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31. 21:43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질문자: 번역본이 많이 나와 있는 한 경전을 보면 마음이 생각을 일으켜 귀찮게 하면 그 반대편에 집중하라고 하더군요. 이것이 에고를 가리키는 가르침입니까? '절대'의 수준에서는 반대편에 집중하겠다고 선택하는 선택자가 없는데, 그럼 이 가르침은 어느 수준을 위한 가르침입니까?
라메쉬: 솔직히 어떤 가르침을 말하는지 모르겠군요.
질문자: 요가경 제2권을 보면, 죄을 지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 반대 편에 집중하라고 쓰여있습니다.
라메쉬: 제가 파탄잘리를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 말은 '양립할 수 없는 상반된 것이란 없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상반된 것은 양극성을 가져요. 상반된 것에서는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존재할 수 없어요. 노자(老子)가 이 양극성을 아주 멋지게 설명했어요. "아름다움을 말하는 순간 추함은 이미 거기에 있고 선함을 말하는 순간 악함은 이미 거기에 있다." 이점을 기억하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과 세상 어떤 것도 반대편의 것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그 반대의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아무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경전은 상반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양극성을 가지며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도록하고 있어요. 경전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어요. 또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은 아름다움을 원할 때 아름다움만을 늘 원하지만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순간 추함 또한 이미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라는 것이죠. 세상은 늘 변하고 있고 한 때 아름다움이 있으면 다른 때 추함이 있어요. 오늘날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이 훗날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현대 미술을 보면 요즘들어 아름답다고 하고 어떤 작품에는 수 십억원의 가치를 매기지만 수십년 전 까지만 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죠. 수년 전 낙태는 범죄였지만 오늘날 어떤 나라에서는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서 낙태를 후원하기도 하지요. 무엇이 선(善)입니까? 무엇이 악(惡)입니까? 무엇이 아름다운 것입니까? 무엇이 추한 것입니까? 누가 결정합니까? 무엇에 기초를 두고 결정합니까? 히틀러의 침공은 독일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죠.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 당시 히틀러는 독일 사람들에게 거의 신적인 존재였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서 보면, 같은 사건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빠요. 우리는 천연두와 같은 몇몇 세균들을 박멸했는데,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그 세균들에게는 나쁜일이죠!
-- 이 모두가 꿈이고 신이 하는 놀이다 --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께서는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말한 여러 사람의 말을 인용하셨는데요. 여기에 선생님 자신의 경험은 얼마나 들어있습니까?
라메쉬: 100퍼센트죠! 사실 이것은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확신의 문제입니다. 가장 깊디 깊은 확신이죠.
질문자: 경험이나 지적 수준에서의 확신인가요?
라메쉬: 아니죠. 지적 수준보다 아주 훨씬 더 깊은 확신입니다. 경험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쓰기가 주저됩니다. 이 확신은 내가 살아 있다는 확신, 내가 여기 지금 존재한다는 확신만큼이나 확실한 확신입니다. 내가 살아있는지 내가 여기 존재하는지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이런 확신을 경험으로 불러도 전 상관 없지만, 무엇을 경험한다는 말입니까? 솔직히 저는 경험이란 말은 쓰지 않을 겁니다. 그냥 존재하는 겁니다. 존재한다는 것에는, 이런 비개별적 존재감에는 "나"는 필요 없어요. 그리고 "내"가 필요 없으면 경험도 필요 없지요. 아시겠습니까?
질문자: 궁극적 진리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이런 허구의 세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인가요?
라메쉬: 보시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상세계는 단지 참의식 안에서 나타난 세상일 뿐이고 우리가 잠잘 때 꾸는 꿈과 다를 바 없어요. 신기루는 "일어났"지만 실제로 일어난 것은 아니죠!
질문자: 그럼 이 세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요?
라메쉬: 일어나는 것은 이 깨어 있는 꿈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꿈꿀 때는 꿈속에 있는 모든 것이 사실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이 삶은 아주 사실처럼 보이죠. 하지만 일단 꿈에서 깨어나면 꿈속에서 죽어가던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신경조차 안 쓰죠!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개인의 꿈에서 이 살아있는 꿈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질문자: 선생님은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지만 이 살아있는 꿈은 마치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엄격하게 이 궁극적 진리과 함께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라메쉬: 궁극적 진리 그 자체죠!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환상인데, 당신이 "환상"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환상"이라는 단어를 "일어났다"라는 말과 같이 써도 좋고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환상이 사실이 되지 못하는 한,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죠. 깨달음, 즉 이해가 있을 때는 현상세계가 참의식 안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세상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꿈속의 인물로서 자신이 얼마나 살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기로 되어있든지, 어떤 역할을 하기로 되어있든지 모두가 다 이 꿈의 일부일 뿐이죠.
질문자: 우주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현재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감지력을 가진 존재는 우주가 생긴 이래 수십억년이 지난 후에야 나타났어요. 그러면 '나는'이라는 존재감이 우주의 시작과 동시에 일어났나요? 아니면 감지력을 가진 첫 번째 존재가 나타나면서 일어났나요?
