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27. 19:56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이 글은 스리 사두 옴(라마나 마하리쉬의 수숭한 제자)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구도자에게 답변으로 쓴 편지를 손질한 것이다. 그 질문은 " 하루 중 다양한 활동에 우리가 주의의 일부나 전부를 기울여야 하는데, 어떻게 끊임없는 자기주시를 유지하며 수행할 수 있습니까?"]
인류에 대해 가할 수 있는 비판은, 평생토록 모든 사람은 2인칭과 3인칭(너, 그, 그것, 이것, 저것' 등)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결코 1인칭(주체인 '나') 쪽으로 주의를 기울여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주가 창조되어 해체될 때까지, 모든 사람들- 실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 - 은 2인칭과 3인칭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그런데 그러한 주의의 최종 결과는 무엇인가? 말할 수 없는 불행의 더미이다 !
모든 불행은 1인칭에 주의를 기울여 그 참된 성품을 알지 않고, 2인칭과 3인칭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근본적 오류 - 원죄 - 의 결과로서 일어날 뿐이라는 것을 아신 바가반 스리 라마나는, 자비롭게 지상에 출현하여 인류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여러분은 생시와 꿈의 상태에서 내내 2인칭과 3인칭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그 결과 끝없는 불행을 경험한다.
그러나 어떤 2인칭이나 3인칭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잠 속에서는 어떤 불행도 경험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자는 동안 경험한 그 평화로운 행복을 간과한 채, 생시의 상태에서 무수한 외부의 대상들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그런 대상들이 없는 잠 속에서 행복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행복이 그 대상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1인칭 혹은 주체인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그러니 생시의 상태에서도 2인칭과 3인칭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1인칭 '나'에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겠는가?"
완벽한 영적 의사인 스리 바가반은 우리의 괴로움의 정확한 원인을 진단하고, 완벽한 치료과정을 처방했다.
즉, 자기주시라는 약을 복용하고 2인칭과 3인칭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식사조절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들 중 스리 바가반의 이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그래서 당신이 처방한 지료과정을 따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해탈열망자라고 불린다.
우리가 구도자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유일한 목표인 행복은 외부의 대상들에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진아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절대적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 자격요건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의 심장 속에서는 진아에 주의를 기울여 그것을 알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일어날 것이다. 사실 참된 구도자에게는 진아를 알고자 하는 욕망과 노력이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2차적인 중요성 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런 강열한 열망이 우리의 안에서 일어나면 성공은 보장된 것이다.
왜냐하면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헌신자들은 자기주시를 수행할 수 있으려면 모든 활동에서 물러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만일 우리가 아주 열심히 이 자기주시의 수행을 따르려고 하면, 일이 하나의 장애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모든 일을 포기하면 우리가 어떻게 몸이 필요로 하는 의식주를 조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헌신자들이 스리 바가반께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당신은, 일이 수행에 방해가 될 필요는 없다고 답변하곤 했다. 이것은 물론 구도자가 세속적인 사람과 같은 정신으로, 혹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구도자가 세간에서 일을 할 때 가져야 할 정신과 목표는 다음에 예에서 잘 드러난다.
어떤 실업가가 대도시의 도심에서 월 1,000루피에 가게 하나를 임차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가 자신의 사업에서 가계 월세를 지불하기에 족한 돈만 벌기로 목표한다면 그것은 가치없는 사업이 아니겠는가? 그가 가계를 세 낼 때의 목표는 월 10,000루피의 수익을 얻겠다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면에 월세를 낼 돈도 벌지 못한다면, 수익을 얻기 위해 그 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몸은 그 실업가가 임차한 가계와 같다.
우리가 이 몸을 세낸 목표는 진아를 깨달으려는 것인데, 그 몸에 대해 지불해야 할 월세는 곧 의식주이다.
