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80장, 가령 원시시대로 되돌아가서 자연 그대로 살아 간다면~

2011. 3. 20. 20:06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80회]

 

[원 문]-백서본

小國寡民

소국과민

使十百人之器母用

사십백인지기모용

使民重死而遠送

사민중사이원송

有車舟无所乘之

유차주무소승지

有甲兵无所陳之

유갑병무소진지

 

使民復結繩而用之

사민복결승이용지

甘其食 美其服 樂其俗 安其居

감기식 미기복 낙기속 안기거

隣國相望 鷄狗之聲相聞

인국상망 계구지성상문

民至老死 不相往來

민지노사 불상왕래

 

[한글 해석]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어서, 

가령 열사람 백사람 몫을 하는 편리한 도구를 쓰지 말도록 한다면,  

가령 죽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멀리 쫏아내도록 한다면, 

차와 배가 있어도 탈일이 없어지고,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쓸일이 없게 되는 것이오.  

 

가령 백성들로 하여금 옛날로 돌아가 노끈의 매듭으로 셈하토록 한다면

(원시시대로 돌아 간다면)  

백성들은 먹는 것이 무엇이든 맛있게 먹을 것이고, 

몸에 걸치는 것이 무엇이든 멋지다고 만족할 것이며,

평범한 일상사가 어떻하든 매일 즐거운 기분으로 살아갈 것이고,

거처하는 곳이 어떠하든 편안하고 안락하게 여길 것이오.  

 

이웃나라가 서로 보이고,

닭과 개 짓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깝게 있어도 

백성들이 늙어서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을 것이외다.

 

[해 설]

이장은 왕필본에서는 80장, 백서본에서는 31장입니다.

물론 곽점본에는 없으며, 따라서 후대에 누군가 추가로 삽입한 장입니다.

왕필본에서는 맨끝에서 두번째장에 있지만, 백서본에서는 중간에 위치해 있는 장입니다.

본글은 노자도덕경의 다른 글처럼 직접적으로 심오한 개념적 의미를 표현한 글들과는 달리, 어떤 개인이 이상향(理想鄕) 또는 도원경(桃源境)을 꿈꾸는 듯한 글이며, 노자도덕경에서 상상이나 공상을 하는 글은 거의 없는데, 이글이 유일하게 상상적인 글 내용으로 묘사한 것 같읍니다.

 

노자도덕경에서는 이 이원화 세상 조차도 일종의 환상 또는 꿈같이 허황하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본 80장은 꿈 속에서 의도적으로 또 하나의 이상향을 꿈꾸고 있는 내용이므로, 엄연히 말해서 원론적인 道를 말하는 노자도덕경에서는 좀 특이한 내용의 글인데, 이 내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개인적인 구도자의 마음과 행위로써 비유적인 측면에서 또 다르게 이해한다면 더욱 가치있게 보일 수 있는 글입니다.

 

고금이래 많은 해석가나 주석가들이 이글에 대해서 통상 도덕경에 나오는 글로써는 수준적인 면에서 좀 낮은 내용인 것 같다고 여기면서, 왜 이런 상상적인 글이 도덕경에 실렸는지 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으며,또한 어떤 사람들은  너무 엉뚱하게 해석을 해서 읽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간혹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道에 대한 원론(原論)적인 글만 실려있는 노자도덕경에는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도에 대한 여러가지 우화(寓話)로 편집된 장자(長子)같은 책이나 후세의 도교계통의 잡서에서나 더 어울릴만한 글인것 같다고 여길 수도 있는 글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도덕경의 맨끝에서 두번째로 편집해 논 것 같읍니다. 마지막에서 두번째로 배치한 이유는 아마도, 81장 맨끝은 노자도덕경 전체에 대한 끝마무리에 대한 어떤 결론적인 인삿말 내용이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끝에서 두번째로 80장에 배치해서 별로 가치없는 글이라는 것을 무언으로 표시해준 것 같읍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측면에서 이글을 내면적으로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도를 닦는 기본적인 수행단계와 방법,道에 대한 총정리 내용을 상징적으로 간단히 묘사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보이는 글내용만으로는 그런 심오한 비유와 상징적 의미를 고금(古今)의 어느 누구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아주 심오한 뜻을 감춘 글입니다.

 

이장의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마치 요즘에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깊은 산속의 오지나  섬지방에서 몇십가구가 끼리끼리 모여사는 자연주의자들의 작은 공동체 마을같은 풍경을 연상케 해 줍니다.

면적도 작은 동네 만하고 인구도 적으면서 도인들만 사는 작은 이상향을 상상한 글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단순히 이상향을 상상한 것 만이 아니고, 이 현실세계의 속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외로운 도인의 길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비유측면도 있는 것 같읍니다.

