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24. 21:32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현상세계의 놀라운 다양성 --
질문자: 저기, 재봉하는 일을 하면서 늘 "정말로 누가 이 옷을 재봉하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계속 물었다던 한 재봉사의 이야기가 계속 떠오르네요. 재봉사는 별안간 마음이 활짝 열렸는지 매우 행복하고 자유롭게 느꼈어요. 재봉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한 불교 선승(禪僧)을 찾아가서 물어보았어요. 선승은 "당신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보았고 '자신'이 재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해주었어요.
라메쉬: 나중에 재봉사는 또 다시 얽매이면서 "누가 진정한 본성을 보았지? 누가 진짜지?"라고 묻겠죠.
질문자: 그럼 어떤 면에서는 재봉사에게 깨달음이 있었군요?
라메쉬: 물론 있었어요.
질문자: 자신이 진정한 행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군요.
라메쉬: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 깨달음이 "나"에게 있어났죠! 진정한 깨달음이 일어나면 재봉사는 선승이나 어떤 다른 스승도 찾아갈 필요를 못 느껴요.
질문자: 만일 그 깨달음이 충분히 깊고 진짜라면요?
라메쉬: 그렇죠.
질문자: 어떤 사람에게 이해가 생기면서 자각하고 정신을 차릴 때는 자신이 바라보는 물체들만큼이나 자기 자신의 몸-마음에 집착이 없어진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보이는 모든 것이 참의식으로 보이나요?
라메쉬: 그럼요. 그게 바로 그 이해죠. 그렇죠.
질문자: 이 몸-마음은 여기 있고 저 몸-마음은 저기 있는데도 그렇게 인식하나요?
라메쉬: 그럼요. 하지만 모든 몸-마음 유기체가, 모든 물체가 하나의 물체로 보이는 것이 아니예요.
질문자: 그들 모두가 참의식으로 보이잖아요?
라메쉬: 모든 것이 엄청 다양하게 보이는데, 참의식이 이렇게 엄청난 다양성을 제공하지만 같다는 사실을 보며, 참의식이 수십 억 인간들 안에 있으나 이 존재들이 제각각 너무도 다양하고 독립적이어서 어떤 인간도 서로 같지 않고 지문도 다르고 맥박수도 다르고 음성 주파수까지도 다 다르다는 이런 사실을 경이로운 느낌으로 바라보지요. 그래서 이런 다양성 가운데에서도 내재하는 참하나됨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요.
-- 나타난 다양함 속에 있는 독자성 --
질문자: "독자성"이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 좀 더 명확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생명의 원천이라는 프라나도요. 선생님은 프라나를 호흡이라고만 언급하셨는데, 그게 다 인가요?
라메쉬: 그럼요. 프라나는 호흡이죠.
질문자: 그러면 독자성은 무엇인가요?
라메쉬: 독자성은 이원성도 아니고 불이원성도 아닌 것을 가리키려고 제가 쓰는 단어예요. 이원성과 불이원성은 상반된 것이 서로 연결된 모양새죠. 독자성도 여전히 하나의 단어로써 개념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독자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까닭은 독자성은 서로 상반되면서 관련이 있는 이원성과 불이원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예요.
질문자: 독자성에 관해서 좀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니사르가다타께서도 그 단어를 쓰셨나요?
라메쉬: 아니죠. 독자성은 영어라서 니사르가다타께서는 모르셨죠. 하지만 니사르가다타께서 뜻하신 바는 실로 독자성이예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위무위(Wei Wu Wei, 爲無爲)라는 분이 쓰시던 말이 독자성입니다. 본체나 현상같은 단어는 위무위의 말이 아니고 훨씬 전부터 쓰이던 말입니다. 제 생각에, 독자성은 위무위가 만들어낸 단어 같군요. 저는 이 단어가 마음에 들어서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고 있어요.
질문자: 왜 통일성이 아니라 독자성이죠?
라메쉬: 통일성은 이원성을 전제로 하는 말이예요. 독자성도 개념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절대 둘이 될 수 없다는 느낌을 주지요.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참의식이예요. 관념적으로라도 보자면, 참독자성 또는 참의식은 자신을 각각의 개별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이원성을 불러일으키고 이 때문에 관찰자와 관찰 대상으로 진행되는 릴라라는 과정이 계속될 수가 있는 것이죠.
-- 나타난 세상의 상호 연결성 --
질문자: 선(禪)에 "물을 나를 때는, 물을 날라라."라는 말이 있어요.
