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1. 10:02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부단한 노력에 의해 키워진 이 자각의 흐름은 훨씬 강해지고 더욱 끊임없이 이어져서 마침내 진아 깨달음, 즉 순수하고 지복스러운 자각이 항상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으면서도 정상적인 지각과 일상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상태인, 본연삼매(本然三昧,사하자 삼마디)에 이르게 하였다.
이러한 통교(通交-삼매와 현실상활의 연결)를 이승의 삶에서 성취한다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다.
슈리 바가반의 경우에 그것은 불과 몇달 뒤에, 전혀 아무런 탐구나노 력, 혹은 아무런 의식적인 준비없이 일어났다.
당신 자신이 이렇게 묘사했다.
(아래 글은 라마나 마하리쉬가 최초의 자연스러운 깨달음의 체험을 묘사한 것임.이때가 1896년 7월 중순경, 서양식 나이로 17세, 중학교 재학생 시절임)
" 내 생애에서 그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내가 마두라를 영원히 떠나기 6주 전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나는 숙부님댁의 2층에 있는 한 방에 앉아 있었다.
나는 거의 병이 나는 일이 없었고 그날도 내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도, 갑자기 격렬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다. 내 건강상태로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고, 나는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거나 그 공포를 느낄 어떤 이유가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나는 죽으려고 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그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의사나 집안 어른 혹은 친구들을 찾아가 의논할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그 문제를 바로 그 자리에서 스스로 풀어야 한다고 느꼈다."
" 죽음의 공포가 몰고 온 충격은 내 마음을 내면으로 몰아넣었고, 나는 - 실제로 말로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말했다. ' 자, 이제 죽음이 찾아왔다. 그게 뭘 의미하지? 죽어가고 있는 게 뭐지? 이 몸이 죽는다.'
그러고 나는 바로 죽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나는 사지를 뻗고 뻣뻣이 누워 마치 사후강직(死後剛直-시체가 굳는 현상)이 시작된 것처럼 했다. 그리고 그 탐구에 더 실재감을 주기 위해 하나의 시체를 흉내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입을 꽉 다물어 아무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그래서 '나'라는 말이나 다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올 수 없게 했다.
'자 그러면' 하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 몸이 죽었다. 그것은 뻣뻣하게 화장터로 실려가서 불에 타서 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이 죽는다고 내가 죽는가? 몸이 난가? 그것은 말이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 인격의 모든 힘과 내 내면의 '나'의 목소리까지, 그것과 별개라는 것을 느낀다. 따라서 나는 몸을 초월한 영(靈,spirit)이다.
이 몸은 죽지만 그것을 초월해 있는 영(靈)은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내가 불사(不死)의 영(靈)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은 둔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진리같이 생생하게 뚫고 들어왔으며, 나는 거의 아무런 사고과정없이 직접적으로 그것을 지각했다.
'나'는 아주 실제적인 어떤 것, 나의 현재 상태에 관한 유일하게 실재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내 몸과 연관되는 모든 의식적인 활동은 그 '나'에 집중되었다."
" 그 순간 이후로 '나', 즉 진아(眞我,Self)는 강력한 끌어당김으로 그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했으며, 죽음의 공포는 일거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부터는 진아 안으로의 몰입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다른 생각들은 마치 악보의 여러 음표들 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그 '나'는 다른 모든 음표들의 바탕에 깔리면서 그것들괴 섞이는 근간적(根幹的)인 스루띠 음표(힌두음악의 한 작품 전체에 일관되게 이어지는 단음, 마치 염주가 꿰어진 실과 같은 것)처럼, 계속되는 것이었다. 몸이 말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다른 무슨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위기가 있기 이전에는 나는 내 진아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전혀 없었으며, 의식적으로 그것에 끌리지도 않았다.
나는 그것에 대해 이렇다 할 흥미나 직접적인 관심이 없었고, 그 안에 영구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성향은 더더욱 없엇다. "
아무런 자기 주장이나 이런 저런 설명없이 이렇게 단순하게 기술한 것을 보면, 그가 성취한 상태는 자기중심적인(egotism)와 전혀 다를 바 없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와 '진아'라는 단어들이 갖는 애매성 때문이다. 실질적인 차이는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관심이 에고, 즉 별개의 개인적 존재로서의 '나'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은 그 에고를 해체하겠다고 위협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반면, 여기서는 모든 사람 각자의 영(靈)이자 자기(Self)인, 일체에 두루하며 죽음없는 진아와 그 '나'가 하나라는 깨달음 안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영원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영(靈)과 하나임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맞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것을 안 별개의 '나'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그 '나' 자체가 분명한 의식 하에 영(靈)이었던 것이다.
