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79장, 하늘의 도는 순수한 사람과 함께 하오.

2011. 3. 12. 20:17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79회]

 

[원 문]-백서갑본

 

和大怨 必有餘怨

화대원 필유여원

焉可以爲善

언가이위선

是以聖人右介

시이성인우개

而不以責於人

이불이책어인

 

故有德司介

고유덕사개

无德司(徹刀)

무덕사철

夫天道无親

부천도무친

恒與善人

항여선인

 

[한글 해석] 

큰 원한은 화해를 해도, 반드시 그 원망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데,

(이런 것을) 어찌 도인의 선한 마음 자세로써 옳다고 할 수 있겠소?

 

때문에 성인은 (도량이) 크게 되도록 돕기는 하지만,

그러나 남에게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소.

 

그러므로 덕이 있는 이는 큰 것(화해)을 지키고 있고

덕이 없는 이는 부서져서 버리는 것(원망의 지꺼기)을 지키고 있는 것이오.

 

대저 하늘의 도는 (덕이 있던, 없던) 이원적인 마음과는 가깝지 않으니,

늘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도와 함께 하는 것이외다. 

 

[해 설]

이번 장은 왕필본에서는 79장, 백서본에서는 44장에 해당됩니다.

물론 곽점본에는 없으므로 백서본 이후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서 덧붙혀진 글입니다.

이번 문장은 왕필본에서 글자를 몇개 바꾸었기 때문에 왕필본 해석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읍니다.

이렇게 달라진 중요 이유는 백서본의 <介>자를 왕필본에서는 <契>자로 글자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介>자를 왕필본에서 <契>자로 바꾼 이유는 아마도 <介>자로는 도저히 해석하기가 난망하므로 물품교환이나 빚등의 계약서라는 의미의 <契>자로 바꾸어 필사자 자신이 해석하기 좋게 변경한 것 같읍니다.

이렇게 내용이 전혀 다르게 바꿔진 문장을 몇 천년동안 그대로 전래되어 왔다는 것이 참으로 어이가 없읍니다.

왕필본 필사자는 아마도 道라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 이 문장을 변경한 것 같읍니다.

이 79장의 잘못된 왕필본 원문을  그대로 해석한 일예를 하나 들어보면, 중국 선불교에서 유명한 선승인 감산대사의 해석으로 보겠읍니다.

<큰 원한이 풀어져도 반드시 남은 원한이 있으니

이 어찌 잘했다고 하겠는가?

따라서 성인은 왼쪽 부절(符節)만 잡은 채

사람에게 보답을 채근하지 않는 것이다.

덕 있는 사람은 부절만 맡고

덕 없는 자는 세금 징발하듯 한다.

하늘의 도는 친한 이가 따로 없어

항상 착한 사람에게 베풀어 준다.>

중국 선불교에서 많은 경전을 주해하고 책을 펴내서 지성적인 선승(禪僧)이라 존경받는 감산대사의 왕필본 해석이 이 정도 내용이며, 대부분의 기존에 출판된 왕필본 해석서들의 내용도 거의 이와 비슷하게 되어 있읍니다.

이것은 왕필본 원문자체를 잘못 변형했기 때문에 해석도 이렇게 이상한 내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한 문장씩 자세히 해석해 보겠읍니다. 

 

和大怨 必有餘怨(화대원 필유여원); 큰 원한은 화해해도 반드시 원망의 찌꺼끼가 남아있다.

和;화해하다, 怨;원한, 쌓다.必; 틀림없이,餘; 남다,

 

원한이 크면 겉으로는 화해를 해서 풀어진 것 같지만, 속으로는 아직도 원한의 앙금이 남아 있어서 언제 또 다른 일로 증오가 폭발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에게 원한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너와 나"라는 이원화의 상대적인 마음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며, 그 상대적인 세계 안에서 화를 풀고 서로 사과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완전히 너와 내가 하나가 된 것처럼 원한이 풀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인 이원화 세계에서 아무리 선하고 착한 것처럼 보여도 항상 이기적인 상대성 대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죠. 

이 문장은 왕필본 원문과 동일하고, 해석도 대부분 비슷합니다.

 

焉可以爲善(언가이위선);(이런 것을)어찌 도인의 순수한 행위로써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焉;어찌, 可;옳다.이~로써, 爲; 행위; 善; (도인의)순수함, 좋은, 잘한,

 

여기서 <善>은 단순히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절대본체의 바탕에 머물러 있는 도인의 순수한 의식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첫 문장의 <큰 원한은 화해해도 반드시 원망의 찌꺼끼가 남아 있다>라는 상태에 대하여 <순수한 마음의 도인의 입장에서는 옳바른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부터 큰 원한을 만들지 않는 일원적인 도인의 상태가 되었어야지, 이원적인 마음상태에서 상대적인 원한을 만들고 또 화해한다는 것은 순수한 도인의 마음상태가 아니라고 꾸짓는 말입니다.

