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20. 20:38ㆍ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77회]
[원 문]
天之道 猶張弓者也
천지도 유장궁자야
高者抑之 下者擧之
고자억지 하자거지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유여자손지 부족자보지
故天之道 損有餘而益不足
고천지도 손유여이익부족
人之道則不然
인지도칙불연
損不足以奉有餘
손부족이봉유여
孰能有餘 而有以取奉於天者乎?
숙능유여 이유이취봉어천자호?
唯有道者乎
유유도자호
是以聖人 爲而弗有
시이성인 위이불유
成功而弗居也
성공이불거야
若此其不欲見賢也
약차기불욕견현야
[한글해석]
하늘의 道는 세게 당겼다가 쏘는 활과 같은 것이며,
높은 쪽은 억누르고, 낮은 쪽은 들어 올리는 것이오.
그러므로 하늘의 도는
남은 것에서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태주는 것이외다.
인간의 道라는 것은 그렇지 않소.
(오히려) 남은 것에 더 보태기 위하여 모자른 것에서 덜어내고 있소.
누가 능히 남은 것이 있으면,
하늘의 도에 따라서 베풀어 지기 위해서 그대로 지니고 있겠소?
오직 도인 만이 그럴 수 있소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행하되 소유함이 없으며
공을 이루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소.
이와같이 성인은 자신의 어짊을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외다.
[해 설]
이장은 왕필본에서 77장, 백서본에서는 43장이며, 곽점본에는 없는 장이므로 후대에 추가된 문장인 것 같읍니다.
기존에 출판된 해석서와 비교해서 본 해석내용도 거의 비슷하게 되었지만, 왕필본의 원문이 한두문장이 달라져 있는 부분은 기존 해석서와 약간 다르게 해석되었읍니다.
간단하게 설명을 간추려 보면,
노자가 도덕경에서 가르쳐 주는 무위자연의 道를 하늘의 道라고 말하며,
이 하늘의 도는 활을 세게 당겼다가 놓는 순간에 활줄의 가운데는 강한 힘으로 앞으로 밀고, 양쪽 끝은 반대로 들어 올리는 것처럼 작용과 반작용이 균형있게 조절된다는 것입니다.
즉 여유있게 남는데는 덜어서 모자르는데 보충하여 저절로 균형을 잡으며 조화롭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道라는 것은 노자의 무위자연의 도 이외의 다른 학파를 말하며, 주로 공맹자의 유학에 대하여 언급한 것 같읍니다. 이 인간의 도는 하늘의 도와는 달리 모자른 것에서 오히려 덜어서 남는 것에 더 보태주는 인의적인 행위를 가한다고 비난하고 있읍니다.
이렇게 인간의 도는 남고 여유있는 것에다 더 보태주기 위하여 모자른 것에서 덜어 내므로 항상 여유가 없으므로 끊임없이 인의적인 행위의 수레바퀴를 계속돌릴 수 밖에 없지만,
무위자연의 도인은 내면이 항상 여유있게 남아 있었서,그 여유있음이 저절로 베풀어지도록 하늘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즉 인의적인 행위를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인은 행위를 하여도 스스로가 행위자라고 여기지 않으며, 결실을 이루어도 그 공에 집착하지 않으며,스스로 도를 깨쳤다거나 지혜가 있다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장은 마치 왕필본 38장의 높은 덕과 낮은 덕을 비교하 듯이, 하늘의 도와 인간의 도를 비교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의 도가 본래 도라는 것을 넌즈시 주장하고 있는 것 같읍니다.
이제 문장별로 자세히 해석해 보겠읍니다.
天之道 猶張弓者也(천지도 유장궁자야); 하늘의 도는 세게 당겼다가 쏘는 활과 같은데,
猶; 같다. 張; 세게 당기다,弓;활, 者; ~
<天之道>는 노자의 가르침인 <無爲自然의 道>를 "하늘의 도"라고 표현한 것이며, 이 노자도덕경이 바로 그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반면에 아래 문장에 나오는 <人之道>는 공자,맹자가 주장하는 인간과 사회의 윤리를 중심으로 하는 <人本主義의 道>를 말합니다.
곽점본이나 백서본 초기에 씌어진 문장에는 <天之道>니 <人之道>니 하는 구분이 없지만, 백서본 후기부터는 아마도 수많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들이 많이 출현하여 저마다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진짜<道>라고 주장하므로, 노자도덕경을 중심으로한 도를 공부하는 도인그룹들이 자기네들의 도를 <하늘의 도>라고 스스로 이름짓고, 기타 공맹자의 유학이나 기타 철학들은 <人之道>라고 차별화하여 구분한 것 같읍니다.
