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8)

2020. 8. 14. 21:43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이원성(二元性), 음양의 원리 -- 

 

질문자: 잠든 참의식이란 그냥 활동하는 참의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따라오는 개념이 아닌가요? 

 

라메쉬: 맞아요. 

 

질문자: 생각이 멈추고 활동이 멈춘 것이라고 하는데, 왜 마치 어딘가로 간다는 전재를 깔고 개념을 만든거죠? 그냥 움직임이 없는 것이라고 하면 안되나요? 

 

라메쉬: 또 한번, 정확히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의문도 더는 남지 않아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의문이 남아있어서 질문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부차적 개념이 필요합니다. 이점을 막 이야기하려던 참이었어요. 이런 문제를 분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죠. 과학자들이 다루는 문제는 수렴되는 문제입니다. 수 백명의 과학자가 같은 실험을 하면 같은 결과가 나와야하죠. 그런데 참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경험과 관련되면 분산되는 문제가 됩니다. 다른 말로하자면, 본디 하나라서 나눌 수 없는 것을 지능이 나루려고 하면서 일으키는 문제가 분산되는 문제지요. 양극으로 나누면서 지능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어떤 상반된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어요. 아래 없이 위가 있을 수 없고, 추함없이 아름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능은 둘 중에서 하나만을 원하죠. 지능은 비교하고 선택하고 싶어하면서 분산되는 문제를 일으키는데, 분산되는 문제는 절대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분산되는 문제는 오로지 그 문제 자체를 이해할 때만 사라지게 되는데, 실제로 상반된 것이 전혀 아닌 것을 상반된 것으로 나누고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려는 지능 때문에 생기는 문제지 실제로는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문제는 사라집니다. 상반된 것은 둘로 나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육을 함에 있어, 한 편에서는 학생에게 규율이 있어야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규율이 좀 있으면 좋고 많으면 더 좋고 규율이 완벽하면 최고죠. 이때 학교는 감옥이 되겠지요. 다른 한 편에서는 "규율은 필요없어요. 학생에게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유가 있어야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약간의 자유가 좋은 것이라면 더 많은 자유는 더 좋고 완벽한 자유는 최고죠. 이때 학교는 난장판이 되지요. 그래서 이것 아니면 저것만, 두가지 상반된 것 중에서 하나만 고르고 싶어하기 때문에 분산되는 문제를 만듭니다. 두가지 상반된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할 수가 없어요. 이 사실을 이해하면, 상반된 양극성을 이해하면, 세상 전체가 둘중에서 하나만 선택할 수가 없는 이런 양극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문제는 해결될 필요가 없죠. 문제는 사라져 버립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수도사 두 명이 있었는데, 둘 다 담배피우는 것을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기도할 때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죠. 수도사들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각자 윗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한 수도사가 다른 수도사에게 수도원장이 담배펴도 된다고 말했는지 물었어요. 질문을 듣고 수도사가 대답했어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네. 자네 수도원장님은 뭐라고 말씀하던가?" 다른 수도사가 답했어요. "내 수도원장님께서는 기뻐하셨네. 괜찮다고 말씀하셨지. 자네는 뭐라고 수도원장님께 여쭈었나?" "'기도할 때 담배를 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지." "그러게 그게 문제군. 나는 이렇게 물었지. '담배 필때 기도할 수 있습니까?'" 같은 문제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어요. 전형적인 예가 하나 더 있는데, 한 인도 왕의 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왕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에서 잎들이 다 떨어지고 나무는 벌거숭이가 되었죠. 그래서 왕은 꿈해몽가를 불러서 꿈의 뜻을 물었더니, 꿈해몽가는 "전하, 끔찍한 꿈입니다. 꿈은 전하께서 모든 친척을 잃어 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꿈해몽가는 지하감옥으로 보내졌죠. 어느날 밤 왕은 같은 꿈을 꾸고 다른 꿈해몽가를 불렀습니다. 이번에 온 꿈해몽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하, 아주 훌륭한 꿈입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친척을 잃는 위기에서도 전하는 살아남을 것이옵니다!" 모두 다 관점의 문제죠! 삶은 양극성에 바탕을 두고 양극성은 변화 때문에 일어납니다. 세상 자체와 세상 속의 모든 것은 계속 움직이고 있어요. 이 움직임은 가로 방향의 움직임이 아니고 원형 또는 위 아래 방향의 움직임이예요. 변화는 일어나야만 해요. 이것을 이해 못하면 문제가 생기죠. 삶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문제가 분산되는 문제지요. 

 

질문자: 세상의 본성이 양극성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보다도 지능이 세상을 인식하면서 양극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요? 

 

라메쉬: 아니죠. 양극성은 세상이 작용하는 원리입니다. 양극성이 뜻하는 바는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서 상반된 것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변화는 상반된 것들이 서로 상호의존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일 뿐입니다.