왕필본 원문은<安可以爲善?>으로 비슷하고 바꾸었으며,

해석도 "어찌 잘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서 비슷합니다.

 

是以聖(人)右介(시이성인우개);그래서 성인은 (도량이)크게 되도록  돕기는 하지만,

右;돕다,권하다, 介;크게하다,착하다.믿다,의지하다.얌전하다,굳게 지키다.사이에 끼다

<介>자는 "사이에 끼다. 크게하다,착하다, 믿다.등의 여러가지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크게하다"의 뜻으로 해석했읍니다.

백서갑본은 <介>자로 되어 있고,백서을본에는 <芥>자로 되어 있으며, 어떤 학자들은 이 <介,개>나 <芥,개>를 <价,개>로 읽읍니다.

<价>로 바꾸어서 "착하다"는 뜻으로 해석한 곳도 있읍니다.

그러나 <착하다>로 해석하면 밑의 문장들과 의미적으로 조화가 맞지 않아서 여기서는 '마음을  넓게 쓴다'는 의미의 <크게 한다>의 뜻으로 해석했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介>자를 왕필본에 있는 <契>자로 읽어서 "계약서 또는 채권증서"로 해석합니다만, 이것은 어떤 근거도 없이 왕필본을 무조건 믿고 그대로 따라 했는데, 사실 왕필본은 당시 학자들이 단지 추측으로 <契>자로 읽었을 뿐이며, 어떤 믿을 만한 근거가 전혀 없읍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해석서들은 이 <介>자 한자 때문에 전혀 엉뚱한 해석들을 하고 있읍니다.

<右>자는 "돕다, 권하다"등의 뜻이 있으며, 여기서는 "돕는다 "의 뜻으로 썻읍니다. 

 성인이 크게 되도록 돕는다는 것은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마음을 넘어서 일원적인 도인의 무위적인 상태가 되도록 가르침을 준다는 말입니다.

 

왕필본 문장은 <是以聖人執左契>로 완전히 바꾸어져 있고,

해석은 "따라서 성인은 왼쪽 부절(符節)만 잡은 채 ~."라고 되어 있읍니다. 이 해석에서 원초적으로 잘못된 것은 물론 원문이 <右介>를 <左契>로 바꾼 것이지만,

왜 갑자기 道를 말하는데서 채권문제가 나오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읍니다.

더우기 깨달은 성인으로, 지성적 도인으로 유명한 감산대사라는 분의 해석이 이 정도인데,

분명히 왕필본 원문부터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의문이 들었을 텐데, 글자 그대로 채권문제로 해석을 했읍니다. 여기서 왕필본 원문에서 <契>란 요즘의 계약서와 같은 것으로 나무로 만들어서 계약한 후에 두조각으로 나누어 계약 당사자가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 한쪽 계약서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 성인은 꾼돈이나 물건을 상대방에게 채근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왕필본은 이 문장부터 완전히 노자도덕경의 원래 뜻에서 밖으로 빠져 나가 버린 것이죠.

왕필본은 완전히 잘못된 원문과 해석으로 되어 있읍니다.

 

而不以責於人(이불이책어인); 그러나 사람들에게 억지로 강요 하지는 않소

 而; 그러나, 以: ~주다.지우다. 責; 책임, 꾸짓다,요구하다 於 ~에게, 人:사람들

 

그러나 성인은 사람들에게 억지로 상대적인 이원성을 넘어서야 된다고 다구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억지로 강요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있는 그대로"의 무위와는 어긋난 행위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의 자질에 따라서 따라 올 사람은 가르침을 따라오고, 아직 도를 닦을 인연이 되지 않은 사람은 그대로 내비러 둔다는 것입니다. 

왕필본 원문은<而不責於人>으로 약간 바꾸어져 있고,

해석은 "남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으므로 백서본과 비슷하게 해석이 됩니다. 

 

故有德司介(고유덕사개); 그러므로 덕이 있으면, 큰것(화해)을 지키고

司;맡다, 지키다, 介; 크게하다,크다.

 

그러므로 덕이 있는 이는 성인의 가르침을 잘 따라가서 큰 것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덕이있다'는 것은 아마도 인의덕(人依德), 즉 유교적인 덕을 말하는 것 같읍니다.

여기서 <큰 것>이란 물론 마음을 크고 넓게 쓴다는 것을 말하며, 아무리 원한이 있어도 화해를 해서 그것으로 끝내 버린다는 것입니다.

맨 첫번재 문장인 <큰 원한은 화해를 해도, 반드시 원한의 찌꺼끼가 남아 있다>라는 문장에서 

<큰 원한은 화해를 한다>는 그것으로 끝내서, 더 이상 원한의 찌꺼기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이 <큰것, 介>을 말한 것 같읍니다.  

 

왕필본 원문은<有德司契>로 <介>가 <契>자로 바뀌어져 있읍니다.

