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7. 09:35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머리말]
바가반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님이 성산 아루나찰라 위의 비루팍샤 산굴에 사시던 1901 - 1902년에, 스리 M. 시비쁘라까샴 삘라이라는 헌신자가 당신에게 끌렸고, 몇 가지 질문을 가지고 당신을 찾아갔다.
당시 말수가 적었던 스리 바가반은 어떤 맹세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질문 대부분에 대해 모래 위나 석판 위 혹은 종이쪽지에 글을 써서 답변했다.
스리 시비쁘라까샴 삘라이가 이렇게 받은 가르침은 1923년에 문답형식의 <난 야르(Nan Yar)>'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얼마 후 스리 바가반 자신이 이 질문과 답변을 재배열하여 하나의 에세이 형태로 다시 씀으로써, < 난 야르?>를 하나로 연결된 일관성 있는 글로 만들었다.
28개의 질문이 들어 있는 문답형 판본- 오늘날 별도의 소책자로 출간된다-외에도 <스리 라마나 비자염(스리 바가반의 타밀어판 전기)>에는 14가지 질문만 들어 있는 다른 판본이 있고, 그 영역본은 <진아 깨달음>에 나온다.
그러나 <스리 라마나 누뜨리라뚜(타밀어판 스리 라마나 저작전집)>에 수록된 것은 에세이 한본뿐이다.
이 판본은 스리 바가반 자신이 정리한 것이므로, 이것을 주된, 진정한 그리고 권위있는 판본으로 보아야 한다.
에세이 판본은 대체로 28개 문답을 수록한 판본에 기초한 것이지만, 스리 바가반은 그것을 정리하면서 어떤 부분은 새로 써서 추가하고(예컨대 첫째문단 전체), 어떤 부분은 생략했으며(예컨대 질문 4와 5에 대한 답변들, 질문 6에 대한 답변의 첫째문장, 질문 20에 대한 답변 빌부 등), 어떤 부분은 수정하고, 확장하고, 향상 시켰다. (예컨대 질문 27에 대한 답변), 그러나 대부분의 문장들은 당신이 전혀 바꾸지 않고 단지 그 관념들을 재배열하여 더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순서로 연결했다.
스리 시바쁘라까샴 삘라이가 드린 첫번째 질문은 "난 야르?"(나는 누구입니까?) 였고, 이에 대해 스리 바가반은 "아리베 난(Arive nan)"이라고 답했다. 이것은 '앎이야말로 나다', '앎 그 자체가 나다' 혹은 '앎이 실로 나다'라는 뜻인데, 타밀어 단어 '아리브(arive)'는 산스크리트 단어 '냐나(jnana)나 영어 단어의 '앎(knowledge)에 대략 상응한다.
시바쁘라까샴 삘라이는 이어서 "(이) 앎의 성품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고, 스리 바가반은 "앎의 성품은 존재-의식-지복(Arivin swarupam sat-chit-anandam) "라고 답했다. 이 답변을 제외하고 두 번째 문단의 나머지 전체는 실제로 스리 바가반이 하신 답변이 아니었다. 따라서 스리 시바쁘라까샴 삘라이의 제자인 스리 마니깜 삘라이가 이 저작의 원고를 처음 당신께 갖다드렸을 때, 당신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이 부분은 내가 한 답변이 아닌데 왜 여기 들어 잇지요?" "시바쁘라까샴 삘라이님이 바가반의 답변들을 자신의 공책에 옮겨 적을 때, 이것이 첫번째 답변을 자신이 더 분명하게 이해한은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덧붙인 것입니다." 마니깜 삘라이가 설명했다.
"아, 예, 그는 이미 경전 가르침인 '내띠,네띠'에 침숙하고,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군요" 스리 바가반이 말했다.
나중에 스리 바가반은 에세이 판본을 정리할 때 이 추가된 부분을 빼지 않고, 단순히 당신 자신의 답변들만 굵은 글씨로 표시해 두었다.
스리 바가반의 모든 산문체 저작들 중에서도 <난 야르>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보적 위치를 점한다. 실로 그것은 스리 바가반의 가르침의 초석 자체라고 간주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스무 개의 간략한 문답 속에 당신의 모든 기본적 가르침이 명료하고 희석되지 않은 방식으로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리 시비쁘라까샴 삘라이에게 우리가 큰 빗을 지고 있는 이 저작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여기 하나의 영어번역본을 제시한다.