 

 

 -- 이원성(二元性)과 이원론(二元論) -- 

 

질문자: 이원성이 이원론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라메쉬: 보시면, 이 현상세계는 이원성을 바탕으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원성을 완전히 상반된 것으로 이해하고 하나는 다른 하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따로 이해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참의식 자신이 이원성의 수준에서 이원론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자신을 각각의 객체와 동일시하면서 이런 주체-객체라는 관계를 만들어내기에 이 릴라가 계속되는 것이죠. 자신을 개인과 동일시하면서 개인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고 이 정체성을 당분간 지속시키는 것은 바로 참의식이지요. 그러다 인생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꽤 잘 살고 있던 어떤 몸마음 구조체가 "내가 정말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 충동으로 꼼짝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면서 이 사람은 찾는 이가 되고 험난한 탈정체성의 여정이 시작되죠! 탈정체성의 과정은 개인과 동일시하는 이런 이원론이 농담일뿐이라는, 거대한 우주적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 사실을 깨우치면서 이원론은 이원성의 수준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이원성의 수준도 견딜 수 없게 될 때, "나"와 "그대" 또한 사라집니다.

 

-- 그 순간의 경험 -- 

 

질문자: 여러 견해들을 짜맞추려하다보니 참 힘들군요. 먼저 나는 이 육체가 아니다는 견해부터. 

 

라메쉬: 이것이 말이 가진 한계지요. 말로하면 의도하지 않는 뜻도 포함됩니다. 고통을 예로 들어보면, 자신이 고통 그 자체로 있는 어떤 단계까지는 고통을 목격합니다. 목격은 고통의 경험으로 변하는데, 아직 당황하는 경험자는 없지요. 고통의 경험이 그냥 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경험 자체지요. 이렇게 경험하는 바로 그 순간에는, 그것이 엄청난 공포이든지 완전한 환희의 경험이든지 상관없이 그 순간에는 경험자가 없어요. 다음에 고통이 일어날 때 한번 시험해보세요. 모든 경험은 언제나 그 순간의 경험입니다.

 

질문자: 그리고 목격도 없어서 목격이 변하는... 

 

라메쉬: 참의식, 참이해, 참목격, 참경험 다 같은 것입니다. 경험이 현재 순간 있는 모든 것입니다. 경험'자'는 나중에 생각하는 마음이 "그것 참 공포스러운 경험이었어"라고 경험에 대해 말하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경험의 그 순간에는 순수한 공포만 있고 당신이 바로 그 공포 자체였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는 마음이 경험을 떠올리면서 마음 속에 그려보지요. 이 생각하는 마음이 공포의 기억을 간직하고 계속해서 마음 속에 그려봅니다. 이 때문에 두려움이 자라나지요. 두려움은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모든 두려움은 그저 마음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 그려보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험 그 자체는 언제나 현재 순간에 있습니다. 기억 속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시간의 흐름 속에 있어 수평적입니다. 

 

질문자: 만일 선생님께서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면 위험을 느끼시나요? 

 

라메쉬: 물론이지요. 일하는 마음이 그 위험을 감지할 겁니다. 일하는 마음은 위험을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아요. 

 

질문자: 위험에 대비 못할 수도 있군요. 

 

라메쉬: 물론 그렇죠. 계획하고 위험에 대비하는 일은 일하는 마음의 몫입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이지요. 바가바드기타(힌두교 3대 경전중의 하나로 비슈누 신의 화신인 스승 크리슈나와 바라타족 왕자인 아르주나 간의 대화를 담고있다 - 옮긴이)의 요점은 바로 신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전사로 태어났고 전사가 되기 위해 훈련 받았고 너는 싸워야만 한다." 싸움을 하게 만드는 것은 일하는 마음이죠. 일어날 일에 대해 근심하게 만드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당신의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세요. 

 

-- 행동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다 -- 

 

질문자: 선생님께서 어제 자기 일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는 사람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정확한 말씀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 그 사람은 참의식과 하나가 되고 '절대'와 하나가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라메쉬: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기본 요점은 일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을 때는 개념화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나"라고 하는 주체와 객체로 분리된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요. 

 

질문자: 그 말씀은 누가 자신의 마음을 어떤 정신적 또는 육체적 활동에 집중하고 있으면 늘 그 상태가 된다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그렇죠. 좋은 상태죠. 

 

질문자: 자연스러운 상태군요. 

 

라메쉬: 예, 그렇죠. 

 

질문자: 좋습니다. 그럼 조금 더 나아가서, 같은 상황을 잠에 깊히 빠져있는 사람에게 적용해 볼 수 있는데, 이 잠자는 상태도 자연스러운 상태인가요? 

 

라메쉬: 그렇죠. 