이 글은 아마도 백서본 형성시기인 전국시대 말기에 나라와 나라들끼리 수시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던 혼란한 시대에 한 구도자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도인들만의 작은 이상향을 상상으로 그리워하며 지어낸 글인 것 같읍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작은 나라의 이상향의 표면적인 내용은 도가(道家)에서 상징적으로 내세운 어떤 이상향이나 모범적인 도인사회의 도원경 구조를 묘사한 것은 결코 아니며, 단순히 어떤 구도자가 개인적으로 잠깐 공상(空想)을 하며 가상세계를 상상해 보는 내용입니다만, 그 속에는 또 다른 비유와 상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읍니다.

 

왕필본 원문은 원래 백서본 원문에서 약간 변경되어 있는데, 내용이 완전히 반대로 변경되어 있는 문장이 한군데 있읍니다.

이는 위의 문장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왕필본 필사자가 변경한 것이며, 기존의 다른 해석서들도 이 80장의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한 글들이 별로 없는 것 같읍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문장 내용은 비슷하게 소개되고 있는 것 같읍니다.

 

小國寡民(소국과민);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어서,

 寡;적다.

나라의 국토가 작고, 사람이 적다면 그 만큼 생존 경쟁도 적을 것이고, 다투는 일도 많이 일어나지 않아서, 아주 단순하고 순박하게 살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국토가 작고 백성이 적은 나라에 대해서 한번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한 구도자가 생각(백성)하는 것이 적고, 의지적인 활동범위(작은나라)가 좁다는 구도자의 마음과 행위의 절제(節制)상태를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읍니다.

 

使十百人之器母用(사십백인지기모용) ;가령 열사람 백사람 몫을 하는 편리한 도구를 쓰지 말도록 하면, (차와 배가 있어도 탈일이 없을 것이고)  

 使; 가령,만약, 十白人之器; 열 사람 백사람 몫을 하는 도구,기구,장치. 毋;~하지 말게 하다. 用; 사용.

 

<使>는 "가령, 만약"이라는 뜻으로 이 문장은 <가정법>으로 원작자가 상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사람,백사람의 몫을 하는 도구란 바로 그 옛날에는 마차나 배같은 운반도구 밖에는 없었겠지요.

그래서 만일 그러한 편리한 기구를 쓰지 못하게 한다면, 마차나 배가 있어도 탈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使十百人之器毋用  有車舟无所乘之>가 붙어있는 문장인데, 별도로 떨어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얼뜬 보면 문장이 산만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해석도 <가령 열 사람 백사람 몫을 하는 편리한 도구를 쓰지 말도록 한다면, 차와 배가 있어도 탈일이 없을 것이오>이렇게 붙혀서 해석해야지 명확해지는데, 한문원문이 중간에 다음문장인<使民重死而遠送>이 삽입되어 있어서 문장이 어수선해 보입니다.

또한 이 문장을 다른 비유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는데 구도자의 마음이 밖으로 내달리게 향하지 않고 내면으로만 향하게 하고, 마음의 활동성을 제한시킨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읍니다. 

 

왕필본 원문은 <使有十百之器而不用>으로 변경되어 있으며,

해석은 "열사람 백사람의 그릇이 있어도 사용할 필요가 없고"라고 한데도 있고,

또는 " 열 사람 백사람 몫을 하는 기계가 있어도 사용한 곳이 없게 하고"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본 해석과 거의 비슷하게 해석되어 차이점이 별로 없읍니다.

 

使民重死而遠送(사민중사이원송); 가령 죽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백성은 멀리 보내버린다면 (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쓸곳이 없게 되오)

<重死>는 죽음을 소중히 여기다"라는 뜻인데, 자기 목숨을 굉장히 아껴서 生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자신을 육체라고 여기는 육체 동일시하는 사람으로써 아직도 도를 깨치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육체 생명을 아끼고, 따라서 生에 집착하는 사람으로써 자연히 물질적 욕망이 많아서 남을 무기로 공격할 수도 있고,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갑옷과 무기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본능이 있겠죠.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아예 육체동일시에서 벗어난 도인들만 사는 그 작은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멀리 쫏아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개인의 육체를 보호하는 갑옷과 무기도 필요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도 원문은 <使民重死而遠送>과 <有甲兵无所陳之>가 따로 떨어져 있지만, 실질 내용은 같이 붙어 있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해석은 붙혀서 < 가령 죽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멀리 쫏아내 버리면,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쓸곳이 없게 되오>라고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또 다른 비유적인 측면에서 이해 할 수 있는데, 한 구도자가 만일 자기가 육체라고 여기는 육체 동일시를 벗어버린다면 육체를 보호하려는 자기 방어본능(갑옷)이나 남을 공격적으로 대하는 이원화 의식의 욕망(무기)이 필요없게 된다고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읍니다.