라메쉬: 여러분은 꿈속에서 오래된 강과 산을 봅니다. 신생아도 보고 노인도 보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볼 거예요. 하지만 이 모두가 당신이 꿈을 꾸기 시작하는 그 순간 탄생합니다. 꿈속의 다양한 연령을 가진 모든 사물은 당신이 꿈 꾸기 시작하는 순간 나타나죠. 하지만 꿈 속에서는 각자 다른 나이를 가지죠
질문자: 그럼 이 깨어있는 꿈은 어디서 시작됐나요?
라메쉬: 이 꿈은 참의식 안에서 시작됐어요. 이 때문에 거의 모든 종교에 삶이 꿈이라는 기본 개념이 있어요.
질문자: 우주의 연대기를 보면 어떻습니까? 언제 이 꿈이 시작됐나요?
라메쉬: 당신이 꾸는 꿈속의 연대기와 같습니다.
질문자: 그렇다면 깨달음이 한 개인에게 일어날 때... 말이 모순되는 것을 용서하세요.
라메쉬: 그럼요. 이해하지요. 여러분은 자신이 쓰는 말로 질문할 수 밖에 없지요.
질문자: 깨달음이 일어나면 이 꿈이 꿈속에서 그 깨달은 특정 부분에서만 멈추는 건가요?
라메쉬: 이 꿈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깨달음이 일어난 후에 알게 되는 것은 이 몸-마음 구조체가 꿈속의 한 인물이고 생을 다하는 동안 꿈속의 한 인물로 계속 살아갈 것이라는 점이예요. 그리고 이 꿈 속의 인물에 신경쓰지 않아요.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개인적으로 신경쓰지 않아요.
질문자: 모든 사람에게서 이 꿈이 멈추는 시점이 있나요?
라메쉬: 완전한 소멸이 있을 때 모든 이에게서 꿈이 멈춥니다.
질문자: 멈추는 시점이 있다면 꿈이 시작한 시점이 있어야만하죠.
라메쉬: 그렇죠! 그것이 이 꿈속의 인물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죠!
질문자: 그것이 언제인가요? (웃음)
라메쉬: 시간이라는 요소는 오직 현상세계 안에서만 존재해요.
질문자: 이 꿈의 일부이군요.
라메쉬: 맞아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 꿈의 일부예요.
질문자: 그럼 꿈의 본성은 깨어남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군요.
라메쉬: 옳은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둥근 원과 같습니다. 원은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모르죠.
질문자: 어떤 동양의 가르침에서는 환생과 카르마, 윤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제가 선생님 말씀을 잘 이해 했다면 이 모두가 다 꿈이고 환상일 뿐이군요.
라메쉬: 원인과 결과는 계속되는데, 이것을 탈고하지 않은, 끊나지 않은, 끝임없이 계속되는 소설이나 텔레비젼 연속극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원인과 결과가 끊이없이 이어지면서 시간은 흘러가는데 이것은 마치 신이 쓰는 끝나지 않은 소설처럼 계속됩니다.
질문자: 하지만 그건 환상이지 않나요?
라메쉬: 소설이 소설가가 창조하는 환상이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이 소설을 신의 소설이라고 부르면 되겠지요.
질문자: 그럼 "나"에게 이 모두는 꿈일 뿐이군요.
라메쉬: 맞아요. 그리고 이 모두를 정말 진실로 꿈으로 받아들이면 이렇게 꿈으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의문이 없겠죠. 이 몸-마음 유기체는 꿈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것이고 자신은 꿈 속의 인물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일단 자신을 꿈속의 인물이라고 받아들이면 개인이 어디있겠습니까? 개별 행위자가 있기나 하겠어요?
질문자: 제 생각에 여기서 우리가 맞닥드리게 되는 문제는 이 세상을 꿈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라메쉬: 그렇지요!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릴라(힌두교에서는 세상을 릴라, 즉 신이 하는 놀이라고 부른다. - 옮긴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라메쉬: "왜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이 릴라입니다. "창조하지 않을 이유는 뭔가?"라고 답하거나 "그냥 신이 놀이일 뿐이지."라고 답할 수도 있겠죠. 이 모두가 그냥 숨바꼭질 놀이일 뿐이죠.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서 하는 놀이, 모두가 자신이 주체라고 여기면서 인간 관계를 만들고 이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놀이일 뿐입니다. 릴라는 기본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놀이를 뜻합니다. 그래도 "왜?"라고 묻는다면, 그때는 정말로 답이 없죠. 우리는 이런 놀이를 바닷가에서 모래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어요. 아이들은 많은 시간을 들이고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모래성을 만들었다가 해 질 녘에 엄마가 집에 갈 시간이라고 말하면 모래성을 그냥 뭉개버리고 가버리죠! 아이에게 "왜 모래성을 만들었다가 뭉개버렸니?"라고 한 번 물어보세요. 아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해요! 그래도 계속 물어보면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는데요. 모래성을 만들고 싶었다구요. 그리고 뭉개고 싶어서 뭉갰어요."라고 말하겠죠.
