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탐구기법에 대한 비유적 설명

2019. 7. 17. 19:36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하나의 비유를 들어 스리 바가반의 말씀에서 묘사한 대로 주의를 자기에게만 고정하는 이 (자아탐구)기법을 더 분명하게 이해해 보자. 그러나 진아의 성품은 독특하고 비교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누구도 어떤 비유를 통해서도 그것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의 지적인 발전 정도와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상황에 맞추어 제시하는 비유의 대부분은 상당히 적절할 수도 있지만, 이 지각력없는 비유들은 지각력 있는 진아를 결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스리 바가반은 영사기의 비유를 종종 들었으나, 다음에 나오는 거울에서 반사되는 햇빛의 비유는 오로지 독자들의 많은 의문을 해소하고 그들의 이해를 분명히 해 주기 위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젖은 희다"는 말을 들은 장님이 "우리 아이가 두루미를 삼켰다"라고 말하듯이, 이 비유를 지나치게 확대 적용하는 오류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註 : 장님 이야기 ; 한번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 경사스러운 일을 아직 기뻐하고 있던 다음날, 그는 그 아이가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슬퍼하면서 물었다. "내 아이가 어떻게 죽었소?" "젖을 먹고 죽었습니다." "젖은 어떤 것이오?" "젖은 흰색입니다." "흰색이란 어떤 것이오?" "흰색은 두루미같은 것입니다." "두루미는 어떤 것이오?" 소식을 전한 사람은 참다못해 자신의 손을 두루미처럼 구부려 장님에게 그 손을 만져보게 하고는 말했다. "두루미는 이와 같습니다." 그러자 장님이 즉시 한탄하면서 외쳤다. "아, 내 어린 아이가 이렇게 큰 것을 먹었으니 죽을 수 밖에 !"]

깨진 거울조각 하나가 열린 공간의 땅바다에 놓여 햇빛을 온통 받고 있다.

그 거울 조각에 비치는 햇빛이 반사되고, 그 반사광이 근처의 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안쪽 벽 위에 비친다.

거울에서 그 어두운 방의 안쪽 벽으로 들어오는 그 빛은 햇빛의 반사광이다

이 반사광으로 인해 어두운 방안에 있는 사람이 그 방안의사물들을 볼 수 있다.

벽 위에 보이는 그 반사광은 거울조각과 같은 형상(삼각형,사각형 혹은 둥근 모양 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열린 공간에 직접 내리쬐는 햇빛(반사광의 근원인 원광)은 나눌 수 없이 단일하고 도처에 편재하며, 어떤 특수한 형상이나 모양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비친다.


진아, 곧 우리의 존재-의식도 열린 공간에 직접 내리쬐는 햇빛과 비슷하다.

에고-느낌 혹은 심식(心識)인 '나는 몸이다'라는 의식은 거울에서 반사되며 그 방의 안쪽 벽까지 뻣어간 빛살과 비슷하다. 진아의식은 광대하고 도처에 편재한 직접적인 햇빛처럼 무한하므로, 그것은 어떤 형상 부가물도 없다.

그 반사광이 거울조각의 한계와 크기를 그대로 갖듯이, 에고-느낌은 한 몸의 크기와 형상을 '나'로서 경험하기 때문에 부가물들을 갖는다. 어두운 방안의 사물들이 반사광에 의해 인식되듯이, 몸과 세계는 심식에 의해 인식된다.


세계와 마음은 함께 일어나고 지지만, 세계는 마음에 의해서만 빛나네.

                                                                                        -<실재사십송>-


어두운 방안에 있는 사람이 그 반사광에 의해 보이는 방안의 사물들을 관찰하기를 그만두고,

대신 '이 빛이 어디서 오는가?'하고 그 빛의 근원을 보기를 갈망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는 반사된 빛이 벽에 닿는 바로 그 자리로 가서, 거기에 눈을 두고 그 광선이 나오는 곳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보게 되는가? 해이다 !

그러나 그가 지금 보는 것은 진찌 해가 아니라 해의 반사된 모습일 뿐이다.