이 월세를 내기 전에 우리는 마음, 말, 몸을 도구로 사용하는 일을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월세를 내지 못하면 우리는 이 몸 안에 살면서 진아지라는 큰 수익을 얻지를 못한다. 그러나 월세를 내기 위해 우리의 모든 삶 - 우리의 모든 시간과 노력 - 을 소비해서는 안 된다. 마음, 말, 몸은 월세를 내는데 필요한 만큼 - 즉, 몸을 위하여 의식주를 조달하는 만큼의 시간 동안만, 그 만큼의 노력으로만 일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만약 세상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우리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몸의 안락과 편의를 축적하는 데 바친다면, 우리는 월세만 내기 위해 일하고 결코 수익을 내려고는 하지 않는 가치없는 실업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진지한 구도자는 몸을 유지하는 데는 자기 시간과 노력의 일부만 소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조정하여, 나머지 시간과 에너지는 진아지라는 큰 수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데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구도자들은 그들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거의 또는 전혀 할 필요가 없도록 신이나 스승이 발현일을 정해 주겠지만, 어떤 구도자들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써야 하는 방식으로 발현업이 정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발현업이 어떤 식으로 정해지든, 그것은 그 구도자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즉 그가 궁극적으로 진아지를 성취할 수 있도록 정해질 뿐이다. 더욱이 발현업은 몸과 마음의 외부적 활동만 결정하므로, 진아지를 향한 내면의 욕망과 열망은 그것이 장애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아지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 그가 진아를 성취할 수 있도록 스승의 은총이 안팎으로 모든 면에서 분명히 그를 도와 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평생 너무나 많은 활동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주시를 할 시간이 없다고 하소연 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다른 중요한 활동들 속에서도 우리는 밥을 먹고, 목욕을 하고, 용변을 보고, 잠을 잘 시간 등을 얻지 않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활동 속에서도 열성적인 구도자는 최소한 매일 몇 분씩은 자기 주시를 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가능하면 최소한 아침 저녁으로 10분씩은 자기 주시를 하는데 바쳐야 한다.
스리 바가반은 <아루나찰나에 바치는 혼인화만> 제44연에서 그런 정규적인 일과 수행을 권장하면서, "'자기 쪽을 향하여, 매일 안으로 향한 시선으로 그대 자신을 보라. 그러면 그것(실재)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당신은 말씀하셨지요. 오, 아루나찰라!"라고 노래한다.
그런 정규적인 수행을 한동안 할 수 있으면 자기주시가 더욱 더 친숙해질 것이고, 그러면 일상 활동의 와중에서도 한 가지 활동이 끝나고 다음 활동이 시작되기 전에 잠시 틈이 날 때마다 우리의 주의를 2인칭과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잠시 틈이 날 때마다 우리의 주의를 1인칭으로 돌리려고 (나는 누구인가?하고)노력하면, 하루가 끝날 때 쯤이면 비록 간혈적이기는 해도 많은 시간을 자기주시에 바친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간혈적인 주시도,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앉아서 수행할 때, 곧 우리의 수행을 방해하는 어떤 외부적 장애도 없을 때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단 몇분도 단절 없는 자기주시를 유지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오랜 습으로 인해 마음은 아주 당연히 2인칭이나 3인칭 대상들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주의가 밖으로 향할 때마다 구도자는 다시 그것을 1인칭 쪽으로 돌리려고 노력한다. 자기 주시가 느슨해지면 다시 그것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이 과정은 거듭 거듭 되풀이 될 것이다.
만일 진아를 알려는 사랑이 부족한 탓에 그 구도자의 마음이 약하면 자기주시가 느슨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날 것이고, 그럴 경우(내면적) 분투가 수반되어 마음이 피로해 질 것이다. 이처럼 계속 자기주시를 회복하려고 분투하지 말고, 1인칭에 주의를 고정하려는 처음의 시도가 불안정해지면 즉시 한 동안 마음을 이완 한 다음 다시 새롭게 시도해야 한다. 이와 같이 간혈적인 시도를 하다 보면, 매번 시도할 때마다 어떤 새로운 힘과 더 정확한 주시의 명료함이 있음을 발견하기 될 것이다.