<天之道>는 <무위자연의 도>이며, 인의적인 것이 전혀 없이 자연의 무위를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猶張弓者也>에서 <猶>는 "~같다, ~처럼"이며, <張>은 "세게 당겨서 쏘는~"이라는 뜻입니다.<弓>은 활을 말합니다.
따라서 "세게 당겨서 쏘는 활과 같은 것인데~"라고 해석이 됩니다.
여기서는 화살을 장진하고 활을 최대한 뒤로 잡아 당겼다가 손가락을 놓으며 화살이 발사되는 순간을 말하고 있읍니다. 왕필본의 원문은 백서본과 같읍니다.
高者抑之 下者擧之(고자억지 하자거지); 높은 쪽은 누르고, 낮은 쪽은 들어 올린다.
高; 높다, 抑; 누르다. 擧;들어 올리다.
활의 가운데는 활과 활줄의 견격이 높고, 활의 양쪽 끝은 활과 활줄의 간격이 낮읍니다.
활을 쏘기 위하여 화살을 장진하고 활줄을 최대한도로 뒤로 잡아 당겼다가 화살을 놓는 그 순간에는 활줄의 맨 가운데는 화살을 밀어내기 위하여 앞으로 누르는 압력이 최대가 되며, 활의 양쪽 끝머리는 휘었던 것이 원래대로 들어 올려지면서 화살이 순간적으로 활에서 벗어나서 발사됩니다.
그래서 활줄과 활 사이가 높은 가운데 쪽은 당겼던 압력이 세게 가해지고, 활과 활줄 사이가 낮은 양쪽 끝머리는 반대로 당겼던 힘이 풀려 나므로, 화살이 쏜살같이 앞으로 발사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같은 활 안에서도 활 가운데와 양끝은 힘이 정반대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즉 화살이 하나 발사되는데 필요한 힘은 활 안에서는 작용과 반작용이 동시에 균형을 맞추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아주 단순한 움직임 하나일지라도 거기에는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두가지 힘이 항상 균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은 정(正,+)과 역(逆,-)의 조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주 단순하게 상징적으로 묘사한 말입니다.
한 움직임(작용)이 발생할 때에 동시에 반대 움직임(반작용)도 같이 생기는데, 이것은 거친 물질의 힘도 그렇지만, 빛같은 미세한 파동의 작용도 마찬가지입니다. 파동이란 작용(+)과 반작용(-)이 순차적으로 교대로 반복되어 역동적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하며, 이 현상세계의 기본적인 본질인 의식자체가 바로 이러한 미세한 파동의식인 것입니다.이 세상은 모두가 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그 의식자체는 미세한 파동성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 파동성 의식이 아주 순수하여 균형이 맞고 고르다면 순수한 의식으로써 전체 우주에 공통적인 자성으로써 편재하는 것이며, 그 파동성의식이 오염되어 완전히 불균형적으로 찌그러져 있고,수시로 변화되는 것이라면 개체성의 일시적인 망상적 의식파동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자연에 의해서 저절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은 작용과 반작용, 상호 간섭작용이 전체적으로 저절로 조화롭게 움직이고 있읍니다. 설령 사람의 감각능력으로는 무질서하고 어수선해 보이겠지만, 그것은 사람의 인지능력이 한계가 있을 뿐이고, 자연 전체적으로는 나름대로 복잡하지만 균형과 조화의 전체적인 움직임인 것입니다.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유여자손지 부족자보지); 남아있는 것은 덜어내고 모자란 것은 보태준다.
有;있다, 餘;남는다,損; 덜다. 足;과도하다, 補;보태다.
자연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은 바로 남아 있는 것은 저절로 덜어지고 모자란 것은 저절로 보충되는 균형과 조화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마치 물이 높은 데서 흘러서 낮은데로 채워주고, 낮은 곳에서는 수증기로 하늘로 증발되었다가 다시 비로 떨어지듯이 모든 자연의 움직임이란 남는 것과 모자른 것의 상호간에 균형을 맞추어 가면서 조화롭게 움직이는 전체적인 작용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저절로 움직이는 힘입니다.
故天之道 損有餘而益不足(고천지도 손유여이익부족); 그러므로 하늘의 도는 남은 데서 덜어내고 부족한 것에 더해준다.
그러므로 천지도란 자연 그대로의 도를 말하는 것이죠. 여기서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철학을 말합니다.
노자의 도는 이러한 남는 것에서 모자른 곳으로 저절로 균형을 잡는 조화의 무위적인 작용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人之道則不然(인지도칙불연); 인간의 도는 그러하지 않다
則; ~이면, 然; 그러하다.
