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5. 12:30ㆍ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75회]
[한문 원문]
人之飢也 以其取食稅之多也
인지기야 이기취식세지다야
是以飢
시이기
百姓之不治也 以其上有以爲也
백성지부치야 이기상유이위지
是以不治
시이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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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之輕死 以其求生之厚也
민지경사 이기구생지후야
是以輕死
시이경사
夫唯无以生爲者
부유무이생위자
是賢貴生
시현귀생
[한글 해석]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은
세금으로 많이 뺏앗아 먹기 때문이오.
그래서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이외다.
백성들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군주가 (백성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외다.
-------------------------------
사람들이 천하게 죽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 "에서 지극한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천하게 죽는 것이외다.
대저 오직 "살아있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무(無)라고 여기게 되면
이러한 현명한 지혜가 삶을 고귀하게 하는 것이외다.
[해 설]
이 장은 백서본에서는 40장, 왕필본에서는 75장에 해당하며, 곽점본에는 없읍니다.
이 75장은 내용이 다른 상,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백서본에서는 상,하 두 부분이 분명하게 점으로 분장이 표시되어 있지만,
왕필본에서는 한장으로 통합되어 있읍니다.
따라서 왕필본에서는 상,하 두부분의 의미를 서로 맞추려고 하단부 문단은 문장을 한두글자 고친 것 같읍니다.
그러나 상,하 부분은 의미적으로 완전히 별도로 떨어져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번 해석은 상(上)문단은 비슷하지만,
하(下)문단은 기존의 다른 왕필본 해석서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이 되었읍니다.
간단히 설명을 요약해 보자면,
상(上)문단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관한 문제으로서,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나라에서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둬가기 때문이며,
백성들이 다스려지기가 어렵게 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백성들보다 높다는 자만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반감을 사기 때문에 다스리기가 어렵게 된다고 충고 하고 있읍니다.
아마도 예비지도자나 왕의 자제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소양이나 교양을 가르치는 내용인 것 같읍니다.
하(下)문단은 위의 상문단과는 의미적으로 전혀 연결이 안되고 별도로 떨어진 문장입니다.
사람들이 천하게 살다가 죽는 것은 외물에만 가치를 두고 평생동안 그 외물만 추구하다가 죽기 때문에 값싸게 생을 살다가 죽는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반대로 이 현상세계에서의 삶이란 꿈과 같이 허망한 무(無)일 뿐이라는 것을 깨치면 그것이 아주 고귀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즉 삶속에서 외면의 물질적 가치만 추구하면 허망하고 경박한 삶을 살다가 죽지만,
내면의 자기본성에 가치를 두면 고귀한 도인의 영원한 삶을 산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제 각 문장별로 자세히 검토해 보겠읍니다.
人之飢也 以其取食稅之多也(인지기야 이기취식세지다야) ;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은 나라에서 세금을 많이 뺏앗아 먹기 때문이오.
飢;굶주리다. 以; 때문에,其;(여기서는)나라,관리 또는 군주를 지칭. 取; 취하다,가지다,食;먹다,먹이,稅;세금.
<人之飢也>;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은~"
<以其取食稅之多也>; "나라에서 세금을 많이 빼앗아 먹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其>는 "나라를 다스리는 관청,군주"을 지칭하는 대명사입니다.
<取食>은 "빼앗아 먹는다."로 해석이 되며,
<稅之多>: "세금을 많이~"입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나라에서 너무 많이 세금을 빼앗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왕필본의 원문은 <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로 되어있고,
기존 해석서들이 해석한 내용을 보면,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그 위에서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읍니다.
是以飢(시이기); 그래서 굶주리는 것이오.
상부에서 세금으로 너무 많이 뺏앗기 때문에 백성들이 굶주린다는 것입니다.
왕필본 원문은 <是以饑> "그래서 굶주리게 된다" 로 되어 있읍니다.
百姓之不治也 以其上有以爲也(백성지부치야 이기상유이위지); 백성들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군주가)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오.
治; 다스리다, 以: 때문에, 其; (여기서는 군주,관리)지칭대명사. 上有; (백성들) 위에 있다. 以爲; ~인것처럼 생각하다,~인것처럼 행동하다.也;어조사.
<百姓之不治也>; "백성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라고 해석됩니다.
<以其上有以爲也>; " 군주가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행동(생각)하기 때문이오."라고 해석되는데,
맨 앞의 <以>는 "때문에" , <其>는 여기서는 "군주나 왕"을 지칭합니다.
<上有>는 "위에 있다", 라고 해석되고, <以爲>는 "~라고 여기다, ~라고 생각하다, ~라고 생각컨데,~인것처럼 행동하다"등등으로 해석이 될 수 있는데,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이 <以爲>라는 글자에서 해석내용이 제 각각 다르게 해석하는 것 같읍니다.