더욱이 그에게는 마치 방 바깥에 있는 땅바닥의 특정지점에 해가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

바깥에 해가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특정 지점은 방의 오른쪽이나 왼쪽에서 몇 자 거리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마치 "가슴 중앙에서 손가락 두 개 폭의 오른쪽에 심장이 있다"고 하듯이)

그러나 해가 실제로 땅바닥의 그 자리에 그렇게 놓어 있는가? 아니, 그것은 그 반사광이 일어나는 곳에 불과하다 !

진짜 해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을 그 반사광이 나오는 일직선상에 두고, 눈을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은 채 이때 보이는 반사되는 해 쪽으로 따라가야 한다.


어두운 방안에 있는 사람이 방 안에 들어온 반사광의 근원을 보기로 작정하면, 그 반사광의 도움으로 사물들을 즐기거나 그것들에 대해 탐색하려는 욕망을 포기하듯이, 진정한 빛(진아)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오관을 통해 작용하는 마음-빛에만 의지하여 빛나는 다양한 세계를 즐기거나 그에 대해 알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세속인들처럼) 외부적인 대상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욕망하는 것에 미혹되거나,

(우리의 현대과학자들처럼) 그것들을 탐색하는 일에 종사하게 되면 진아를 알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의 감각대상들에 주의 기울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무욕(無欲), 곧 내적인 포기이다.

그 반사광이 어디를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는지 알려는 열의는 에고인 '나', 곧 마음-빛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알려는 열의에 상응한다. 이 열의가 진아에 대한 사랑이다.

눈을 광선이 나오는 일직선상에 두고 어느 쪽으로도 시선이 벗어나지 않는 것은 '나'-의식에 흔들림없이 고정된 일념집중의 주시에 상응한다. 이제 그 사람은 그 반사광의 일직선을 따라 어두운 방에서 바깥에 놓여 있는 거울조각 쪽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이 움직임은 심장을 향해 내면으로 뛰어드는 것에 상응한다.

마치 물에 빠진 물건을 찾기 위해 잠수하듯이, 예리한 마음으로 호흡과 말을 제어하면서 내면으로 뛰어들어, 에고가 일어나는 곳을 알아야 한다네. 이렇게 알라 !   -실재사십송 제28연-

어떤 사람들은 '호흡과 말을 제어하면서 내면으로 뛰어든다'는 말만 취하여, 조식(調息) 수련을 닦기 시작한다.

탐구과정에서 호흡이 멎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멎게 하기 위한 조식이라는 우회로는 필요하지 않다.

자신에게 빛을 주는 근원을 발견하려는 엄청난 열망을 가진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면 호흡은 자동적으로 멎는다!

탐구자의 마음이 이처럼 외부의 감각대상들을 알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본래적인 빛의 형상, 곧 진아에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할 때 그가 숨을 내쉬면, 그것은 다시 들이쉬어지지 않은 채 자동적으로 바깥에 머무른다.

마찬가지로, 그럴 때 숨을 들이쉬면 그것은 다시 내쉬어지지 않은 채 자동적으로 안에 머무른다!

이것을 각기 '외적 지식(止息)'과 '내적 지식(止息)'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주시를 놓침(망각)으로 인해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까지는 탐구자 안에서 이 지식(止息)이 아주 수월하게 계속될 것이다.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일상생홯 속에서도 어떤 놀라운 소식이 갑자기 우리에게 전해지거나 우리가 잊어버린 물건을 어디 두었는지 기억해 내려고 온 정신을 집중할 때도, 그때 일어나는 마음의 예리함(집중의 강렬함)으로 인해 숨이 자동적으로 멎는다는 것을 누구나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자신의 본래적인 빛의 형상을 보려는 강렬한 열망과 진지한 일념집중으로 예리하게 내면을 향하여 그곳에 머무르기 시작하면, 이내 호흡이 자동적으로 멎을 것이다.

이 지식(止息)의 상태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 계속되어도 탐구자는 숨 막힘을 경험하지 않는다. 즉, 숨을 내쉬거나 들이쉬려는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조식을 닦을 때는 지식의 시간 단위가 늘어나면 숨 막힘을 경험한다.


