할 수 없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절대 같은 경험일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경험하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현재의 순간에 있던 그 경험은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미래의 경험을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 기억속의 경험을 생각해 보든 미래의 경험을 상상해 보든지 현재의 순간은 아니죠. 

그리고 마음이 부리는 전형적인 속임수는 이렇습니다. 

과거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 경험을 다시 하고 싶어 하든지, 아니면 다시는 그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비록 머리로만 이해하는 지적 수준의 이해라 할지라도 변화가 있습니다. 

이런 지적 수준의 이해 때문에 얽매임이 서서히 물러나면서 목격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아직 깨달음은 아니죠. 진정한 각성은 아닙니다. 

(편집자 주: 여기서부터 질문자의 질문은 "질문자: "로, 라메쉬의 답변은 "라메쉬:"로 표시합니다.) 

 

질문자: 이해로 가는 진리의 과정이 있다고 하면, 이해는 지적 수준에서 시작해서 '갑작스러운 참각성'이라고 부르는 이 무언가로 깊어지는데요. 이렇게 갑작스러운 일을 어떻게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나요? 

 

라메쉬: 정당한 질문이예요. 질문에 이런 식으로 답을 해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가 드릴 답은 개념입니다. 당신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고 합시다. 계단이 총 몇개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냥 계속 오를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여기서 과정은 계단을 오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정상까지 몇개의 계단이 더 남아 있는지 결코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언제나 마지막 계단이 갑작스럽게 느껴지죠! 문제는 당신이 과정에 관해 계속 생각하다보면 자꾸 서두르고 싶어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본성이죠.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는 한 선구적인 심리학자가 이 대담에 한 3- 4년 정도 참석해오고 있는데, 이 사람은 여전히 이 문제에 집착합니다. 이 사람이 "라메쉬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 이해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정인 한, 당연히 제가 그 과정을 서두를 수 있어야 해요."라고 말하더군요. 자 그러면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돌아가서 봅시다. "누가" 있어, 그 과정을 재촉할까요? 이 과정을 느낄 수는 있어요. 과정을 재촉하려 하지 않으면 과정은 자연히 빨라집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재촉하려하는 노력은 늘 "내"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과정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진행될 때 "무엇을 해야합니까?"라고 묻는 "내"가 남아있는 한, 재촉하려는 노력에 관한 그런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과정에 관여하지 말고 과정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예요. 그런데 "내게 영적인 순간들이 더욱 더 자주 일어나는구나!"라며 과정에 진전이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듭니다. 괜찮아요! 이런 생각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당신은 이런 생각을 통제할 수 없죠. 또는 "아무런 진전도 없구나."라는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과정에 진전이 있다는 생각이든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든지 간에 참의식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일 뿐이고 당신은 그런 생각을 통제할 수 없어요. 긍정적인 생각이든 부정적인 생각이든지 간에 생각이 일단 목격되면 생각은 사라지고 더는 그 생각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 과학이 형이상학을 만나다 -- 

 

라메쉬: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문제는 가진 지능이 제한되어 있는데 그림 전체를 보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현상적 그림과 비 현상적 그림 모두를 보고 싶어하죠. 

이것은 마치 작은 나사 하나가 기계 전체를 알고 싶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확정성 원리를 최초로 주창한 하이젠버그는 "물질 기초 입자의 그림을 그려보려 하거나 시각적 용어로 설명해보려는 시도 조차도 물질 기초 입자를 완전히 오해하는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가 바로 인간의 지능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지능은 알고 싶어해요. 이렇게 알아보려고 시도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연은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간의 지능이 그냥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결코 자연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이런 자연도 현상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런 제한된 인간의 지능으로 어떻게 이 현상세계가 생겨나온 그 근원까지 알고자 합니까? 

하이젠버그는 더 나아가서 "원자는 물체가 아니다."라고 말했어요. 원자의 표면을 이루는 전자들은 고전 물리학에서 보는 물체가 전혀 아닙니다. 전자는 위치와 속도, 에너지, 크기와 같은 개념들로 명확히 설명되는 어떤 것입니다. 이런 개념 정도는 인간의 지능이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가 원자의 수준까지 내려가 보면 이 세계에는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아요. 

