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노력

2019. 7. 6. 10:12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우리의 자기 노력(개인적 노력)에는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

1) 행위를 일으키는  노력과, 2) 행위를 소멸하는 노력이 그것이다.​

행위를 일으키는(산출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면, 그 행위의 모든 결과를 경험할 때까지는 깨달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발현업을 경험하는 동안에 더욱 더 많은 미래업이 산출되므로, 행위를 수단으로 해서는 깨달음을 얻을 희망이 없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행위의 열매들을 경험하면서 그것들이 조금씩 소진되기는 해도, 그것들은 씨앗형태의 원습으로 남아 있고, 이것은 결코 행위의 소멸을 가져오지 않고 행위를 낳는 (업을 짓는) 불쏘시개만 될 것이다.

그래서 행위를 낳는 형태의 자기노력을 통해서는 깨달음이나 해탈을 얻을 가능성이 없다.

행위를 소멸하는 자기 노력은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는 깨달음이나 해탈이 '진아를 자각하고 있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아와 그것에 대한 자각은 똑같은 하나이므로),

어떤 사람이 잠이나 꿈에서 깨어났다고 할 때.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잠이나 꿈을 자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자기자각(육체의식)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즉, 그는 꿈의 몸과 꿈속에서의 세계의식에서 그것들의 뿌리인 현재의 몸과 세계의식으로 돌아온 것이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의 깨어나게 한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 원인이 있다.

1) 꿈을 개시한 행위가 끝이 날 때, 그 꿈은 잠이나 생시로 끝난다.

2) 꿈을 꾸면서 경험하는 극도의 공포, 행복, 불행의 충격으로 인해 꿈꾸는 자의 주의가 알게 또는 모르게 그 자신 쪽으로 쏠릴 때, 그 꿈 속의 1인칭, 즉 그의 마음이나 주의는 심장으로- 그 꿈 속의 1인칭 쪽으로-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생시상태(생시의 삶)를 개시한 발현업이 소진되면 이 생시상태는 끝이 난다.

즉, 꿈이 잠으로 끝나듯이, 죽음의 상태에 이른다.

이와 같이 발현업이 끝나면 이 생시상태만 끝이 날 뿐 깨달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생시 상태에서 우리의 주의가 어떤 수단에 의해서든 자기 쪽으로 향해지면,

꿈과 같은 생시상태 뿐 아니라 잠의 상태와 같은 우리의 진아망각도 함께 끝이 나면서 우리는 본래적 상태(진아)에 있게 된다. 우리의 발현업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극도의 공포, 자비심, 불행 혹은 기쁨의 충격을 여기할 수도 있다.

(우리의 현자들이 영적인 데로 방향을 돌릴 수 있기 위해 그런 경우를 경험해야 했듯이) 그런 좋은 상황을 이용하여 개인인 자기 쪽으로 주의를 되돌리고, 이리하여 큰 깨달음을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바가반은 우리에게,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잠에서 막 깨어날 때는 우리의 주의가 어떻게 작용하는가?

먼저 우리는 몸을 자각하고, 이어서 감각기관을 통해 세계의 다른 모든 대상들을 인식한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2인칭 대상 아닌가?

생시상태 내내 우리의 주의는 2인칭과 3인칭 대상들에만 머무른다.

잠이 우리를 덮치면 이 주의는 작동을 저절로 멈춘다.

2인칭과 3인칭 대상들에 대한 이 머무름은 생각하는 작용일 뿐이다.

생시상태 전체는 생각들의 한 다발(즉,생각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똑같은 일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리고 (우주의) 창조에서부터 해체에 이르기까지 매일 되풀이 된다.

요컨대 잠에서 잠으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창조에서 해체로 이어지면서도,

어떤 존재도 1인칭(나,주체) 쪽으로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생시상태에서 1인칭 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면, 그 생시는 끝이 나고 우리는 깨달음의 상태 안에 남게 되어 있다. 자기 쪽으로의 이 방향 전환은 있음(Being)일 뿐, 함(Doing)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생각이나 행위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자기노력만이 업을 소멸하는 노력이라고 부른다.

이것만이 우리는 해탈에 이르게 할 것이다.

다른 모든 주의의 노력들은 2인칭과 3인칭 대상들 쪽으로만 향해 있으므로, 그것은 업만 지을 뿐 해탈을 안겨주지 않을 것이다. 진실이 그러하다 !

하지만 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진지(Jnana), 곧 깨달음조차 발현업의 결과라고 곧잘 이야기한다.

그것은 틀렸다. 진지는 업의 결과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한다.

앞서 말한 두 번째 종류의 자기노력이 애씀없이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을 본연적 상태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애씀 없는 노력의 상태, 즉 역동적 고요함이다.  

                                                                  - 스리 사두 옴<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