만일 탐구자의 주의가 진아에 워낙 강렬하게 고정되어 있어 숨이 멎었는지 어떤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그의 지식상태는 자발적이며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 때 숨이 멎었는지 여부를 알려고 하는 구도자들이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주의가 호흡에 고정되므로 자기 주시를 놓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온갖 생각들이 솟아올라 수행의 흐름이 중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리 바가반은 "예리한 (내면으로 향한) '를 더붙여, '예리한 마음으로 호흡을 제어하고, 예리한 마음으로 내면으로 뛰어들어, 에리한 마음으로 그 일어나는 곳을 알라'고 이해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 반사광에 시선을 둔 사람이 그 빛살을 따라 움직이면 그 길이가 줄어들지 않는가?

그가 나아감에 따라 빛살의 길이가 줄어들듯이, 구도자가 꾸준한 자세로  마음의 근원을 진지하게 추구해 가면, 확장되려는 마음의 습도 더욱 더 줄어든다.

주시가 (반사된) 빛살 '나'를 따라 내면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갈 때 그 길이는 점점 더 줄어들고, 그 빛살 '나'가 죽을 때, '나'로서 빛나는 것이 진지(Jnana)라네.  -자기탐구 11연시, 제9연-

그 사람이 마침내 거울조각에 아주 가까이 당도할 때, 그는 반사광의 바로 근원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구도자가 내면으로 뛰어들어 자신이 일어난 근원(心藏)에 도달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 사람은 이제 그 반사광의 길이가 없어져 버린 상태, 곧 그가 거울에 너무 가까이 있어 어떤 반사도 일어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지 않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구도자가 강렬한 자기 주시의 노력에 의해 내면으로 점점 더 깊히 뛰어듦으로 인해 자신의 근원에 너무 가까워져서 털끝만큼의 에고도 일어날 수 없게 되면, 그는 이제까지 주시의 목표였던 '나는 몸이다'라는 느낌(에고느낌)의 큰 해체속에 흡수되어 머무른다.

이 해체가 바로 스리 바가반이 <우빠데샤 운디야르> 제19연에서 "'나'가 죽을 것이네"라고 한 것이다.

그 사람은 햇빛의 반사광이 나오는 근원을 추구한 것만으로도 이제 어두운 방을 나와, 그 반사광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공(空)의 상태에서 그 열린 공간에 서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구도자가 단순한 자기 주시를 통해 '에고-나'가 없어짐으로써 생겨난 대공(大空)의 상태에서 심장공간(hridayakasa) 안에 머무르는 상태이다.

방을 나와 열린 공간에 나선 그 사람은 눈부셔 하면서 탄식한다.

"아아! 이제까지 나를 인도한 해(반사된 해)가 이제 사라졌다" 


이 순간, 열린 공간에 서 있던 그의 친구가 다가와서 이런 위안의 말을 건넨다. 

"자네 그 동안 어디 있었나? 어두운 방안에 있지 않았나 ! 지금은 어디 있나? 열린 공간에 있지 않나!  자네가 어두운 방안에 있을 때 자네를 밖으로 인도한 것은 단 한줄기의 빛뿐이었지만, 여기서는 (이 광대한 공간에서는) 빛살이 무수하고 무한한 양 아닌가?  자네가 앞서 본 것은 직접 비치는 햇빛도 아니고 하나의 반사광일 뿐이었네! 그러나 자네가 지금 경험하는 것은 직접적인 햇빛이네. 자네가 지금 있는 곳이 무한한 빛의 공간일 뿐일 때, 그 반사광이 사라짐으로써 생겨난 공(空) 때문에 어둠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사라진 것이 상상일 수 있겠는가? 그것의 사라짐 자체가 참된 빛이라는 것을 알게, 그것은 어둠이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에고의 절멸에 의해 생겨난 대공을 체험하면 구도자는 다소 놀란다.

"아아! 지금까지 내 수행에서 하나의 등대불로 삼아 주의를 기울였던 '나'-의식(에고)마저 잃어버렸구나 ! 그러면 실제로 '진아'같은 것도 없단 말인가?"

바로 그 순간, 그의 심장으로서 늘 빛나고 있는 참스승이 그에게 이와 같이 지적해 준다.