 

왕필본 원문을 보면,<使民重死而不遠徒>로 완전히 내용이 반대로 변경되어 있으며,

해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목숨을 귀중히 여겨 멀리 옮겨가지 않게끔 한다,"라고 되어 있읍니다. 

이것은 왕필본 필사자가 백서본 원문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여, 자기나름대로 해석하기 좋게 원문을 변경했읍니다. 원래 백서본에서, 자기 목숨에 집착하여 생명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로 멀리 내보내고, 오직 자기 육체 생명에 집착이 없는, 육체 동일시에서 벗어난 깨달은 도인 들만 사는 나라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멀리 쫏아내 보내라>고 한 내용인데, 왕필본 필사자는 이를 잘못된 글이라고 판단하여 임의적으로 <멀리 내보내지 말라>고 거꾸로 문장을 변경시킨 것입니다.

왕필본 필사자가 궁극적인 도에 대하여는 아주 무지(無知)한 사람이었던 것 같읍니다.

 

有車舟无所乘之(유차주무소승지); 차와 배가 있어도 탈일이 없고,

이 문장은 앞의 <使十百人之器毋用, 가령 열사람 백사람 몫을 하는 편리한 도구를 쓰지 말게 한다면>이라는 문장과 연결된 문장입니다.

나라가 작고 사람이 적어서 구태여 편리한 도구나 교통수단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또 다른 측면에서 구도자의 마음자세로 비유해 보자면 마음이 밖으로 나다닐 필요가 없이 안정된다는 비유로써 이해할 수도 있읍니다.

 

왕필본의 원문은<雖有舟與 無所勝之>라고 변경하였으며,

해석은 "비록 배와 수레가 있었도 그것을 타고 갈 곳이 없도록 한다"

문장 앞에 <雖,비록>이 덧 붙혀졌는데, 원래는 위의 문장과 자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문장이기 때문에 <雖>는 불필요한 연결조사입니다. 

 

有甲兵无所陳之(유갑병무소진지);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쓸일이 없게 되오. 

 이 문장도 앞의 <使民重死而遠送, 가령 죽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멀리 쫏아낸다면>의 문장과 연결된 내용입니다.

 육체를 자기라고 여기지 않고 전체가 하나라고 여기는 도인 사회에서는 구태여 육체를 보호하는 갑옷과 무기가 필요없다는 것이죠. 자기 육체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갑옷이나 무기가 있는 것이지 육체를 자기라고 여기지 않는 도인 사회에서는 그런 전쟁도구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해해 보자면 구도자의 외향적인 마음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로도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 있읍니다. 

 

왕필본 원문을 보면,<雖有甲兵 無所陳之>라고 변경되어 있고,

해석은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사용할 데가 없도록 한다"

이 문장도 마찬가지로 <雖,비록>을 불필요하게 삽입하여 위의 문장과의 자연적인 연결 상태를 짤라 버렸읍니다. 따라서 <雖>를 삽입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使民復結繩而用之(사민복결승이용지); 가령 백성들로 하여금 옛날로 되돌아가 노끈을 매듭지어 셈을 하도록 한다면(원시시대로 되돌아 간다면) 

使; 가령,만약, 復; (옛날로) 뒤돌아가, 結繩; 노끈으로 매듭을 지어 셈을 하는 옛날 셈하기 

아주 옛날에는 노끈에다 매듭을 만들어 그것으로 셈세기 계산을 했다고 합니다.

즉 사람들이 옛날의 원시시대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가정해 보는 말입니다. 

이 문장을 또 다른 측면에서 이해해 보자면, "절대본체로 되돌아가서 구도자가 무위자연과 하나가 된다면~"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읍니다.

 

甘其食 美其服 樂其俗 安其居(감기식 미기복 낙기속 안기거);

백성들은 먹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맛있게 먹을 것이고,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 어떻하든 멋지다고 여길 것이며,

평범한 일상사가 어떻하든 매일 즐거운 기분으로 지낼 것이며,

거처하는 곳이 어떻하든 편안하고 안락하게 여길 것이오. 

 <甘其食>은 그대로 직역하면 " 백성들이 먹는 것이 달다"라고 해야 겠지만, 실질적인 뜻은 "백성들은 먹는 것이 무엇이든 맛있게 잘 먹는다"라고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美其服> 직역하면, "백성들이 입는 옷은 아름답다"라고 해야 되겠지만, 실질적인 뜻은 "백성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멋있다고 만족한다" 라고 해석이 됩니다.