라메쉬: 그렇죠! 한 선 스승이 "깨닫기를 원하면 가서 그릇을 씻어라."라고 한 말과 같죠. 이 말은 그릇을 씻을 때 마음은 여지저기 돌아다니도록 놔두면서 손으로만 그릇을 씻지 말라는 뜻입니다.
질문자: 화난 마음을 가지고 그릇을 씻기도 하죠.
라메쉬: 그렇게 하면 그릇을 씻는 게 아니죠. 전쟁과 혁명, 굶주림, 범죄와 온갖 종류의 잔혹한 일이 일어나도 현자, 즉 현명한 사람은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향한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일하고 살아가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요. 현자는 원죄라는 관념에 개의치 않고 삼사라의 존재를 재앙처럼 느끼지도 않아요. 현자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도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자연 전체의 체계, 즉 참전체성의 작용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와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그냥 마비될 겁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믿음과 신뢰는 한 쪽에 내가 있고 다른 한 쪽에 신뢰하는 자연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와 자연이 하나이며 함께 가는 과정이고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예요. 수 체계에서 전체를 뒤엎지 않고서 숫자 하나를 빼버릴 수 없는 이치와 같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세상은 유기적이고 서로 연결된 하나의 과정이지 기계가 아닙니다. 세상은 최고 지휘관이 명령하는 정치나 군사제도와는 전혀 달라요. 세상이란 무수히 많은 보석들이 서로 엮여있는 그물망인데, 보석 하나하나는 다른 모든 보석을 반영해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설명할 수 있어요. 각각의 보석은 하나의 사물-사건이고 하나의 사물-사건과 다른 모든 사물-사건들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세상 속 모든 것은 서로서로 섞여 있고 상호 의존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국 도가(道家) 스승이 "풀 한 잎을 뽑아 들며 세상을 흔든다."라고 말한 것이죠. 세상을 유기적으로 보는 기본 원칙은 우주가 모든 구성원 각자 안에 내포되어 있고 구성원 하나 하나가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이해란 온 세상을 다 비추는 투광 조명이고 뒤얽힌 형태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을 다 비추어 보여줍니다. 반면에, 환상에 불과한 개별 개체의 분리된 마음이 가진 것은 집중 조명인데, 한 번에 오직 하나의 형태씩만, 한 구간씩만 비추어 볼 수가 있어서 세상이 충돌로 가득 차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에서 한 종(種)에게는 정상적인 현상이 공포감으로 비치는 까닭은 제한된 집중조명의 시야 때문이죠. 완벽한 이해인 투광 조명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줍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은 단지 모이고 흩어지는 일인데 세상 안에서 현상적인 물체가 나타나고 뒤따라서 사라지는 일일뿐입니다. 통각(統覺), 즉 진정한 이해에는 이해와 행동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이해도 포함됩니다.
-- 시간과 공간 --
질문자: 선생님과 저 사이에 있는 이 물리적 공간에 참의식이 있습니까?
라메쉬: 있는 모두가 참의식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공간에 투영된 물체에 불과해요. 있는 모두가 참의식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단지 개념일 뿐이고 물체들이 확장되기 위해서 필요한 구조일 뿐이예요. 물체가 3차원으로 확장되기 위해서 공간이 필요하죠. 그리고 물체가 관찰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체가 관찰되지 않으면 물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현상세계가 일어나서 관찰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과 구조에 불과하지요. 최근 몇 년간 과학이 꽤 딱 들어맞는 것을 보면 놀라와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프레드 호일 경(Sir Fred Hoyle)은 이렇게 말했어요. "만일 미래로 가는 과거가 있다거나 과거로 가는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런 흐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있어요, 바로 지금!" 이 말과 아주 비슷한 예가 하나 있는데 들려드리고 싶군요. 1 킬로미터 길이에 10층 높이의 그림이 있다고 하면 전체 그림은 거기에 이미 있지만 그림을 처음 부터 끝까지 다 보려면 어느정도 시간이 걸리지요. 우리는 그림 전체를 한 번에 볼 수가 없는데, 우리 인간의 마음이 그럴 능력이 안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시간에 기초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림 전체는 이미 거기 있지요.
질문자: 그리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그림 전체를 보지 않고 그저 작은 부분만을 보고 있군요.
