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81장, 道는 이로울 뿐, 손해는 기치지 않소.

2011. 3. 26. 19:56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81회]

 

[원 문]-백서본 

信言不美  美言不信 

신어불미    미언불신

知者不博  博者不知

지자불박   박자불지

善者不多  多者不善

선자불다   다자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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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人无積

성인무적

旣以爲人 己愈有

기이위인 기유유

旣以予人 己愈多

기이여인 기유다

故天之道 利而不害

고천지도 이이불해

人之道 爲而弗爭

인지도 위이불쟁

 

[한글해석]

믿음직한 말은 멋들어지게 들리지 않으며,

멋들어지게 들리는 말은 믿음직한 말이 아니오. 

 

도를 깨친 이는 널리 알지 못하고 

널리 아는 이는 도를 깨치지 못한 것이오. 

 

순수하게 착한 이는 이 세상에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순수하게 착하지 못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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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 (지식을) 쌓아두지 않지만, 

 

애초부터 남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이 남보다 더욱 뛰어나게 되며,

 

애초부터 남에게 베풀어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이 남보다 더욱 많아지게 되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하늘의 도는 이롭게는 하지만, 손해는 끼치진 않소. 

도에 이르른 사람은 남을 위해서 행할 수는 있겠지만, 다투지는 마시오.

 

[해 설]

이번 장은 노자도덕경의 마지막 장으로써, 왕필본에서는 81장, 백서본에서는 31장입니다.

물론 곽점본에는 없으며, 백서본 시절에 누군가가 새로 삽입한 것 같읍니다.

백서본에서는 이 장이 중간에 위치해 있는데, 왕필본에서는 맨 마지막  장으로 편집해 놓은 것을 보면,이 장은 전반적인 내용이 마치 노자도덕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후기(後記) 인삿말로써 적당한 내용이라고 판단했 것 같읍니다. 

이 장은 내용면에서 상반부와 하반부의 두 문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백서본에서는 분장 표시인 ( . )이 표시되어 있지만, 왕필본에서는 그대로 한장으로 연결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하로 나눠서 따로 해석했읍니다.

 

대략 간단하게 내용을 간추려 설명하면,

상부 문단에서는 말과 지식과 행위의 세가지 부분에서 진실하게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을 간단하게 분별하고 있읍니다.

하부 문단에서는 성인은 지식을 일부러 축적하지는 않지만,

도(도덕경) 자체가 남들을 계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도(도덕경)를 배우면 저절로 남보다 지식이 뛰어 나게 될 뿐 아니라,

남들에게 도(도덕경)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저절로 많은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노자 도덕경을 공부해서 남에게 가르쳐 주면 저절로 지식이 늘어난다는 말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도를 알게 되면 자기에게 이로우면 이로웠지 해롭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도에 이르른 사람이 남에게 도를 행할 때는 펼치긴 하되 다투지는 말라고 당부를 하고 있읍니다.

 

信言不美(신어불미); 믿음직한 말은 멋지게 들리지 않으며,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말은 한마디로 믿을 수 있는 말은 겉으로 꾸밈이 없이 소박하다는 것이죠. 

따라서 겉으로는 말이 투박하고 거칠어서 세련되게 보이지 않지만, 내면으로는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필본 원문도 이와 같읍니다.

 

美言不信(미언불신); 멋지게 들리는 말은 믿음직한 말이 아니오. 

겉으로 번지르하고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은 믿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을 유혹하기 위하여 겉으로 매력있게 들리는 말은 실은 속이 텅빈 거짓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대형교회에서 인기목사들의 설교내용에 대하여 비판한 책을 보니, 목사들이 경전의 가르침을 깊히있게 이해하도록 안내해주는 설교를 하기보다는, 경전의 한두구절을 이용하여 신도들의 속된 감정과 정서를 자극하고 선동하여 예배에 참석한 신도들을 집단 체면의 환타지상태로 유도하여 몰아가는 위험한 설교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어느 한 현직목사의 양심적인 글을 본적이 있읍니다.  

그렇게 속세에서 인기있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위해서 겉으로 온갖 듣기좋은 미사여구와 감정에 호소하듯, 그럴 듯한 말들을 미언(美言), 즉 번지르~하게 듣기 좋은 말이라고 합니다.