이 말은 군주가 무위자연에 따르는 도로써 '있는 그대로'자연스럽게 다스리지 않고,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며,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을 휘둘를 수 있다는 자만감을 가지고 백성들을 억지로 제어하려고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군주의 말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필본 원본은 <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해석은 " 백성을 다스리기 힘든 것은 그 위에서 억지로 일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왕필본 원문은 <不治>를 <難治>로 바꾸었는데, "다스려지지 않는다"와 "다스리기 어렵다"는 그 의미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게 느껴집니다.
또한 백서본의 <以其上有以爲也>가 <以其上之有爲>로 바꾸어져서,
해석내용도 완전히 다르게 바뀌었읍니다.
是以不治(시이불치); 그래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오.
백성들이 군주 마음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군주 자신이 백성들보다 지위가 높다는 생각을 지니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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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장들과 아래 문장들은 내용이 전혀 다른 문장들입니다.
위의 문장들은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참고하라는 국가경영에 대한 충고의 글이며,
아래 문장들은 개인에게 있어서 삶을 어떻게 가치있게 살수 있는가 하는 가르침입니다.
백서본의 경우는 위의 문단과 아래 문단 사이에 분장을 표시하는 . (점)이 표시되어 분명하게 다른 장이라는 것을 표시하였으나 왕필본부터는 그 분장 표시가 없어서 대부분의 기존 해석서들이 통합해서 해석을 함으로써, 아래 문단이 좀 조화가 맞지 않는 어색한 해석내용이 된 것 같읍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명하게 따로 분리해서 해석을 했읍니다.
民之輕死 以其求生之厚也(민지경사 이기구생지후야); 사람들이 천하게 죽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에서 지극한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오.
民: 사람들, 輕; 가볍다, 천하다, 가치없다. 求; 구하다,탐하다, 生; 삶 , 厚; 두껍다, 지극하다.진하다, 맛있다,즐겁다,친근하다.
<民之輕死>; "사람들이 천하게 죽는 것은~" 라고 해석이 되는데, <民>은 여기서 "백성"이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일반적인 "사람들"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輕死>는 "가벼운 죽음"이라고 읽을 수도 있으나, 그 뜻은 "가치없이 살다가 천하게 죽는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다음 문장과 의미적으로 잘 이어집니다.
<以其求生之厚也>에서 <生之厚>는 "살아있음에 대한 지극한 가치"라고 해석이 되며, <求>는 "탐하다, 추구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적절하게 문장이 구성됩니다.
<生之厚> "살아 있음에 대한 지극한 가치"라는 것은 꼭 감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쾌락 뿐 아니라, 어떤 학식이나 개념에 대한 의미, 권력이나 재물, 외모 같은 것에 대한 가치 등, 이원화된 현상세계의 삶 안에서 어떤 대상에 지극한 의미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여 그것을 추구하고 집착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자기가 살아있다는 생생한 맛을 유일한 가치로 여기는 것인데,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의 삶이 거의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어떤 개념이나 대상에다 모종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또한 감각적인 즐거움과 외물등에 대하여 지극한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여, 그것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탐하다 보면 어느새 늙어서 죽음이 가까이 다가 서게 됩니다.
살아 있을 때에 자기의 학식이나 권력,지위등 아무리 귀중한 가치가 있더라도 죽으면 모두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죠.
따라서 삶 속에서 어떤 즐거운 가치와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이원화로 갈라져 있는 꿈 속에서의 일처럼 허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자기 생을 되돌아 보는 사람도 드물지만, 만일 자기를 되돌아 보게 된다면 삶이라는 것이 겉모습만 쫏아 다니다가 허무하게 세월만 보냈다는 후회스러움이 있을지는 몰라도, 실은 그 죽음 직전의 후회스러움도 단순히 외적인 가치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진정한 자기 내면의 가치를 일찍암치 알았다면 애당초 삶속의 외물에 대해서 지극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지도 않았고, 그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좀 더 내면을 향하는 삶을 살아왔을 겁니다. 즉 탄생과 죽음을 초월하는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살아있는 동안에 관심을 가졌다면 적어도 죽는 순간에 삶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공포를 가지고 비참한 마음으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내면의 가치를 안 상태에서 삶을 살아 왔다면 비록 완벽하게 깨닫지는 못해도,죽음 앞에서 자기생을 아쉬워하거나 후회스러운 미련은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가치를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에게는 육체의 죽음이란 귀찮은 허물을 벗어버리고, 바로 "지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영혼의 "진정한 휴식"이기 때문입니다.
왕필본 원문은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로 약간 바뀌어 있고,
해석은 " 백성들이 죽음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은 그 위에서 너무 잘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왕필본은 아마도 맨 위의 두문장과 내용을 의미적으로 억지로 연관시키기 위해서 <上>을 더 삽입한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백서본에서 말하는 원래 뜻과는 너무 멀어져 버린 것 같읍니다.
