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9. 20:03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나니 (至道無難)
오직 취사(取捨) 분별함을 떠나면 되는 것 (唯嫌揀擇)
단지 이것은 싫어하고 저것은 좋아하는 본별하지 않으면 (但莫憎愛)
확 트여 명백해지리 (洞然明白)
터럭 끝의 차이가 하늘과 땅의 격차를 불러오네.(毫厘有差 天地懸隔)
'아차'하면 마음 수행하면서 마음으로 간택(揀擇: 取捨分別)하는 행을 하기 쉽다.
대승의 심의(深義)와 심법(心法)은 마음을 어떻게 하라고 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단지 무주(無住), 무념(無念), 무득(無得,不可得), 무소유(無所有), 무상(無想),무생(無生), 무심(無心) 등 온통 부정(不定)의 말로 일체법이 그러함을 설할 뿐이다.
왜 그러한가.
단지 마음이 본래 이러한 것임을 깨달아 알아야
마음을 어떻게 하고자 함에서 떠나 진여에 합치되는 까닭이다.
단지 일체법이 이러함을 뚜렷히 알면 무명(無明)이 힘을 잃고 소멸된다.
그래서 대승경론에서는 일부의 방편법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수행법을 설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혹자는 대승경론에는 수행법이 없다고 하나,
이는 일승(一乘)의 최상승선법을 전혀 몰라서 하는 말이다.
무주, 무념,무득, 무소유,무상,무생,무심의 법구(法句)가 자심의 당념에서 그대로 (法爾) 입증되는 선법이
가장 뛰어나고 원만하며 궁극의 깨달음(妙覺)에로 이끌어 준다.
이 법을 어렵다고들 하나 실은 바로 이 자심에서 알면 되는 것이라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음에 생멸하는 상념을 없애라는 무념(無念),무상(無想)의 가르침이라면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떻게 상념을 없애겠는가.
설령 선정을 많이 닦아 수십 년 수백 년을 상념없이 지속한다 하더라도
선정의 힘이 떨어지면 곧 다시 일어나는 것이 마음의 상념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거울처럼 만상을 무심하게 비춘다.
상념도 마음이 비추는 것이다.
마음이 상념하되 실은 마음이 거울처럼 무심함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심(心)이 본래 무심(無心)함을 알 때 상념에서 해탈한다.
이러하니 상념을 억지로 없애려 하는 행보다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또 완전무결하다.
그래서 위의 <심신명>에서 " 지극한 도를 성취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단지 위의 부정(否定)의 법구(法句)들을 자심에서 여리(如理)하게 알아서 분별 떠나면 확 트여 명백해진다.
그런데 아차 하면 마음을 어떻게 지어서 수행하고, 마음을 어떠한 상태로 두고자하는 행을 하기가 쉽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러한 행이 되면 그 미세한 차이가 하늘과 땅의 격차를 가져온다.
달마선을 행하는 분은 이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또한 가르침(禪法)을 떠나 다른 법을 구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불법(佛法)의 근본이 유심(唯心)인 까닭이다.
그래서 <심신명>의 끝부분에 강조하여 설한다.
신심(信心; 유심임을 믿는 것)이 불이이고 (信心不二)
불이가 신심이나니 (不二信心)
언어도단이라 (言語道斷)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네. (非去來今)
신심이란 오직 마음일 뿐임을 믿는 것이다.
오직 일체가 현재의 당념 그 자리 마음일 뿐이니까 믿을 것은 사실 그것 밖에 없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당연한 믿음이다.
오직 마음일 뿐임을 믿는 까닭에 불이(不二)의 뜻이 된다.
마음 이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불이법이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능가경> 권제2집일체품에서 "이견(二見)에 떨어지는 것은 유심(唯心)임을 깨닫지 못해서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직 마음일 뿐임을 알아 불이가 된 자리에서 어떻게 언어분별이 될 수 있겠는가.
언어분별이란 두 가지 다른 상대(相對)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이이니 상태를 떠났는데 어떠한 분별이 나오겠는가.
단지 불이(不二)이되 불일(不一)이다.
왜냐하면 유심이라 하나 이 심(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만상(萬象) 그대로인지라 단지 일(一)이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언어도단이다.
마음은 본래 공적(空寂)한지라 허공과 같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떠났다.
분별함 속에서 시간의식을 갖는 것일 뿐이다.
한 번의 분별에 이미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나,
과거의 마음 그대로 과거가 아니고,
현재의 마음 그대로 현재가 아니며,
미래의 마음 그대로 미래가 아니다.
단지 항상 당념(當念)에서 과거,현재,미래를 떠나 함께 있을 뿐이다.
당념에 즉(卽) 하는지라 당념이 시간으로 분별되는 자리가 아니어서 현재라 할 바가 아니다.
당념에 즉(卽)하면, 즉 즉심(卽心)이 되면 당념은 분별처가 아니게 되어 현재라는 분별도 자리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심(唯心)임을 온전히 믿는 신심(信心)이 곧 즉심이다.
과거, 현재,미래의 시간 분별을 떠났으니 즉(卽)의 뜻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입능가경>의 도처에서 유심(唯心)을 간곡하게 강조한다.
-박건주 저<달마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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