질문자: 깨달음은 어찌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왜 그렇게 이례적으로 드물게 일어납니까?
라메쉬: 보시면, 깨달음은 본연의 상태예요. 개인과 동일시하는 정체성은 깨달음이라는 본연의 상태를 바탕으로 일어났어요. 정체성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이 꿈속에 어떤 삶이나 생활도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 전통적으로 릴라라고 부르는 이 꿈이 일어나도록 참의식이 자신을 각 개인과 동일시한 것이지요. 모든 개인은 잉태되면서 창조될 때 특정 성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특정 행동만이 그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날 수가 있어요. 이것이 카르마죠. 일어나는 행동이 좋거나 나쁘거나, 평범한지 아닌지는 사회가 결정하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전에 일어난 행동의 결과로 일어나야할 행동이 있는데, 이 행동을 실행하기 위해 새로운 유기체가 창조된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죽은 한 영혼을 계속 유지하려고 새로운 유기체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며, 예전에 한 행동에 대해 벌을 주거나 상을 주기 위해서 유기체가 창조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의 과거 행동이란 말입니까?! 모든 행동은 다 비개별적 과정이예요. 비개별적 연극이 계속되는 거죠. 이것은 마치 소설가가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하면서 소설을 써나가는 것과 같아요. 소설 속의 인물들은 행동하고 이 행동은 새로운 결과를 낳습니다. 소설가는 이 결과 때문에 일어나야할 새로운 행동을 만들어내야하고 이 행동을 실행할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야하겠지요. 세상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이 신성한 소설가에 관해서 한가지 이야기해줄 것이 있군요. 예전에 누가 쇼펜하우어가 쓴 소설가의 은유라는 글을 오려서 제게 보내주었어요. 그래서 어떤 비유나 은유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지요. 쇼펜하우어가 뭐라고 썼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인생의 황혼기에 지난날을 뒤돌아 보면, 뜻밖의 만남이나 당시에는 우연처럼 보였던 사건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인생의 결정적인 흐름을 만들어서 가지고 있던 잠재성이 성숙해지고 활짝 피어나게됐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 주목해 보면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 마치 아주 잘 짜인 소설 같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되고 대체 누가 이렇게 놀라운 줄거리를 생각해냈는지 궁금해집니다. 사실 세계 역사의 전체적인 맥락도 알고보면 시간을 따라서 운명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사람과 사람들 사이뿐만 아니라 자연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과 우연들이 함께 엮여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이어지는 거대한 그물과 같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생각이 일으키는 행동이외에 일어나는 행동이 있을 수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행동은 누구의 행동입니까? 행동을 일으키는 생각은 어디서 올까요? 왜 그런 특정한 생각이 들어올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 그 생각은 특정한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특정한 행동을 일으키게 되어 있고 이 몸-마음 유기체는 이런 종류의 행동이 일어나야만 하도록 잉태되며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이미 프로그램되어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누가 무엇에 죄가 있겠어요?
질문자: 왜 이 의문이 저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네요. 그 신이라는 소설가에 관해서 말씀하시는데요.
라메쉬: 예. 그리고 소설가가 창조하는 새로운 인물들에 대해서도 말했죠. 그래요.
질문자: 소설에 어떤 방향이나 소설을 쓰는 목적이 있나요?
라메쉬: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없습니다.
질문자: 아니, 제 말은 그 신성한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이예요.
라메쉬: 그 소설가의 입장에서 보는 주된 목적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릴라가 되겠죠. 릴라는 단지 참의식, 즉 신이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다는 뜻이죠. 릴라는 그저 계속 될 뿐입니다.
질문자: 원인과 결과라고 말하기 보다 그냥 불명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나요?
라메쉬: 예. 개인이 볼 때는 불명확해 보이겠죠.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왜 그런지 모르기 때문에 불명확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질문자: 마치 신성에 관해서 무지하다는 뜻인가요? 제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알 수 없다는...
라메쉬: 우리는 모르죠! 한 과학자가 한 말이 있는데 저는 이말이 무척 좋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어디서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웃음) 과학자가요! 완벽해요. 바로 이거죠. 우리는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 과학자가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이 틀림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모르고 알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죠.
질문자: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것을 받아들입니까? 받아들일려면 무엇을 받아들일지 알아야지 되는 것 같은데요.
라메쉬: 그건 마음이 하는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마음이 늘 겪는 어려움이예요. 사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마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라메쉬가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깨달음이 어떤 상태인지 내가 어떻게 알지? 라메쉬는 깨달음의 상태는 설명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럼 내가 그 깨달음의 상태를 좋아할지 어떻게 알아?" 아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찾음이 시작되면 비록 무엇을 찾는지 몰라도 찾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찾음은 개인으로 시작해서 개인이 완전히 소멸되면서 끝이 납니다.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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