 

질문자: 물리학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은 단순히 개념화한 것이죠. 

원자 아래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입자들을 생각해 만든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개념일 뿐이죠. 

둘이 아니라는 뜻의 '아드바이타' 가르침도 개념으로 만든 것일 뿐이죠. 

그냥 하나의 개념이고 관점일 뿐이죠? 

 

라메쉬: 그럼요. 관점일 뿐입니다. 개념일 뿐이예요. 모든 것이 개념이죠. 어느 현자(賢者,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난 참스승 - 옮긴이)가, 어느 성자가, 어느 누가 말했든지 간에 말한 것은 모두 다 개념입니다. 

 

질문자: 그럼, 개념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요? 

 

라메쉬: 현상세계의 수준에서 유일하게 개념이 아닌 것은, 모든 인간과 모든 감지력을 가진 존재가 매 순간 알고 있었던 지식, 바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이 순간, 여기 그리고 지금 존재한다.'라는 앎입니다. 

 

질문자: 그리고 그 지식 조차도 개념이죠. 

 

라메쉬: 궁극적으로 그 지식 조차도 개념이 되어버립니다. 

 

질문자: 선생님은 우리 모두가 신의 도구라고 말씀하세요. 이 말씀이 "당신은 모든 것과 함께 있다."라는 속담과 같은 뜻인가요? 

 

라메쉬: 참의식으로서의 당신은 그렇죠. 참의식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참의식은 모든 존재의, 모든 것의 바탕입니다. 

 

질문자: 그럼 저기 책상이 참의식인가요? 저 창문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참의식이고 저는 그 모든 것과 함께 있나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수천 년 동안 말해왔어요. 이제는 과학자가 있는 모두가 이런 전체이고 전체는 참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모든 것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 본디 나누어 질 수 없는 것을 나누려고 하면서 문제를 만들죠. 

 

질문자: 선생님은 '모든 것이 지금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무슨 뜻입니까? 

 

라메쉬: 저는 그 말을 설명하려고 1 킬로미터 길이에 10층 건물 높이 크기의 그림에 비유해서 말해요. 물리적으로 제한된 시력을 가진 당신이 아무리 뒤로 물러 서서 이 그림을 보려해도 한번에 다 볼 수가 없고 부분만 볼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당신이 그림을 다 보려면 구간 구간으로 나누어서 보게 되는데, 시간이 걸리죠. 하지만 그림 전체는 언제나 거기 있죠. 있었던 것은 있습니다, 있는 것은 있습니다, 그리고 있을 것도 있습니다, 바로 지금!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이 사실을 직관적 통찰력이 없으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요. 사실,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를 포기할 때만 직관적 통찰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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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마쉬 발세카의 대담록을 부로그에 올리며--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직제자인 라마쉬 발세카 님의 대담록 전체를 조금씩 본 브로그에 게재해 보겠습니다.

이 라메쉬 발세카의 대담록은 원래  인도 아드바이타 베단타 출판사에서 영어본으로 출판된 <Consciouness Speaks>라는 책을 국내의 "관음"이라는 분이 한국어로 번역하여 책으로 출판되지는 않고, 여러 정신수행 카폐나 명상 카폐에 PDF 파일 형태로  자유롭게 공개하고 제공하신 것을 다시 저의 개인 브로그에 옮겨와서 앞으로 조금씩 공개 게재해 볼 예정입니다. 

"관음"이라는 분의 본명은 제가 잘 모르고 그 분도 독자적인 카폐를 운용하고 있으며,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라는 책도 직접 저술하여 시중 서점에 나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좋은 가르침을 무료로 사회에 공개하여 주신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이 책 전체 내용을 순서대로 매주 조금씩 이 브로그와 옹달샘 카폐에 게재해 볼 예정입니다.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비교적 고전적이며 심오한 아드바이트 베단타 지혜를 현대 지성인의 제자인 라메쉬 발세카가 깨닫고 나서 현시대의 일반적인 지성인의 의식수준에 맞추어서 진솔하게 대담하는 수숭한 내용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무한진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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