라메쉬: 각 부분, 부분씩 봅니다. 그래서 그림 끝에 다달았을 때는 시간이 흘렀겠죠. 시간이라는 개념이 흐른 것이죠.
질문자: 그러면 우리는 사실상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군요?
라메쉬: 맞아요. 우리는 갇혀있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능에 의해서!
-- 완전히 상반되는 것들 --
질문자: 나타난다는 것은 잠든 참의식의 상태와 상반된 것인가요?
라메쉬: 아닙니다. 완전히 상반된 것을 말하자면 잠자는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지요. 그리고...
질문자: 사물과 사물이 아닌것이 아니고요?
라메쉬: 그리고 깨어있는 상태와 잠자는 상태, 이 둘 다의 이전 상태는 공(空)입니다.
질문자: 좋습니다. 하지만 공(空)에서 사물이 나옵니다. 그럼 공(空)과 사물이 정반대의 것이 아닙니까?
라메쉬: 아니죠! 전혀 그렇지 않아요. 진정한 잠재적 에너지인 공(空)으로부터 잠재적 에너지가 자신을 활성화시키는데, 이렇게 자신을 활성화 시키는 즉시 바로 이중성이 존재하게 됩니다.
질문자: 그렇군요.
라메쉬: 사랑과 증오. 사랑과 증오를 초월하면 남는 것은 정말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무엇입니다. 이것을 참의식 또는 사랑, 박애라고 부르든, 아니면 당신이 원하는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상관없어요. 이 무엇은 사랑과 증오와 같은 상반된 것이 일어나기 전부터 있었어요.
질문자: 선생님께서 쓰시는 이원성과 이원론, 또는 상반된 것이라는 용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용어들 사이의 어감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라메쉬: 세상의 모든 것은 상반된 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고정된 것이 없고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어요. 세상은 언제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이들 상반된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실제로 우리는 상반된 것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갈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인간의 지능은 상반된 양극의 것들을 서로 비교하고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고 싶어 하지만 가능한 일이 아니죠. 상반된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양극입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존재할 수 없어요. 이렇게 늘 변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불행해지는 까닭은 안전을 보장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세상을 뜻하는데, 세상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요. 안전을 보장받기위해 찾아 헤메는 인간의 노력은 좌절로 끝날 수 밖에 없어요. 인간은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변해가는 것이 삶과 존재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초가 되는 불확정성은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훨씬 더 명확해집니다. 기초 소립자는 자기만의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때는 입자이고 어떤 때는 파동이죠. 그래서 현대 과학자들은 "파동입자"라는 새로운 단어를 내놓아야 했어요. 원자를 이루는 전자의 이중적 본성도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정의하기가 불가능해요. 전자의 속도를 알면 정확한 위치를 모르게되고 정확한 위치를 알면 속도를 알 수 없어요. 이런 전자의 불확정성은 늘 나타나요. 네커의 정육면체로 알려진 도형을 보면 이런 예측 불가능성을 손 쉽게 알 수 있지요. 네커의 정육면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갑자기 모습이 바뀝니다. 언제 모습이 바뀔지는 알 수가 없고 바뀐 모습은 결국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요. 아드바이타 출판사의 로고12를 보면 여러개의 정육면체로 이루어져 있어요. 처음에는 3개의 정육면체가 보이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5개의
정육면체로 변해요. 하나의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이런 뒤바뀜은 기반에 깔려있는 이중성을 명확하게 보여주지요. 인간의 인식 처리 능력으로는 이 정육면체의 두가지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없지요. 정말 이런식으로 여러분들은 삶의 과정을 바라봅니다. 인간은 비교하고 판단하고 선호하며 왜 그런지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늘 보고서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요. 그리고 "보고서도 이해가 안되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라고 물어요. 물리학자는 이것을 잘 못된 인식이라고 말합니다. 신비주의자와 물리학자 모두 "받아들여라. 그러면 알 것이다."라고 말하고 지능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정말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고 체험되는 것이예요. 우리가 살면서 어느정도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고 느껴는 까닭은 삶에 내재하는 양극성(兩極性)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노력해서 의지력을 강하게 만들수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한 없이 강한 질서가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요. 겉보기에는 자신이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 살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어요. 그 힘은 한 없이 강한 원칙인 보편적 참의식인데, 이 앞에 선 개별의식은 태양 앞의 촛불과 같아요. 이 이해를 통해서 보이는 형이상학적 측면들은 참으로 놀라울 다름입니다.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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