이 번역을 준비하면서 그것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리고 타밀어 원문에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럴 경우 때로는 영어의 우아한 문체를 살릴 수 없다 해도 말이다. 본문을 문단과 문장들로 나누었고, 문장 순서를 원문과 정확히 대응시켰으며, 가능한 한 각 문장의 구조를 원문의 그것과 같은 형태로 했다. 원문에서 굵은 글씨로 인쇄된 모든 부분 또한 이 번역에서 굵은 글씨로 되어 있으며, 타밀어본에서 긁은 글씨가 아닌 다른 핵심 문장들은 여기서는 이탤릭체로 인쇄되어 있다. 이 한국어판에서는 위에 방점이 찍혀 있지만, 컴퓨터로 옮기는 과정에 밑줄로 표시했음-(무한진인).
원문 전체에서는 단어 하나만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데, 그것은 네 번째 문단의 '진아가 나타날' 뒤에 나오는 '빛날'이다. 이 번역에서 괄호 안에 든 다른 모든 말들은 원문에서 사용된 정확한 타밀어 또는 산스크리트어 단어를 보여주기 위해서나, 그 문장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혹은 문자저으로 번역하면 완전한 또는 분명하게 이해되는 영어 문장이 되지 못할 때 어떤 문장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하여 넣은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번역에는 각주들도 덧붙였는데, 그 어느 것도 원문에는 없는 것이다. 번역하면서 이 저작에 대한 기존의 모든 번역들을 면밀이 대조하여, 그 번역들의 좋은 점들(예컨대 적절한 단어ㅡ 문장 구성 등)은 이 번역에서 하나도 빠트리지 않게 하였다.
-스리 사두 옴 <스리 라마나의 길>-
<역주 : 이 한국어 판의 우리말 번역은 영어 번역문을 옮기되 타밀어판에 더 가깝도록 어순을 바꾸는 등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한국어 번역자 대성스님>
[본문]
모든 개아들(jivas)은 어떤 불행도 없이 늘 행복하기를 바라고, 각자에게는 그들 자신에 대한 지고의 사랑(parama priyam)이 존재하며, 행복이야말로 그 사랑의 이유이므로, 바로 우리의 성품인 그리고 마음이 없는 깊은 잠 속에서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그 행복을 얻으려면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지(知)의 탐구(jnana vichara)야말로 주된 수단(mukhya sadhana)이다.
나는 누구인가?
일곱 가지 구성 요소(유미(乳糜) 피,살,지방,골수,뼈,정액)로 된 거친 몸은 '나'가 아니다.
소리,감촉, 형상, 맛과 냄새의 다섯가지 감각지식을 아는 귀,피부,혀와 코의 다섯 가지 지식기관은 '나'가 아니다.
말하고, 걷고,주고,배설하고, 즐기는 입,다리,손,항문,생식기의 다섯 가지 행위 기관은 '나'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생명 기능을 수행하는 쁘라나(prana)를 위시한 다섯 가지 생명 기운은 '나'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나'가 아니다.
모든 감각지식과 모든 행위가 없을 때 감각지식을 향한 습(대상 습)만 남아 있는 (깊은 잠의) 무지도 '나'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을 " '나'가 아니다, '나'가 아니다"라고 부정해 버렸을 때, 홀로 남아 있는 앎 자체가 '나'이다.
이 앎의 성품은 존재-의식-지복(sat-chit-anandam)이다.
모든 앎(모든 대상적인 앎)과 모든 행위의 원인인 마음이 가라앉으면 세계에 대한 지각도 그칠 것이다.
덧쒸움(상상한 것)인 뱀에 대한 앎이 사라지지 않으면 바탕인 밧줄에 대한 앎이 얻어지지 않듯이, 덧씌움인 세계에 대한 지각이 그치지 않으면 바탕인 진아에 대한 깨달음도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진아성품 안에 존재하는 놀라운 힘이다.
그것이 모든 생각을 투사한다.
생각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서 보면 따로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으며,
따라서 생각이야말로 마음의 성품(또는 형상)이다.
생각들 외에는 세계라고 할 다른 것이 없다.
잠 속에서는 생각이 없고, (따라서) 세계도 없다.
생시와 꿈 속에서는 생각이 있고, (따라서) 세계도 있다.
거미가 그 자신 안에서 실을 자아내었다가 다시 그 자신 속으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그 자신 안에서 밖으로 세계를 투사했다가 다시 그 자신 속으로 흡수한다.
마음이 진아 성품에서 밖으로 나오면 세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세계가 나타날 때는 성품이 나타나지 않고,
성품이 나타날(빛날) 때는 세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성품을 탐구해 들어가면 '자기(tan)'야말로 마음인 것으로 끝난다.
