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리쉬의 <자아탐구>에 대한 여러가지 가르침 말씀의 정리(2)

2019. 6. 3. 10:20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바가반은 가끔 심적인 논변도 허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초심자에게 개인적 자아, 즉 에고가 실재하지 않음을 납득시켜 그가 자기탐구를 할 수 있게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 논변 자체는 자기탐구가 아니다.]

질문자 : 저는 누구입니까? 그 답은 어떻게 발견합니까?

마하리쉬 : 그 질문을 그대 자신에게 하십시오. 육체(음식의 껍질)와 그 기능은 '나'가 아닙니다.

더 깊히 들어가면, 마음과 그 기능들은 '나'가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는 '이 생각들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생각들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얼핏 지나가는 것이거나 깊이 헤아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마음 안에서 작동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생각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들의 분명한 개념 그리고 작용이 그 개인에게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분석을 해보면,

자신의 개인성이 생각들의 존재와 그 연속을 지각하는 자로서 작용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개인성이 에고, 혹은 사람들이 말하는 '나'입니다.

지성의 껍질(개인적 영혼을 감싸는 다섯껍질 중의 네 번째, '나'라는 생각과 의지가 여기서 작동한다)은 '나'의 껍질일 뿐이지, '나' 자체는 아닙니다.

더 깊이 탐구해 나가면 "이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질문이 일어납니다.

'나'는 잠 속에서는 자각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일어남과 동시에 잠은 꿈과 생시로 바뀝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지금 꿈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지금 생시의 상태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만약 '나'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생겨났다면, 그 '나'는 무지에 덮혀 있습니다.

그러한 무지한 '나'(에고)는 경전에서 말하는, 혹은 현자들이 확인하는 그것(진아)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잠조차도 넘어서 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것이 틀림없고, 잠과 꿈 속에서도 그러한 상태들의 속성없이 내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지복의 껍질(다섯껍질 중의 다섯번째, 깊은 잠의 상태에서 남아 있는 껍질)을 초월한 뒤에]  이 세 가지(잠,생시,꿈)상태들의 저변에 있는 무제약적인 바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메다바드에서 온 두 명의 파르샤(인도 조로아스타교(배화교) 신도들) 여사가 바가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화교 여인들 : 바가반 저희들은 어릴 때부터 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철학에 관한 몇권의 책을 읽었고, 베단따에 끌렸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우파니샤드, <요가 바쉬슈타> <바가바트 기타>들을 읽었습니다. 저희는 명상을 하려고 애를 쓰는데, 명상에서는 아무 진보가 없습니다. 어떻게 깨달아야 할지 저희는 모르겠습니다. 부디 저희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겠습니까?


마하리쉬 : 그대들은 명상을 어떻게 합니까?


여인들 : 저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고 나서, 육체를 '나' 아닌 것으로 배제하고, 호흡을 '나' 아닌 것으로 배제하고, 마음을 '나' 아닌 것으로 배제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하리쉬 : 그러면, 마음에 관한 한 그 정도면 됐습니다. 그대의 과정은 심적인 것일 뿐입니다.

실제로 모든 경전들에서 그런 과정을 이야기한 것은 구도자로 하여금 진리를 알도록 인도하기 위해서 일 뿐입니다.

진리를 직접 가리켜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심적인 과정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나 아닌 것'을 배제하는 그 사람이 '나'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거나 '내가 그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렇게 말하는 '나'가 있어야 합니다.

이 '나'는 에고, 즉 '나라는 생각'일 뿐입니다.

이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 다른 모든 생각이 일어납니다.

'나'라는 생각은 따라서 뿌리생각입니다.

이 뿌리를 뽑아버리면 나머지 모든 생각이 동시에 뿌리 뽑힙니다.

따라서 뿌리인 '나'를 추구하여, 그대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으십시오.

그 '나'의 근원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문제들은 사라지고 순수한 진아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여인들 :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깊은 잠 속이든, 꿈 속이든, 생시든, 그 '나'는 항상 있습니다.

잠을 자는 사람은 지금 말을 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나'라는 느낌은 항상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부인해야겠지요.

그러나 그대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대는 '내가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 있는지 발견하십시오.


여인들 : 그래도 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그 '나'가 지금 거짓된 '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그릇된 '나'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어떤 거짓된 '나'도 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가 어떻게 그 자신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의 근원을 발견하고 거기에 머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대의 노력은 거기까지만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저 너머(the Beyond)가 그 자신을 돌보겠지요. 그대는 거기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노력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여인들 : 만약 '나'가 - 지금 여기에 - 항상 있다면, 왜 제가 그렇게 느끼지 못합니까?


마하리쉬 : 느끼지 못한다고 누가 말합니까? 진정한 '나'입니까, 아니면 그릇된 '나'입니까?

그대 자신에게 물어보면 그것이 그릇된 '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그릇된 '나'가 장애물이며, 그것이 제거되어야만 참된 '나'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나는 깨닫지 못했다'하는 느낌이 깨달음에 장애물입니다.

사실 그것은 이미 깨달아져 있습니다.

더 이상 깨달아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깨달음은 아직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 생겨나야 할 새로운 어떤 것이겠지요.

