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면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2019. 10. 26. 09:47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도를 닦는 법에서 문자에 의해 이해를 얻는 자는 기력이 약하다.

만약 사상(事相)에서 이해를 얻는 자는 기력이 굳세다.

사(事) 가운데서 법을 보는 자는 바로 곳곳에서 실념(失念)하지 않는다.

문자로부터 이해하는 자는 사(事)를 만나면 바로 눈이 어둡게 된다.

경론으로 사(事)를 말하면 법에서 멀어진다.

비록 입으로 사(事)를 말하고, 귀로 사(事)를 듣더라도 몸과 마음이 스스로 사(事)를 경험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사(事)에 즉(即)하고, 법(法)에 즉(卽)한 자의 깊고 깊음에 대해 세인은 측량할 수 없다.

도를 닦는 이는 자주 도적에게 재물을 약탈 당하더라도 애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자주 남에게 모욕과 구타,비방을 당하더라도 또한 괴로워하지 않는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도심(道心)이 점차 굳세어져 매년 증장되어 감이 그치지 않는다.

자연히 일체의 거슬림(違)과 좋음(順)에 모두 무심하다.

이 까닭에 사(事)에 즉하여 끌려 감이 없는 자는 가히 대력(大力) 보살이라 할 수 있다.

[해설]

"사(事: 현상의 세계)에 즉(卽)한다"​ 는 것은 마음이 아무런 영상(影像)이 없어야 가능하다. 마음이 느껴져도 거기에는 이미 마음의 영상이 있는 것이어서 사(事)에 즉하지 못하게 된다.

마음이 있으면 이미 거기에 염(念)이 있게 되고, 염(念)이 있으면 기력(氣力)이 소모된다.

문자와 언설에 의거하여 수도하면 그 마음과 염(念)이 있어 사(事) 그대로 진면목을 가린다.

사(事) 그대로의 진면목은 마음의 영상이 사라져 몸으로 증(證)해야 진실하게 체증(體證)한다.

그래서 진실한 증(證)은 몸으로 증하는 것이니 이를 신증(身證),체증(體證)이라고 한다.

일체의 사념(思念)을 떠나고 마음도 잊어야 신증하고, 신증하면 득력(得力)한다.

문자어언으로 머리를 굴리고 사념하면 그 사념이 다른 사념으로 이어지며 원기(元氣)를 소모시킨다.

그 문자어언이 불설(佛說)의 법상(法相)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신증(身證)의 자리는 사념과 언어분별, 마음의 상을 떠난 자리인 까닭에 언어문자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 일면을 여러 이(理)로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理)는 사(事)에 즉(卽)하게 하는 지침이 된다.

이를 이입(理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이(理)는 문자어언에 의한 교리(敎理)로서 개시(開示)된 것이기 때문에 그 이(理)의 뜻이 구현되려면 그 이(理)를 뚜렷이 통달한 후에는 그 이(理)에 머무르거나 향함도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깨달음이 굳건해져서 일상의 생활(事)에서 고뇌와 즐거움에 흔들리거나 물듦이 없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理)를 통찰하였다 하더라도 굳세지 못하고 힘이 약하여 습력(習力)에 휩쓸려 동(動)하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일체처에 무심(無心)해야 하고 무심한다는 마음도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마음을 잊음(忘心)이 달마선의 핵심이고 궁극이다.


[본문]

수도(修道)하는 마음을 장대(壯大)하고자 하건대 일정한 영역(틀) 밖(규역외)에 두라 !


묻는다.

"어떠한 것을 '일정한 영역 밖'이라 이름합니까?


답한다.

"대소승의 해(解)를 증(證)하지 아니하고, 보리심을 증(證)하지 아니하며, 내지 일체종지(一切宗旨)를 원하지 아니하고, 해(解)와 선정을 얻은 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탐착하는 이를 천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내지 불지혜(佛智慧)를 원하지 아니하면 그 마음이 자연히 한가로워 고요해진다.

만약 해(解)를 위하지도 아니하고, 지혜를 구하지도 아니하길 이렇게 하여 법사와 선사 등의 혹난(惑難)을 면하고자 하고, 마음에 항상 뜻을 세우되 범성(凡聖)을 (범부든 성인이든) 원하지 아니하며, 해탈을 구하지 아니하고, 또한 생사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또한 지옥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무심히 바로 임운(任運)한다면 (<天順本>은 '무심에 바로 머무른다면') 비로소 일정한 둔심(鈍心:不動心)이 이루어진다.

능히 모든 현인과 성인이 백천 겁에 걸쳐 신통변화 함을 보이더라도 이를 원하거나 즐겨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타인이 미치고 미혹하게 됨을 면하게 하고자 할 것이다. "


또 묻는다.

"어떻게 하여 일정한 영역(틀) 밖에 있을 수 있습니까?


답한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규범-을 '일정한 영역(領域)'이라 이름한다. (<天順本> : 대소승에 바탕한 정(情)도 또한 일정한 영역이다.) 생사 열반 또한 일정한 영역이다.

만약 일정한 영역 밖으로 나오고자 하고, 내지 범성(凡聖)의 이름도 없는 자리가 되고자 하건대 유(有)라는 법으로써 알 수 없고, 무(無)라는 법으로써 알 수 없으며, 유무의 법으로써 알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든 지해처(知解處)를 또한 일정한 영역 내(內)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범부심과 성문, 보살심을 내지 아니하고, 내지 불심(佛心)을 내지 아니하며, 모든 마음을 내지 아니하면 이를 일정한 영역을 벗어남이라 한다. 모든 마음이 일어남도 없고, 지해(知解)를 지음이 없으며, 미혹을 일으킴이 없어야 비로소 일체 세간을 벗어났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나의 호귀매한(胡鬼魅漢)의 귀어(鬼語)를 만나서는 바로 귀신의 지해(知解)를 짓고 이를 지남(指南)으로  삼는 것은 논할 바도 못된다. 대물(大物;불보살)의 용(用)을 지음(作)을 얻는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이 백천만억의 무리를 이끌고 있다고 하는 것을 듣고는 바로 마음이 흔들리고 자가(自家)의 심법(心法)이라고 즐겨 간(看)한다면 언설문자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해설]

본문의 주제어 '구역(區域)'은 '마음의 일부분인 어느 영역(틀)'을 뜻한다. 보통 지켜야 할 규범이 마음의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여기에 맞추려고 하게 된다. 무엇을 성취하여 증(證)하였다 함은 마음에 특정한 하나의 영역을 지은 것이 되고, 따라서 본래의 한량없는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은 본래 경계나 한정이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실이며 이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면 마음에 일부분을 획분하여 그 구역으로 삼는 것이고, 원융하고 한량없는 본심에 위배되는 것이 된다.

수도인은 보통 마음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거나 불심(佛心)이나 보살심같은 어떠한 이상향으로 향하거나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설령 불심이나 보살심을 증득하였다 하더라도 불심이나 보살심을 증득하였다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밖의 다른 마음도 이미 함께 전제되어 일어나 있다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 증득 또한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모두 법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마음에 아직 상이 있고 그 상을 지향하며 목표로 하는 까닭에 마음에 일정한 영역(틀)으로서 자리 잡는다. 그러나 텅 비어 고요한 마음에 어찌 일정한 영역이 따로 있을 것인가. 지향하는 일정한 영역이 있는데 어지 무심(無心)이 되겠는가.

무시(無始)의 본심(本心)에 어찌 무엇을 이루겠다 함이 있었겠는가 !

무시의 본심에 어찌 특별한 영역이 따로 있었겠는가 !

                                                      - 담림 편집,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