(여기서) '자기'라고 하는 것은 진아 성품이다.
마음은 늘 하나의 거친 사물을 좇아서, (즉, 늘 하나의 거친 이름과 형상, 곧 몸을 '나'와 동일시함으로써) 존립하며,
독자저으로는 존립하지 않는다.
마음이야말로 미세신이라고 하는 것이고, 개아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몸 안에서 '나'(나는 몸이다)로서 일어나는 그것이야말로 마음이다.
'나'라고 하는 생각이 몸 안에서 처음 일어나는 곳이 어디인지를 탐색해 보면 심장(hridayam) 안에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곳이야말로 마음의 근원 (문자적으로 탄생지)이다.
'나, 나'하고 계속 생각하기만 해도 그것이 (우리를) 그곳(우리의 참된 상태, 곧 진아)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서 '나'라는 생각('나는 몸이다'하는 느낌) 이 최초의 생각이다.
이것이 일어난 뒤에야 다른 모든 생각이 일어난다.
1인칭('나는 이몸이다' 혹은 '나는 아무개다'라는 느낌의 주체인 '나')이 나타난 뒤에야 2인칭과 3인칭(대상들, 곧 '너', '그', '그녀', '그것' , '이것'. '저것' 들) 이 나타나며, 1인칭 없이는 2인칭과 3인칭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에 의해서만 마음이 가라앉을 것이며,
'나는 누구인가?'하는 생각(이것은 주의를 진아 쪽으로 돌리는 수단에 불과하다)은 다른 모든 생각을 소멸한 뒤에 그 자체도 화장터의 부짓깽이 막대기처럼 소멸될 것이다.
민일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면 (자기주시를 놓치는 것을 말함),
그것을 완성하려 하지 말고 '그것들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를 탐구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무슨 대수인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한 생각이 나타나는 즉시 '이것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를 탐구하면 '나에게'라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누구인가?'하고 탐구하면 마음(주의력)은 그 근원(진아)으로 돌아갈 것이며, (이때는 그 생각에 주의를 기울일 자가 없으므로) 일어난 생각들도 가라앉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듭하여 수행하면 마음이 그 근원에 안주하는 힘이 증가할 것이다.
미세한 마음(주의력)이 두뇌와 (거친) 감각 기관의 문을 통해 나가면 거친 이름과 형상들(세간의 대상들)이 나타나고, 그것이 심장(마음의 근원인 진아) 속에 안주할 때는 이름과 형상들이 사라진다.
(주의를 진아 안에 고정하는 수단을 통해) 마음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심장(육체적 심장이 아님) 안에 붙들어 두는 것을 '나를 향하기' 혹은 '안으로 향하기'라고 부른다.
그것이 심장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을 '밖으로 향하기'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마음이 심장 안에 안주할 때 모든 생각의 뿌리인 '나'('나'라는 생각, 곧 에고)가 사라지고, 항상 존재하는 자기만이 빛나게 될 것이다.
'나'라는 생각이 티끌 만큼도 없는 곳(상태)이야말로 성품(swarupam)이다.
그것이야말로 '침묵(maunam)'으로 불린다.
이와 같이 고요히 있음을 '지견(知見)'이라고 부른다.
고요히 있음이란 (자기주시를 통해) 마음을 진아 성품 안에 가라앉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 남들의 생각을 안다든가, 과거,현재,미래를 안다든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 등은 결코 지견일 수가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진아의 성품뿐이다.
세계, 영혼, 하느님은 자개 속의 은과 같이 그것 안의 덧씌움(상상된 것)이다.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나고 동시에 사라진다.
성품이야말로 세계이고, 성품이야말로 '나'이며, 성품이야말로 하나님이다.
모든 것은 시바의 성품이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탐구 외에 다른 적합한 수단이 없다.
다른 수단으로 제어하면 마음이 가라앉는 듯이 보이다가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조식(調息)으로도 마음은 가라앉겠지만, 생기(生氣)가 가라앉아 있는 동안만 마음이 가라앉을 것이고,
생기가 일어나면 그것도 일어나서 원습의 지배하에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마음과 생기의 근원은 같은 하나이다.
생각이야말로 마음의 성품이다.
'나'라는 생각이 마음의 최초의 생각이며, 그것이야말로 에고이다.
에고가 일어나는 바로 그곳에서 생기도 일어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생기도 가라앉고,
생기가 가라앉으면 마음도 가라앉는다.
그러나 잠 속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아 있어도 생기가 가라앉지 않는다.