후년에 슈리 바가반은 그 차이점에 대해 서양의 구도자 폴 브런턴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브런튼 :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이 자기(Self-진아)란 정확하게 어떤 것입니까? 만약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옳다면 사람 안에는 또 하나의 자아가 있어야만 합니다.
슈리 라마나 : 한 사람이 두 개의 정체, 즉 두 개의 자기(two selves)를 소유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사람이 먼저 자기 자신을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생각하는 것이 오랜 습관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나'를 진정으로 대면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옳바른 상(像)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육체 및 머리(분별마음)와 동일시 해왔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대에게 이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대는 나에게 그 참된 자기(진아)를 묘사해 보라고 하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나'라는 느낌이 거기서 일어나고, 또 그 속으로 사라지지 않을 수 없는 <그것 (That)>입니다.
브런튼 : 사라진다고요? 어떻게 우리가 자신의 개인성의 느낌을 잃을 수가 있습니까?
슈리 라마나 :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생각,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원초적 생각은 '나'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 일어난 뒤에야 다른 어떤 생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1인칭 대명사인 '나'가 마음 속에 일어난 뒤에야 2인칭 대명사인 '너'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대가 '나'라는 실마리를 마음 속으로 따라가서 결국 그것의 근원까지 이를 수 있으면, 그대는 그것이 가장 먼저 일어난 생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마지막 사라지는 생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체험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브런튼 : 자기 자신 속으로 그러한 내심의 탐구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슈리 라마나 : 물론이지요. 내면으로 들어가서 결국 마지막 생각인 '나'가 점차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브런튼 : 그러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때는 사람이 완전히 의식이 없어지거나 아니면 백치가 됩니까?
슈리 라마나 : 아니지요. 그 반대로 그가 자신의 진아, 즉 사람의 참된 성품을 깨닫게 되면, 그는 불멸의 의식을 성취할 것이고, 진정으로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브런튼 : 그러나 확실히 '나'라는 느낌도 거기에 속해야 하지 않습니까?
슈리 라마나 : '나'라는 느낌은 그 사람, 즉 그 육체와 머리(육체마음)에 속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진아를 처음으로 알게 될 때에는 그의 존재 깊은 곳에서 다른 어떤 것이 일어나 그를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 어떤 것은 마음의 이면에 있습니다. 그것은 무한하고,, 신성하며, 영원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천국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영혼이라고 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을 열반(涅槃,Nirvana)이라 하고, 힌두교도들은 그것을 해탈(Liberation)이라고 합니다. 어떤 명칭으로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는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참된 자기(眞我)에 대한 탐구에 착수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럴 때까지는 의심과 불안이 평생 뒤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왕이나 정치가들도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기는 하지만, 정작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가장 큰 힘은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뜷고 들어간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모르면서 다른 것을 다 안다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 참된 자기에 대한 탐구를 회피하지만, 이만큼 달려들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뭐가 있습니까? ('비밀 인도에서의 탐색'에서 발췌)
이 수행은 전부해서 겨우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그냥 온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의 수행, 즉 빛을 향한 노력이엇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스승은 보통 자신이 밟아온 길로 제자들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평생의 수행인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수행자들에게는 여러 생이 걸리는 수행을 슈리 바가반은 30분 만에 끝내 버렸다고 해서, 그 수행이 그가 나중에 당신의 헌신자들에게 권장한 자아탐구의 한 노력이엇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헌신자들에게, 그 수행에 이르는 궁극점은 보통 금방 도달되는 것이 아니고 오래 노력한 뒤에야 도달되는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기는 했으나, 또한 그는 그것이 "조건지워지지 않은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진정한 그대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확실한 수단이며 유일한 직접적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록 그것이 성취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즉시 변환(變換)의 과정을 시발한다고 했다.
"그러나 에고 자아(ego-self)가 자기 자신을 알려고 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자신이 빠져 있는 육체에 대해 점점 덜 가담하게 되고, 진아의 의식에 점점 더 가담하게 됩니다."
수행의 이론이나 실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는 했지만, 슈리 바가반이 집중을 돕기 위한 방편으로 사실상 조식(調息-호흡제어법)을 사용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당신도 그것을 생각제어를 성취하기 위한 타당한 보조 수단이라고 인정했다. 다만 당신은 그 목적 외에는 그것을 쓰지 말라고 했으며, 결코 그것을 실제로 권장하지는 않았다.
" 호흡제어도 하나의 보조수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념집중을 얻는데 도움을 얻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제어도 헤메는 마음을 제어하고 이러한 일념을 성취하는 것을 도어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방법을 사용해도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호흡수련을 통해서 마음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나타날 수 있는 어떤 체험에도 만족하고 있어서는 안되며, 그 제어된 마음을 가다듬어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으로 나아가서 마음이 진아 안에 합일되게 해야 합니다." (다음 회에 계속)
-아서 오즈번 지음,대성 번역 <라마나 마하리쉬와 진아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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