"하나의 극미한 반사광에 불과한 에고가 소멸되는 것이 정말 상상일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이전에 그것이 존재했다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이 사라짐으로써 생겨난 지금의 대공(大空)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공(空)조차도 '이것은 하나의 공이다'라고 아는 그대야말로 참된 지(知)라는 것을 알라, 그대는 하나의 공이 아니다."

참스승은 심장 안에서 심장으로서 (그 구도자와) 접촉함 (스푸라나로서 번뜩임)으로써 그 자신의 존재-의식의 빛남이라는 직접적인 체험으로 일순간에 그것을 지적한다 ! '나는 어디서 오는가? 나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색을 시작했던 구도자는 이제 비이원적 진아지(知). 곧 특정한 장소나 시간의 한계가 없는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라는 참된 지(知)를 성취한다.


'나'라는 의식을 꽉 붙들고 그럼으로써 그것에 대한 점점 더 강렬한 집중을 얻는 것이 곧 내면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이 내면으로 뛰어드는 대신, 자신들이 자아탐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시간 동안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나 "나는 어디서 오는가?"하고 단순히 마음 속으로 또는 소리 내어 염하기만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탐구를 하려고 앉으면 자신들의 생각과 대면하여 마음 속으로 끝없이 스리 바가반이 가르친 다음의 질문을 되풀이 한다.

"이 생각들은 누구에게 오는가?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 아니면 어떤 때는 심지어 다음 생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생각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기까지 한다.

이것도 부질없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사문회(査問會) 석상에 앉아서 생각을 하나하나 호출하는 것이던가?

이것이 내면으로 뛰어드는 수행인가? 따라서 우리는 '다음 생각은 뭘까?'하고 지켜보고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질문하기만 하는 것은 자기주시가 아니다.

이처럼 생각의 파도 위 표면을 떠다니기만 하는 사람들, 즉 예리한 마음으로 존재-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내면으로 뛰어들어  마음, 호흠 및 몸과 감각기관들의 모든 활동을 제어하지는 않고,그런 질문들에만 마음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서 스리 바가반은,


그 자신이 항상 진아로 존재하는데도,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나 "나는 어느 곳에서 오는가?"하고 묻는 사람은, 술에 취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 있나?"하고 묻는 사람에 비견된다. -<진아에 대한 5연시>-

라고 하였고, 나아가 이렇게 묻는다.


(이와 같이 떠다니는 대신) 우리가 그 '나'가 일어나는 곳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인 에고 없음의 상태를 어떻게 성취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에고 없음)을 성취하지 않는다면, 말해 보라,'우리가 그것'인 진아인 상태 안에 어떻게 안주하겠는가?

                                                                                                                 -<실재사십송 27연>-


그러므로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것은 '나'라는 느낌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고요히 있는 것이다.

자기 주시를 하는 동안 자각이 느슨해질 때에만 그것의 한 징표인 생각들이 일어날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만약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기 주시를 놓쳤음을 의미한다.

그럴 때만 스리 바가반이 가르쳐 주는 방식으로 "이 생각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자신에게 물으면 "나에게"라는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럴 때에 " 이 나는 누구인가?" 혹은 "이 나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라고 자문해 보는 것이다.


스리 바가반이 우리에게 "이런 생각들은 누구에게 나타나는가?"라고 물으라고 조언한 것은 생각-주시에서 자기 주시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그 답인 '나에게"은 '나'의 여격(與格) 형태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주격(主格) 형태인 '나'라는 느낌을 쉽게 상기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질문 형태를 약간 달리하여)  "이런 생각들을 누가 하는가?"라고 물으면, 주격형태인 '나'라는 느낌이 하나의 답으로서 얻어지므로 자신도 모르게 놓쳤던 자기주시가 곧바로 회복도지 않겠는가?

자기 주시의 이 회복은 실은 자기로 있음(즉 자기로 머무르거나 안주하기)이다 !

그러한 "있음'이야말로 올바른 수행이다. (고요히 있으라).

수행은 함(有爲)이 아니라 있음(存在,無爲)인 것이다 !


                                                 -스리 사두 옴 <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