우리가 압력저울을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면 처음에는 다이얼이 10 킬로그림의 압력을 가리킬지 모른다. 그러나 오랜 시간 그 압력을 유지하려고 하면 다이얼은 압력이 점차 느슨해지고 감소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반면에 압력을 놓아주었다가 잠시 쉰 뒤 다시 새로운 힘으로 누르면, 다이얼은 10킬로그램보다 조금 더 많은 수치를 보여줄 것이다.
자기 주시도 그와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주시를 유지하려고 분투하면 주시의 밀도와 명료함이 점차 느슨해지고 감소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기 주시가 느슨해지는 것을 발견하는 즉시 이완해 주면, 그리고 잠시 쉬고 나서 새롭게 진아에 주의를 고정하면, 그 새로운 시도는 더 큰 밀도와 명료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이려고 애쓰면서 쓰는 시간의 길이라기 보다는, 매번 새롭게 시도할 때의 열의와 밀도이다.
수행하는 시간 동안은, 2인칭과 3인칭 대상에 집중되어 있던 우리의 주의가 이제 180도 방향을 돌려서, 말하자면 1인칭에 그 자신을 집중시켜야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우리의 주의가 5도, 10도 혹은 15도 밖에 돌아가지 않을지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강력한 원천- 즉, 세간의 대상을 향하는 우리의 원습 혹은 미세한 욕망이라는 원천에 의해 그 방향 돌림이 저항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1인칭 쪽으로 돌아서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세간습(世間習)이라는 이 원천이 우리의 마음을 다시 2인칭과 3인칭 대상들로 끌어 당기려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방향을 돌릴 수 있는 각도의 크기는 세간적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무욕의 확고함과, 진아를 알려는 열망의 힘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한 무욕과 헌신이 우리에게서 늘어나려면, 정규적으로 자기주시를 수행하고, 스리 바가반께 열심히 기도하고, 우리에게 거듭하여 다음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사람이나 책들을 부단히 가까이 하여야 한다.
"진아를 알아야만 우리가 진정한 그리고 지속적인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진아를 모르는 한 우리는 끝없이 불행을 자초하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삶에서 우리의 첫번째이자 으뜸가는 임무는 진아를 아는 것이다. 다른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끝나고 말것이다. "
우리의 무욕과 진아를 알려는 열망이 이와 같이 스승에 대한 기도, 그의 가르침에 대한 공부(聽聞)와 성찰, 그리고 자기 주시의 수행에 의해 증장되면, 주의를 1인칭에 기울이는 능력도 증장될 것이고, 결국 매번 새로이 시도할 때마다 그것을 90도, 120도, 심지어 180도 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주의를 자기 쪽으로 돌리는 능력이 이처럼 증장되면, 우리는 활동을 하고 있을 때에도 자기자각의 희미한 흐름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의 마음, 말 혹은 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그에 방해받지 않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자신의 모든 활동의 저변에 늘 있는 '내가 있다'는 느낌을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희미한 자기 자각의 흐름을 부단한 자기주시의 상태로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고 싶을 때에만 그것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단한 자기주시의 상태, 벗어남이 없는 진아안주의 상태는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진아를 알려는 큰 사랑으로 이와 같이 거듭거듭 자기주시를 수행하는 구도자들에게는 스승의 은총이 점점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이글거리는 불과 불어오는 바람이 합쳐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아지에 대한 이글거리는 사랑의 불과 불어오는 스승의 은총의 바람이 합쳐지면, 크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구도자가 새롭게 자꾸 시도하다 보면 어느 때 자신의 주의를 자기 쪽으로 완전히 180도 돌릴 수 있게 될 것이고(즉, 어떤 2인칭이나 3인칭에 대한 최소한의 자각에 의해서도 전혀 오염되지 않는, 완전히 명료한 자기자각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때 그는 어떤 큰 변화가 자연발생적으로,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제까지 자기 쪽으로 돌리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써도 2인칭과 3인칭들 쪽으로 늘 도로 빠져 버리곤 하던 그의 주의력이 이제는 어떤 강력한 손아귀의 장악력에 붙들리는데, 그것은 그의 주의가 다시 어떤 2인칭이나 3인칭 쪽으로 향한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 장악력이 은총의 장악력이다.