해석은 "그러므로 덕있는 사람은 부절만 맡고"라고 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계약서 한쪽만 지니고 실제로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안한다는 말입니다.

왕필본에서는 <契>로 바꾸는 통에 마치 덕있는 이는 마음 좋은 빚쟁이 영감으로 묘사한 것 같읍니다.이런 잘못된 문장이 몇백년동안 왕필본으로 전래되어 왔다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왕필본에 대해서 실망스럽읍니다. 

 

无德司(徹刀)(무덕사철); 덕이 없으면, 부서져서 버리는 것(원망)을 지킨다.

 <徹刀>자는 <徹>자 밑바침에 <刀>자가 붙어있는 옛글자인데, 큰 옥편에도 나와있지 않으며, 뜻을 전혀 알수없지만, 여기서는 <徹>자의 뜻 중에서 "부서지다, 버리다"라는 두가지 뜻을 이용해서 해석했읍니다.

<徹>자의 뜻은" 통하다, 뚫다,벗기다,다스리다,버리다,부서지다,거두다,치우다"등 여러가지 뜻이 있는데, <徹刀>는 아마도 "칼"이라는 글자가 밑에 있으므로 "칼로 베어 버리다" 또는 "칼로 잘게 썰다"라는 뜻이 포함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덕이 없으면 부서져서 버리는 것을 지킨다>라고 해석을 했는데, 여기서 <부서져서 버리는 것>이란 바로 주객 이원화로 갈라져서 대상으로 보이는 "원한의 찌꺼끼"같은 것이 풀어지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고 집착을 한다는 말입니다. 즉 언젠가는 부서져서 사라져 버릴 이원화적인 대상(마음의 개념)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맨 첫번째 문장에서<큰 원한은 화해해도, 틀림없이 원한의 찌꺼끼가 남아 있다>라는 문장에서, 덕이 없는 이는 <틀림없이 원한의 찌꺼끼가 남아 있다>는 내용에 집착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읍니다.

 

왕필본 원문은 <無德司徹>이며,

해석은 " 덕없는 사람은 세금 징발하듯 한다" 이것이 감산대사 해석인데, 왜 이렇게 해석했는지 저도 모르겠읍니다. 여하튼 완전히 잘못 해석되어 있다는 것은 틀림없읍니다. 

 

夫天道无親(부천도무친) ; 대저 하늘의 도는 (이들 둘과는) 가깝지가 않으니,

 <天道>는 노자의 일원적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道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최종의 궁극적인 道는 위의 "德이 있고, 德이 없고"에 관계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덕이 있어서 원한을 완전히 풀어서 화해를 하고 잊어버리든,  덕이 없어서 서로 화해를 해도 그대로 원한이 남아 있든, 그런 마음의 이원화 상태와는 전혀 다른 것(초월한 것)이 천도(天道)라는 것입니다.<덕이 있다, 없다>는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마음 상태를 말하는데, 천도는 일원적인 도의 바탕이기 때문에 이들 이원적인 마음 자세인 덕의 有,無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가깝지 않다는 말은 그것들을 넘어서 초월해 있기 때문에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왕필본의 원문은 거의 같읍니다.

 

恒與善人(항여선인); 항상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과 함께 한다.

恒; 늘,항상, 與; 더불어,함께.

 

<善人>은 단순히 착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긍극의 도의 바탕에 안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道人을 말합니다. 도의 절대바탕에 안정적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은 이원적인 주객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비이원적(非二元的)인 상태를 말하는데, 전체가 오직 일체가 된 절대바탕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너와 나라는 상대성이 사라지고, 전체 우주와 일체가 된 상태를 <善>이라고 하며, 우리 말로 적절하게 표현 할 수는 없지만, "순수한 마음"상태로 번역을 했읍니다. <善>이란 이원성을 벗어난 <일원적인 상태>를 표현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천도란 주객 이원적인 상태와는 전혀 관계없고, 오직 일원적인 상태에 안정되게 머무르고 있는 순수한 도인에게 항상 함께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이 79장에서 일원적인 절대본체의 도는 이원적으로 평가하여 덕이 있다던가 없다던가 하고는 전혀 상관없으며,오로지 궁극의 절대바탕에 안정되게 머무르는 사람만이 순수한 도인이라는 말씀을 들었읍니다.

덕이 있다면 이원적인 세계에서는 나름대로 큰 자비의 넓은 마음을 지니고, 원한이 생기더라도 화해로써 완전히 풀어 버리고, 덕이 없으면 자잘한 원망과 개인감정의 찌꺼기를 그대로 지니고서,그런 마음의 찌꺼끼에 집착하며 고통의 삶을 살아 가겠지만, 

천도(天道)라는 것은 그런 이원적인 여러가지 잡다한 인간관계의 덕과 개인심성문제와는 상관도 없고, 전혀 차원이 다른 비이원적(非二元的)이며, 순수하고 보편적인 절대본체상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