是以輕死(시이경사) ; 그래서 비천하게 죽는 것이오.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감각적인 쾌락이나 외물에 대한 허황한 가치만 추구하다가 죽으면 비천하게 죽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夫唯无以生爲者(부유무이생위자); 대저 오직 "살아있다는 것"이란 아무것도 아닌 무(無)라고 여긴다면
夫;대저, 唯;오직 , 无; 아무것도 아님.없음, 以; ~을 ~하다. 生;태어남, 삶, 爲;여기다,생각하다. 者; 사람,~이면,
<无以生>은 " 삶이란 無이다" 즉 "삶이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번역됩니다.
따라서 전체 해석은 <대저 오직 살아있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無라고 생각한다면>라고 해석이 되죠. 살아있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무(無)라고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전체>가 되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의식의 이원적인 상태에서 대상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며, 깨달은 사람에게는 마치 환상과 같은 꿈처럼 실체가 없읍니다.
육체가 자기라고 굳게 믿는 육체 동일시 상태에서는 육체의 삶이 개체로서 실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삶 속에서 즐거움과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추구하며 집착하는데 인생을 모두 소비하지만, 그러나 육체 동일시에서 벗어난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마치 한순간 꿈결처럼 환상처럼 허황해 보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무(無) 또는 공(空)이라고 여기므로써 삶 속에서 어떤 집착도 욕망도 없읍니다. 자기가 무(無)나 공(空)이라고 여기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전체성"이 된 상태를 말하며, 모든 조건화와 속성으로부터 풀려난 상태를 말합니다.
반면에 자기가 작은 육체로써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일개 작은 개체로써 한정적인 속성에 제한되는 조건화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죠.
따라서 도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구도자는 이 나타난 현상세계와 자기의 몸, 마음이 이원화로 나눠진 의식의 객관 대상으로 보면서, 그러한 주,객으로 나눠진 이원화 대상은 의식이 그린 환상의 그림자일 뿐이지 아무것도 없는 無라는 것을 명상함으로써, 보는 자와 대상이 하나로 합일되어 도의 본체에 가까이 접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기본적인 <의미>는 비슷하지만, 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는데,
<无以生>은 "生을 无로 하다"라고 직역되지만, <生>이란 '탄생'으로 해석을 해서,원래부터 <탄생이란 없다>라고 표현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无以生爲者>는 "태어남을 無(없음)라고 여긴다면"이라고 직역이 되는데,
다시 말하면 "자기는 태어난 적이 없다고 여긴다"라는 말입니다.
궁극의 도를 깨치면 육체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며, 다만 사람의 감각을 통해서 육체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의식의 작용 때문에 감각과 오원소(지수화풍공)의 조합에 의해서 대상화된 현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라는 원리를 깨치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가 육체라고 여기는 육체 동일시가 사라지고, 전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람이 태어났다는 탄생은 자기가 육체로서 태어났다고 여기는 것이며, 만일 자기가 육체 동일시에서 벗어났다면,육체라는 것은 원래부터 없는 것이므로 육체의 탄생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어난 적이 없다라고 여긴다>라는 말은 자기가 육체라고 생각하는 육체 동일화에서 벗어나서 전체에 편재된 절대본체에 안주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육체 동일화 조건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를 깨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난 적이 없다>라는 말과,
<삶이란 아무것도 아닌 無라고 여긴다>는 말은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읍니다.
이 말은, 삶이란 허무한 꿈과 같은 의식의 환상일 뿐이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왕필본의 원문은 백서본 원문과 같읍니다.
그러나 기존 왕필본 해석서 내용을 보면 " 그러므로 삶 때문에 억지로 일삼지 않는 것이~" 이렇게 해석한데도 있고, 어떤 곳에서는 "자기 생명에만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이라고 해석했네요.
是賢貴生(시현귀생); 이러한 현명한 지헤가 삶을 고귀하게 하는 것이오.
是; 이것, 賢; 어질다,현명하다. 貴; 높고 귀하다. 生; 삶,
이렇게 "현상으로 나타난 삶이란 아무것도 아닌 무(無)나 공(空)이다" 또는 "나는 태어난 적이 없다"라고 여긴다면, 이것이 현명함,즉 어진 지혜이며, 깨달은 도인의 밝은 지혜로써, 이 깨달음의 지혜를 지니면 고귀하고 영원한 삶을 산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왕필본 원문은 <是賢於貴生>이라고 되어 있고,
해석은 "삶을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현명하다"라고 되어 있읍니다.
왕필본에서는 <於>자를 중간에 새로 삽입하여 위의 문장과 비교하는 문장으로 고쳤는데,
이는 왕필본 필사자가 백서본 원본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잘못된 왕필본의 원문과 해석이 일반적인 통용본으로서 현대까지 계속 전수되어 내려온 것이죠.
이 75장에서 우리는 인생을 천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무엇이며,
보다 가치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간단하게 들어 보았읍니다.
삶 속에서 외면에 중요성을 두느냐, 아니면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냐에 따라서
자기 앞의 생이 경박하고 일시적인 외면의 삶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고귀하고 영원한 내면의 삶으로 나아가게 될 수도 있다는 도인의 가르침을 들어 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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