이는 몸의 보호를 위하여, 그 몸이 죽었다고 다른 사람이 오인하지 않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생시와 삼매에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생기도 가라앉는다.
생기는 마음의 거친 형태라고 말해진다.
죽을 때까지는 마음이 생기를 몸 안에서 유지하다가, 몸이 죽는 순간 그것을 가지고 가 버린다.
따라서 조식은 마음을 제어하는 하나의 보조 방편일 뿐, 마음 소멸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조식과 마찬가지로 형상명상(形象冥想), 진언염송(眞言念誦), 식사조절 등은 마음을 제어하는 보조 방편에 불과하다.
(즉, 그 자체로는 결코 마음 소멸을 가져 오지 않을 것이다).
형상명상과 진언염송에 의해서도 마음은 일념집중을 얻는다.
마치 (무엇을 붙들려고 이리 저리) 늘 움직이는 코끼리의 코에 쇠사슬을 쥐어주면 코끼리는 그것만 쥐고 있지 다른 것을 붙들지 않듯이, 늘 움직이는 마음도 하나의 이름이나 (신의) 형상으로 훈련시키면 그것만을 붙들고 있게 된다.
마음이 무수한 생각들로 확신되기 때문에 하나 하나의 생각은 아주 약해진다.
생각이 점점 줄어들면서 일념집중을 얻게 되고, 그렇게 하여 힘을 얻은 마음에게는 자기탐구가 쉽게 성취될 것이다.
모든 규율 중에서 으뜸인 '적량 순수성 식사조절'에 의해 마음의 순수성이 증가하면 자기탐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엣적부터 되풀이되는 대상습(對象習: 감각대상들을 향하는 습)이 바다의 파도처럼 무수히 일어난다 해도, 자기주시(自己注視 : 자기성품에 대한 명상)가 늘어나고 늘어나면 그것들은 소멸될 것이다.
'이 모든 원습을 해소하고 진아로서만 머무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하고 의심하는 생각이 일어날 여지조차 주지 말고 자기주시를 끈질기게 붙들고 나가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하더라도, '나는 죄를 지은 사람이다 !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한탄하며 울기보다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아예 내버리고 열심히 자기주시를 하면 그는 반드시 구원될 것이다.(즉, 진아를 성취할 것이다)
마음 안에 어느 정도의 대상 습이 존재하는 한,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가 필요하다.
생각들이 일어날 때는,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모두 탐구에 의해 소멸해 버려야 한다.
다른 것(어떤 2인칭이나 3인칭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이 무집착 또는 무욕이며, 자기를 떠나지 않음이 지(知)이다. 실은 이 둘(無欲과 知)은 하나이다.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허리에 돌을 달고 잠수하여 바닷 속의 진주를 캐내듯이, 누구든지 무집착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으로 깊히 가라앉으면 진아라는 진주를 얻을 수 있다.
끊임없는 자기기억('나'라는 느낌만을 기억하거나 주시하기)을 꽉 붙들고 나가면 진아를 성취하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성채 안에 저들이 있는 한 그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나오는 대로 그들을 계속 다 죽여 버리면 성채는 (우리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신과 스승은 실로 다르지 않다.
호랑이의 입 안에 떨어진 먹이가 빠져 나갈 수 없듯이, 스승의 은총의 시선 아래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에 의해 확실히 구원받을 것입며 결코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스승이 보여준 길을 어김없이 다라가야 한다.
진아안주 안에 확고히 머물러 진아내관(진아에 대한 생각, 자기 주시를 말함) 아닌 어떤 생각도 일어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이, 신에게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다.
신에게 아무리 많은 짐을 지워드린다 해도, 그는 모든 짐을 져 줄 것이다.
지고한 하나님의 힘이 모든 행위를 주관하고 있는데, 왜 그 힘에 우리 자신을 맡겨 버리지 않고 늘 '나는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기차가 모든 짐을 날라 준다는 것을 알면서, 왜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우리가 우리의 작은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행복하게 있지 않고, 그것을 머리 위에 이고 있어야 하는가?
행복이라는 것은 진아의 성품일 뿐이며, 행복과 진아의 성품은 다르지 않다.
진아 행복만이 존재하고, 그것만이 실재한다.
세간의 대상들 중 어느 하나 안에도 행복은 전혀 없다.
그런 것들에서 우리가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분별부족 때문이다.
마음이 밖으로 나올 때는 불행을 경험한다.