 

질문자: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 따위에 마음을 몰두해서 평생을 보내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데 완전히 몰두하는 사람은 어떻나요? 이런 것들도 바람직한 상태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라메쉬: 누구에게 바람직하다는 말입니까? 주의를 완전히 집중해서 행사하는 폭력도 그 순간 일어나는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주체 행동 의식은... 

 

질문자: 그럼 좋고 나쁘고는 말할 수가 없군요. 

 

라메쉬: 좋고 나쁘고는 오직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만 있어요. 당신이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찾는 이, "나"라는 관점에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겠지요. 폭력이 행사되는 그 순간에는 폭력이 원하는 좋은 상태인지에 관한 의문이 없어요. 하지만 저질러진 폭력과 폭력을 행사한 그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필연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전적으로 개입합니다. 

 

질문자: 그렇군요. 이 질문도 저 개인 입장에서 묻는 것 같군요. 제가 일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을 때는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런 상태가 바람직한 상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라메쉬: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죠.

 

질문자: 저는 할 일이 없으면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생각이나 하면서 보내는데, 이런 상태는 바람직하지 않군요. 

 

라메쉬: 그렇죠. 

 

질문자: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피하려고 자신을 활동에 계속 집중해야한다는 뜻인가요? 예를 들어 산만한 생각이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영화를 보러가거나 드라마를 시청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보시면, 이때는 이걸 할지 저걸 할지 선택하는 "내"가 있죠. "내"가 확실히 있습니다. 선택 자체에 "내"가 있어요. 하지만 어떤 일을 할 때 강렬하게 집중하게 되면, 이 상태에서는 "내"가 없어요. "내"가 무엇을 할지 선택할 때는 활동에 "내"가 없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 인상들의 집합체로서의 “나” --

 

질문자: "나"라는 것은 주관적 환상일 뿐이라고 하신 말씀을 어렴풋이는 알겠는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라메쉬: 우리가 "나"에 관해서 말할 때면 아주 꽉차 보이는 자신의 몸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몸을 제외하고 나면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자기가 자신에 대해 가지는 인상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인상들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나"에 대해서 자신이 가지는 인상이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인상보다 좀 더 좋든지 아니면 그 반대든지 할 겁니다. 어쨌든 간에 인상들의 집합체일 뿐이예요. "나"라는 것이 인상들의 집합체가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제가 한 말이 바로 이 뜻입니다. "나"는 그저 환상일 뿐이지요. 

 

질문자: 성경에 보면 "너희가 뿌린 대로 너희가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장 7절 - 옮긴이)라는 말씀이 개인에게 일어날 어떤 일처럼 들리지만 사실 "뿌려진 대로 거두어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게 더 맞지 않습니까? 

 

라메쉬: 그렇죠. 아니면, "너희"를 신으로 해석해도 되는데, '신이 뿌린 대로 신이 거두리라.'가 되겠죠. 작용과 반작용을 뜻하는 말입니다.

 

질문자: 원인과 결과가 있고 보상과 처벌이 있지만 개인은 이런 것들과 전혀 상관이 없군요. 

 

라메쉬: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원인과 결과는 있지만 보상과 처벌은 전혀 관계가 없어요. 보상과 처벌은 개별적인 행위자를 언급하는 말인데, 이 세상의 비개별적 작용에는 보상 받거나 처벌 받을 개별 행위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보상과 처벌에 대한 생각이 환생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오해입니다. 

 

-- 잉태되는 순간 새겨지는 것 -- 

 

질문자: 선생님께서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이 모두가 환상이고 모두 다 미리 정해져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디서 그런 관념을 얻으셨습니까? 

 

라메쉬: 잉태되는 순간이죠. 

 

질문자: 와, 정말 일찍부터군요! (웃음) 잉태되는 순간 들어왔다고 하는 그런 관념은 어디에 새겨져 있었나요? 마음 속인가요? 몸 속인가요? 

 

라메쉬: 있는 모두가 참의식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단지 참의식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일어났다가 폐기되지 않고 모인 생각들의 집합입니다. 마음은 단지 생각들의 집합이거나 "나"라는 자아상을 이루는 인상들의 집합일 뿐입니다. 이런 "나"라는 자아상은 다양한 생각과 인상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모든 생각과 인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직 선택된 생각과 인상들로만 이루어져있죠. 그래서 "나"라는 자아상은 정확하지가 않아요.

 

질문자: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지만 그 "나"라는 부정확한 자아상 주위에 모인 그런 생각과 인상들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라메쉬: 참의식에서 오는데 두뇌는 참의식에서 들어오는 생각에 반응할 뿐입니다. 

 

질문자: 두뇌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냥 들어온다는... 

 

라메쉬: 두뇌는 비활성 물질이예요. 두뇌는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없어요. 두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생각에 반응할 뿐이고 반응하고서는 얽매이지요. (NX 5↓)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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