<人之道>는 인의적인 도, 자연 본위가 아닌, 인본주의 철학, 즉 대표적인 것이 공맹자의 <儒學>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읍니다.
유학을 비롯한 인본주의 철학은 인간의 심성과 행동을 의도적으로 교정해서 도덕심을 기르고, 사회를 도덕심으로 결합하여 정치를 안정화하여 이상사회를 이루게 한다는 것입니다만, 노자의 무위자연도덕과는 다르게 인의적으로 만든 개념으로 인간의 도덕심을 억지로 주입하여 무한한 자연잠재능력의 인간심성을 협소한 개념의 인의적인 울타리로 제한한다는 것이 노자의 무위자연철학측에서 비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損不足以奉有餘(손부족이봉유여); 남은 것에 바치기 위하여 모자른 것에서 덜어낸다.
以; ~위해여, 奉; 바치다.
자연 그대로 놓아두면 모자른 것은 남은 데서 저절로 보충하는데,
인의적인 도덕은 의도적으로 남는 것에다 더 보태주고 모자른 것에는 덜어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교같은 공맹자사상은 사람위주이고, 정치사회가 안정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우선 국가의 지배자인 왕이나 고관대작등 신분이 높은 귀족들이 1차로 혜택을 보는 자이고, 오히려 서민이나 노예,종, 여자등 사회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더욱 복종과 헌신을 강요당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득 세력을 보호하기 위한 보수적인 편향성을 가진 정치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한예를 들면, 현 중국의 권력층에서 유일한 기득세력인 공산당 정권이 요즘 공자사상의 위대함을 내세우며 선전하는 것은 공자의 인의예충(仁義禮忠)철학이 훌륭해서 본받을려고 그러는 것이라기 보다는, 현재 정치적 기득권을 쥐고있는 공산당이 앞으로도 장기적인 면에서 안정되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기득권유지를 위한 도구로서 공자의 전통유교사상을 적절하게 이용해 중국국민의 국수(國粹)주의를 집속(集束)해 보려는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공산당 사회주의와 유교의 충효사상이 결합하면 수억명의 중국인민이 강력하게 단합할 수 있는 중국 중화민족 국수주의를 형성하여 그 중심에서 공산당이 독재권력을 안정되게 유지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읍니다.
따라서 공맹자의 유교철학같은 경우는 인(仁),의(義),예(禮),충(忠)이라는 기본적인 철학개념으로 사회질서를 안정되게 유지하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고 있는 기득권 보수세력을 안정되게 보호해주기 위한 제도와 방편으로써 그 시대상황에 맞게 인의적으로 만든 것이며, 일종의 서민 백성들을 인의적인 어떤 보수적 질서 안에 가둬두기 위한 족쇄라고 보는 것이 노자의 무위자연 도를 숭상하는 측에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미 물질적으로 타락해 있는 인간의 각개 심성을 인의적으로라도 우선적으로 정화시키고 이러한 정화된 심성을 바탕으로 사회질서를 안정시켜야 된다고 하는 인간사회의 시급한 도덕규범의 질서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자면, 비록 무위자연을 바탕으로 하는 노자의 도덕철학의 그 심오함과 광대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임시적으로 인간심성을 닦는 방편으로는 공맹자의 유교적 인의예충(仁義禮忠)철학이 현실적으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즘 0.1초를 다투는 IT시대 현대인의 자유분망한 자아표출시대에 과연 고리타분한 이천년전 고대중국의 공맹자 철학에 대하여 소수의 인문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연구용 관심꺼릴는 될 수 있을지언정, 실질적으로는 대중적인 주목을 받을 만한 매력요소는 별로 없는 것이죠.
오히려 극도의 현대과학문명 이기 속에서 물질적 욕망에만 매달려서 바짝 메말라 있는 인간심성에 간절하게 필요한 철학이라면 좀 역설적이긴 하지만, 바로 인간심성이 '있는 그대로'의 무위자연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노자의 가르침인 이 도덕경이 현 시대 건조한 과학첨단시대의 사람들 마음에 다소나마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신선한 옹달샘 역활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읍니다.
孰能有餘 而有以取奉於天者乎?(숙능유여 이유이취봉어천자호); 누가 능히 남는 것이 있으면, 하늘의 도에 따라 베풀어지기 위하여 그대로 지니고 있겠는가?
孰;누가, 能;능히 , 有餘; 남는 것이 있다. 有; 가지다,지니다. 以; 위하여, 取;돕다, 奉; 보태다,바치다. 於;~에 따라서, 天者; 하늘의 도, 乎; ~하는가?