사실 우리의 생각들(욕망들)이 충족될 때마다 마음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진아의 행복을 체험하는 것일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잠, 삼매, 기절상태와, 바라던 것을 얻었을 때, 싫어하던 것이 소멸될 때는 마음이 안으로 향해져서 진아의 행복을 경험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마음은 진아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하며 쉼없이 요동한다
나무 밑의 그늘은 시원하다. 바깥의 햇빛은 뜨겁다.
밖에서 헤메던 사람이 그늘 안으로 들어가면 시원해진다.
조금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면 더위를 참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다시 나무 밑으로 들어온다.
이런 식으로 그는 그늘을 떠나 햇빛 속으로 나갔다가 햇빛을 떠나 그늘로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이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은 분별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분별이 있는 사람은 그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인의 마음은 브라만(진아)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의 마음은 세계 속을 배화하며 계속 불행을 겪다가, 잠시 브라만으로 돌아와서 행복을 즐긴다.
세계라는 것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가 사라질 때, 즉 생각이 없을 때, 마음은 지복을 경험한다.
세계가 나타날 때 마음은 불행을 경험한다.
욕망, 의도, 노력없이 떠오르는 태양이 있기만 해도, 일장석(확대경)은 화기를 뿜어내고, 연꽃은 만개하며, 물은 증발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일을 시작하고, 수행하고, 그치듯이, 또한 자석 앞에서 바늘이 움직이듯이, 의도없는 신의 존재라는 특별한 성품 때문에 일어날 뿐인 신의 세 가지 기능 또는 다섯가지 기능(신의 세 가지 기능은 창조,유지,파괴이고, 여기에 은폐와 은총 두 가지를 합해서 다섯가지 신의 기능)에 의해 지배되는 개아들은, 그들 각자의 업에 따라서 (그들의 발현업에 따라서 뿐만 아니라 과거의 행위습에 따라서도) 활동을 하고 그친다.
그렇기는 하나, 신은 의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단 하나의 업도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세간의 행위들이 태양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다른 4대 원소(지수화풍)의 좋고 나쁜 성질들이 일체에 편재한 허공(다섯번째 원소)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과 같다.
모든 경전에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그 마음 제어만이 경전들의 최종적 판정임을 알고 나면 경전들을 끝없이 공부해 봐야 이익이 없다.
마음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탐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어떻게 경전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탐구하겠는가?
자기를 아는 것은 자신의 지(知)의 눈에 의해서이다.
라마가 자신이 라마임을 알기 위해 거울이 필요한가?
'자기'는 다섯 껍질의 안에 있는 반면 경전은 그것들의 밖에 있다.
따라서 다섯 껍질을 젖혀두고 탐구해야 하는 자기를 저작들 안에서 탐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속박되어 있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탐구하여 자신의 참된 성품을 아는 것만이 해탈이다.
언제나 마음(주의)을 진아 안에 고정하는 것만을 아는 것만을 자기탐구라 하며,
명상은 자기를 존재-의식-지복인 브라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쓰레기를 쓸어 담아 내버려야 할 사람이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 봐야 아무 이익이 없듯이,
자기를 알아야 할 사람이 진아를 은폐하고 있는 범주들(세게, 영혼, 신을 구성하는 원리들)을 모두 한데 모아 내버리지 않고, 그 수를 헤아리고 그것들의 성질을 자세히 조사해 봐야 아무 이익이 없다.
세간(세상 속에서의 우리의 삶 전체)은 하나의 꿈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생시는 길고 꿈은 잠깐이라는 것 말고는 (둘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
생시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이나 꿈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그때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 속에서는 마음이 다른 몸을 취한다.
생시와 꿈 모두에서 생각 및 이름과 형상들(대상들)이 동시에 일어난다(따라서 두 상태 간에 아무 차이가 없다)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라는 두 가지가 있지는 않다. 마음은 하나일 뿐이다.
원습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는 것이다.
마음이 좋은 원습의 영향 하에 있을 때는 좋은 마음이라고 하고,
그것이 나쁜 원습의 영향 하에 있을 때는 나쁜 마음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나쁘게 보여도 그들을 싫어해서는 안된다.
좋아함과 싫어함 둘 다를 싫어해야 한다.
세간적인 문제에 마음이 머무르게 해서는 안된다.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남들에게 주는 것은 모두 우리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이 진리를 안다면 실로 누가 베풀기를 꺼리겠는가?
자기(에고)가 일어나면 일체가 일어나고,
자기가 가라앉으면 일체가 가라앉는다.
우리가 겸허하게 행동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리고 그만큼만) 선(善)이 있을 것이다.
마음을 제어하고 있을(가라안혀 둘) 수 있으면 우리는 어디든지 있을 수 있다.
-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Nan y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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