그러나 태어난 것은 무엇이든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깨달음이 영원하지 않다면 그것은 보유할 가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할 것은 존재하기 시작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지만 장애물에 의해 우리에게 가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영원한 것이 무지(無知) 때문에 그렇게 인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무지가 장애물입니다. 그것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이 무지는 '나'라는 생각과 동일합니다. 그 근원을 발견하면 그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은 유령과 같아서 만질 수는 없지만 육체와 동시에 일어나고, 육체와 함께 번성하며, 육체와 함께 사라집니다. 육체의식이 그릇된 '나'입니다. 그것을 놓아버립십시오.

그렇게 하려면 '나'의 근원을 추구하면 됩니다.

육체는 '내가 있다(I am)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육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입니다. 이 '나'가 누구인지 발견하십시오.

그 근원을 추구하면 그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여인들 : 그러면 지복이 있게 됩니까?


마하리쉬 : 지복은 존재-의식과 동시에 존재합니다. 영원한 존재에 관한 모든 논의들은 영원한 지복에도 해당됩니다. 그대의 성품이 지복입니다. 무지가 지금 그 지복을 숨기고 있지만, 그 지복이 드러나게 하려면 무지를 제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인들 :우리는 개인과 신으로서의 세계의 궁극적 실재성을 발견해야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그런 것들은 '나'의 개념입니다. 그것들은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야 일어납니다.

그대는 깊은 잠 속에서 그런 것들을 생각했습니까? 하지만 그대는 잠 속에서도 존재했고, 똑같은 '그대'가 지금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들이 실재한다면, 그것들이 그대의 잠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들은 '나'라는 생각에 의존해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가 그대에게 '나는 세계다'라고 말합니까?

육체가 '나는 육체다'라고 말합니까? 그대가 '이것이 세계다,' '이것이 육체다' 등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은 그대의 개념일 뿐입니다.

그대가 누구인지를 발견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의문들이 종식될 것입니다.


여인들 : 깨달은 뒤에 육체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계속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깨달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위하는 것을 봅니다.


마하리쉬 : 이 질문은 그대가 지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만약 그러고 싶으면, 깨달은 뒤에 물어도 됩니다. 깨달은 존재들에 관해서는, 그들의 문제는 그들 자신에게 맡겨두십시오.

왜 그들에 대해 그대가 걱정합니까?

사실 깨달은 뒤에는 육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진아와 별개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인들 : 만약 우리가 항상 '존재-의식-지복'이라면, 왜 신은 우리를 어려움 속에 빠드립니까?

그는 왜 우리를 창조했습니까?

마하리쉬 : 신이 와서 자기가 그대를 어려움 속에 빠드렸다고 말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대입니다.

그것 역시 거짓된 '나'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라지면, 신이 이것이나 저것을 창조했다고 말한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내가 있다'라는 말조차 하지 않습니다.

'내가 없는가?' 하는 어떤 의문이 일어나겠습니까?

자기가 암소나 물소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때에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자기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겠지요.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와 깨달음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마지막 인용문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자아탐구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부터 무엇이 자기탐구인가 하는 것으로  돌아가게 한다.]

마음이 그 자신의 성품을 끊임없이 탐구하면, 마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 드러나네.

이것이 모두에게 직접적인 길이라네.​ 

마음은 생각에 불과하며 모든 생각 중에서 '나'라는 생각이 뿌리라네.

따라서 마음은 '나'라는 생각에 지나지 않네.

이 '나'라는 생각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그것을 내면에서 추구하면, 그것은 사라진다네.

이것이 지혜의 추구라네.

그 '나'가 사라진 곳에 '나-나'가 스스로 나타나니,

이것은 무한자(無限者, Purnam) 라네.

에고가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이 있고,

에고가 없으면 다른 아무 것도 없다네.

실로 에고는 모든 것이네.

따라서 이 에고가 무엇인가 하는 탐구가 일체를 놓아버리는 유일한 긿이라네.

'나'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그것>의 상태라네.

'나'가 일어나지 않는 그 상태를 탐구하여 그것을 성취하지 않고서 어떻게,

'나'가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는 자기소멸을 성취할 수 있으랴?

그것을 성취하지 않고서 어떻게, 자기가 바로 그것인 자신의 참된 상태 안에 안주할 수 있으랴?

물에 빠진 물건을 찾으려는 사람이 물속으로 잠수하듯이,

말과 호흡을 제어하면서 예리한 일념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 속으로 뛰어 들어 '나'가 일어나는 곳을 찾아내야 하네.

진아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탐구는 '나'라는 말의 근원을 추구하는 것이네.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저것이다'에 대한 명상은 탐구에 보조수단을 될지 모르지만 탐구는 될 수 없네.

마음이 내면에서 '나는 누구인가?'하고 탐구하면,

우리가 심장에 도달하자마자  개인적인 '나'는 부끄러워서 넘어지고,

즉시 실재가 '나-나'로서 저절로 스스로를 드러낸다네.

그것은 '나'로서 자신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에고가 아니라 완전한 존재, 곧 절대적 진아라네.-실재사십송에서 발췌

                     - 아서 오즈번 엮음, 대성 번역<바가반이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