<樂其俗>은 직역하면" 백성들이 평범한 일상사를 즐긴다"라고 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뜻은 "백성들이 평범한 일상사가 어떻든 간에 즐거운 기분으로 살아간다"라고 해석이 됩니다.

<安其居>는 직역하면," 백성들이 살기가 편하다"라고 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뜻은 " 백성들이 거처하는 곳이 어떠하든 편안하고 안락하게 여긴다"라고 해석이 되어야 겠지요.

말하자면, 사람이 사는 기본 조건인 의,식,주, 오락들을 아무 조건없이 무위자연(無爲自然)상태의 있는 그대로 즐기고 만족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즐거움이 인의적인 외부의 환경조건에 의해서 희로애락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럽고 원천적인 지복(즐거움)이 나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문장입니다.

도를 닦아서 마음이 순수해지면 그러한 외부의 여러가지 조건에 마음이 구애받지 않고 항상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지복의 기쁨을 가지고 즐겁게 만족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인의적(人依的)인 외부 대상에 대한 욕망의 해소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무위(無爲) 자연적인 존재의 충만감 속에서 삶을 살아나간다는 말입니다.

 

隣國相望 鷄狗之聲相聞(인국상망 계구지성상문);이웃나라가 서로 보이고, 닭과 개가 우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隣; 이웃, 相; 서로, 望;바라보다. 鷄;닭 狗; 개. 聲;소리, 聞; 듣다.

닭 우는 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들인다는 것은 바로 조그만 강 건너에 다른 나라가 가까이 인접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도인이 복잡한 도시 속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암시적으로 비유한 것 같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절대본체의 무위자연과 하나가 된 도인은 외부의 현상적인 대상에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도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읍니다.

 

民至老死 不相往來(민지노사 불상왕래); 백성들이 늙어서 죽을 때가지 서로 왕래하지 않을 것이네.

 至;이르다. 往來; 서로 왔다갔다 한다.

조그만 냇가의 건너편에 다른 나라가 있었도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이 나라에 있으면 편안하고 살기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러한 이상향의 도인의 작은 나라를 상상해서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 살고 있는 한 도인의 마음 상태와도 다르지 않읍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 중의 하나인 서울의 시끄럽고 혼잡한 시장 한 복판에서도, 궁극을 깨달은 도인의 마음은 속세에 물들지 않고, 홀로 맑고 밝게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죠.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한 시민이지만 내면은 오직 청정하여 바로 위에서 이상향으로 그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외면의 물질 만능의 다툼세계에 물들지 않고, 또한 속세사람들이 아무도 알아 볼 수도 없으며, 홀로 세상을 남몰래 정화하며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즉 완전히 절대본체의 도에 안주한 도인은 어떤 현상적인 외부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절대본체에 안정되어 무위자연과 더불어 홀로 평안하게 살아나간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이 80장에서 어느 한 구도자가 상상하는, 도인들만이 사는 작은 이상향의 나라를 흘끗 보았읍니다. 어린 시절에는 간혹 그런 자기만의 이상향을 꿈 꾸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며, 좀 커서는 평화로운 농촌에서 자연과 더불어 농사를 지어가며 편안하고 여유롭게 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염원을 도시의 셀러리 맨이라면 누구나 한번씩 꿈 꾸어 본 일이 있을 겁니다.

.

그런 모든 행복과 평온의 염원은 바로 우리가 잊고 있던 참나를 되찾기 위한 바램이 다른 형태로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읍니다.

누구나 이 삶에서 행복을 바라고 평안을 바라며 꿈 속에 빠지지만, 우리는 오직 밖에 있는 대상에서 행복과 안정을 찾을려고만 했읍니다.

밖으로 향해서만 행복을 찾으려는 욕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깨달게 되면, 모든 행복은 자기 내면으로부터 비춰져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결국 내면에 관심을 약간 두게 됩니다. 그러나 겨우 내면의 가치에 뒤늦게 눈을 뜨긴 하지만, 이미 남은 생이 얼마 안된다는 것을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알고 자각한다면 바로 지금  그 자체가 내면의 가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심으로 자각하면 당장 오늘 저녁 세상을 하직한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대하여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 동안 어떻게 살았던 상관없이, 그것을 진정으로 참되게 아는 순간, 지금 여기에 있는 충만한 지복감 속에서 미련이나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고 아는 현존(現存)의 이자리가 바로 행복의 연꽃이 피어오르는 그 충만의 자리임을 지금 여기서 스스로 알아차려야 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