은총은 늘 우리를 돕고 인도해 왔지만, 이처럼 우리가 그것의 장악력에 붙들릴 때만 우리가 완전히 그것의 먹이가 된다. 일단 주의를 자기 쪽으로 완전히 180도 돌릴 수 있게 되면 틀림없이 이 은총의 장악력에 붙들리며, 이때는 그것이 우리를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우리가 다시는 2인칭과 3인칭 대상들 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마음이 이와같이 은총의 장악력에 붙들리고, 그리하여 자신의 근원에 영구히 빠져 버리는 이 상태를 일러 진지체험, 진아 깨달음, 해탈 등이라고 한다. 이것만을 부단한 진아주시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의심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때는 마음이 삼매에 영구히 빠져 있는가? 그것은 다시 나와서 세간의 모든 2인칭과 3인칭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바가반 스리 라마나조차도 근 54년을 진아 깨달음 상태에서 보냈고, 그 시간의 대부분을 2인칭과 3인칭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인 것이 사실 아닌가?" 그렇다. 스리 바가반이 늘 진아 깨달음 상태에 머물러 있기는 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세간의 대상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전혀 자각력이 없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머물러 있다는 것은 삼매의 유일한 표시가 아니다. 어떤 진인들은 진아 깨달음을 얻은 뒤 몸과 세계를 완전히 망각한 채 평생을 보내기도 하지만, 모든 진인이 반드시 그런 상태로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진아 깨달음을 성취한 뒤 육체의식이 (또 결과저으로 세계의식이) 돌아오는 것은 그 몸의 발현업에 따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일순간에 혹은 몇 시간이나 몇칠 뒤에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돌아오는 경우라 해도, 그것은 2인칭이나 3인칭에 대한 앎으로서 경험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인은 몸과 세계를 2인칭과 3인칭들 - 그 자신이 아닌 대상들- 로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무한하고 불가분한 진아로서 경험한다.
우리가 구도자인 한 자신의 몸이라는 유한한 형상을 자기로 착각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무한한 진아의 나머지 부분은 세계로서 - 2인칭과 3인칭의 집합체로서 -경험한다.
그러나 진아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는 자신이 무한한 전체임을 체험하므로, 우리가 이전에 자기가 아닌 것으로 느끼던 모든 2인칭과 3인칭들이 참으로 자기 자신의 진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진인이 (남들의 견지에서는) 2인칭과 3인칭 대상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때도, 그는 (그 자신의 견지에서는) 진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활동에 종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는 부단한 자기 주시의 자연적 상태 안에 늘 안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단한 자기주시는 진아 깨달음 상태에서만 가능하지, 수행의 상태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수행기간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아지를 성취하려는 갈수록 커지는 사랑을 계발하고, 자신의 주의를 자기 쪽으로 180도 돌리려는 간헐적이지만 거듭된 시도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부단한 자기 주시가 자연스럽고도 애씀 없는 과정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스리 사두 옴 지음, 대성 번역< 스리 라마나의 길>-
'성인들 가르침 > 라마나 마하리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탐구수행의 핵심 (0) | 2019.08.14 |
---|---|
자아탐구수행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와 수행자세를 지적함 (0) | 2019.08.01 |
자기탐구기법에 대한 비유적 설명 (0) | 2019.07.17 |
자기노력 (0) | 2019.07.06 |
라마나 마하리쉬의 첫 깨달음 체험(1) (0) | 2019.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