이 말은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바꾸자면,
<누가 능히 자연의 움직임에 따라서 무위자연적인 법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와 같읍니다.
남는 것을 하늘의 도에 바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무위자연에 따라 그대로 둘 뿐이지,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억지로 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재산이든 음식이든 여유가 있으면 그것이 자기 개인 소유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노력해서 이루어 낸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쓸수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위의 도를 닦은 이들은 개인이라는 느낌이 없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도 없고, 자기가 행위자라는 관념도 없으므로 자기의지대로 무엇인가를 하지도 않읍니다.
도인은 무엇이든 하는 일 자체가 개인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행위의 일부분으로써 저절로 행해진다고 믿읍니다.
도인은 내면적으로 전체가 되어 커단란 여유가 있는데도 밖으로 그 빛을 드러내지 않고, 그 능력을 의도적으로 쓰려고 하지도 않으므로,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그 보이지 않는 진리의 빛을 전 세상에 골고루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각판본마다 원문이 조금씩 다른데, 왕필본의 원문은 <孰能有餘以奉天下>로 되어 있으며, 대략 해석은 "누가 능히 남는 것으로써 천하를 받들 것인가?"라고 되어 있읍니다만, 백서본의 <天者>를 왕필본에서 <天下>로 바꾼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백서본의 <天者>는 <天之道>를 가리킵니다.
唯有道者乎(유유도자호); 오직 도인 만이 있을 수 있다.
도인은 아무리 여유있게 남아 있는 것이라 해도 자기 의지대로 행하지 않고 자연의 무위적인 흐름에 따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는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人之道>의 유학(儒學)같은 무리들에서는 모든 일을 인의적(人依的)으로 만든 개념에 의하여 유위적(有爲的)으로 행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읍니다.
是以聖人 爲而弗有(시이성인 위이불유); 그러므로 성인은 행하되 소유함이 없으며
<爲而弗有>는 "행하되 자기것이라는 소유감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자기가 행위자라는 주인공의식이 없이 무위적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연이 햇빛을 주고 비를 뿌리며 온갖 초목을 기르지만 저절로 그렇게 행해지는 것과 같읍니다. 어떤 해석서는 '성인은 행하되 功을 소유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한 곳도 있읍니다만, 功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음 문장에서 '功에 머무르지 않는다'와 같은 말입니다.
이문장은 왕필본에서는 <聖人爲而不恃>이며, 해석은 " 성인은 이루고도 자랑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읍니다.
成功而弗居也
(성공이불거야); 공을 이루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공적(功積)을 이루지만, 자기가 이루어논 공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자연은 온갖 일을 이루어 놓지만 전혀 그 결과에 관여않는 것과 같은 것이죠.
若此其不欲見賢也(약차기불욕견현야); 이와같이 성인은 자신의 현명함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성인은 행하되 행함이 없이 무위적으로 행하고, 또한 행하되 자기것이라는 소유감이 없으며,자기가 행위자라는 표시도 내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거들떠 보지도 않듯이, 자신의 내면에서 빛나는 지혜의 빛을 밖으로 일부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짜 도인은 속세에서 평범한 범부의 모습으로 일상을 살면서도 내면에는 지혜의 빛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깨달은 도인인지 보통 평범한 범부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겠죠.
어떤 선승이 도를 깨달은 후에 승려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속세로 나와서 어떤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 평범하게 살았읍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도가 깊은 어떤 선승이 그 산골 마을을 지나다가 그 농부가 크게 깨친 도인이라는 것을 겉모습만 보고도 알아채고, 그의 앞에 가서 큰절을 올리면서 가르침을 청했읍니다.
그러자 그 농부가 하는 말이 "허~ 이것 참, 내가 아직 도가 완전히 익지가 않아서 설익은 냄새를 풍기는 모양이구만~"하고 중얼거리며, 그 선승이 인사하는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몇칠후에 아무도 모르게 다시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는 일화가 있읍니다.
이와같이 진실로 푹 익은 도인은 자기가 깨달았다고 남에게 드러나게 말하지도 않으며, 어떤 특별한 행동이나 재주로 남의 시선을 끌려고 애쓰지도 않읍니다.
이번 77장에서 우리는 무위자연의 도는 저절로 균형과 조화를 맞추며,
인간위주의 인본(人本) 도덕개념은 인의적인 행위로 인하여 오히려 자연의 균형과 조화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道를 닦은 도인은 자연을 닮아서, 행위를 해도 자기가 행위자라는 의식이 없이 무위적으로 행하며, 행위의 결실이 있어도 그것에 초연하고, 자기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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