사기꾼이 사기를 치려면 우선 상대방에게 그럴듯한 말로 최대 한도로 신용을 얻어야 겠지요.

종교계나 정신수행 계통에서도 청산유수같이 말 잘하고 또한 모르는 것이 없이 박식한 사람들은

대개가 궁극의 깨달음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저 관련된 책이나 많이 보고, 말재주나 좀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하는 소문도 헛말이 아닌 것 같읍니다.

왕필본은 원문이 같읍니다.

 

知者不博(지자불박); 도를 깨달은 이는 넓게 많이 알지 못하고 

 博; 넓다.

많이 아는 사람을 보통 박식하다,라고 말하는데, 여러방면에 걸쳐서 널리 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지식을 여러 방면에 걸쳐 널리 알긴 하지만, 오히려 한방면에만 깊게 파고 들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죠.

마찬가지로 도를 아는 것도 다방면의 지식을 널리 아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깨달으려면 오히려 모든 지식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 버려야

궁극적인 도의 바탕에 이르를 수 있읍니다.

따라서 보통 말하기를, 도를 깨닫는 다는 것은 '아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학문이나 지식,기술 등은 일상 생활에서는 사람이 살아나가는데는 가장 중요한 필수적인 공부요소라고 하지만,

깨달음을 공부하는 구도자에게는 모든 지식과 개념을 버리는 작업을 홀로 수행하는 것이 도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왕필본은 원문이 같지만은 순서가 여섯번째로 바뀌어 있읍니다.

 

博者不知(박자불지); 넓게 많이 아는 이는 도를 깨닫지 못한 것이오. 

여러가지 영적지식이나 경전의 이론 등을 널리 아는 사람은 아직 궁극적인 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도자들 중에는 자기가 직접 책을 한두권 써서 세상에 내어 놓으면서 도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읍니다.

그러나 책을 펴 내는 것과 도를 깨닫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입니다.

책을 많이 써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읍니다.

자기가 깨달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책을 내서 선전하는 것은 마치 자기의 존재를 세상에 드날리고 싶어서 스스로 연날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읍니다.

진짜 깨달은 후에는 책 같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읍니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가르침이나 대화록을 기록해서 책을 내준다면 몰라도,

스스로 자기가 깨달았다고 직접 책을 써서 세상에 내 놓는 것은 그 행위자체가 별로 믿음직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그런 엉성한 도인들에게 속아넘어 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읍니다. 

왕필본과 문장이 같지만, 왕필본에서는 일곱번째로 순서가 바뀌어 있읍니다.

 

善者不多(선자불다); 도를 닦아서 순수하게 착한 이는 많지 않으며  

 <善>이라는 단어는 보통 말하는 "착하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일원적인 도인의 순수한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도를 완전히 깨달은 순수한 도인은 많지않고 아주 희귀하다는 말입니다. 

진짜로 궁극을 깨달은 순수하고 착한 도인은 이 세상에 거의 나타나지가 않읍니다. 그런 도인들이 간혹 세상에 소개되는 것은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환경에 의하여 저절로 시대상황에 맞춰어서 그 존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왕필본에서는 <善者不辯>으로 원문이 바뀌어 있으며,

해석은 " 착한 이는 변명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읍니다만, 백서본 원본 내용과는 전혀 의미가 달라져 있읍니다.

 

多者不善(다자불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순수하게 착하지 못하오. 

이 세상사람들이 거의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원화의 상대적인 물질세계의 가치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善>, 순수한 착함이란 바로 절대 본체의 바탕에 다달은 도인의 비이원적인 상태, 전체와 일체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거의 모든 세상사람들이 이 현상세계가 꿈같은 환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바로 그래서 순수한 착함이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왕필본에서는 <辯者不善>이라고 원문이 변경되어 있고,

해석은 " 변명하는 자는 착하지 않다"라고 되어 있는데, 말 자체야 그럴 듯 한데, 백서본 원본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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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장들과 아래 문장들은 백서본에서는 분장을 표시하는 < . >이 그려져 있는데, 왕필본에서는 한장으로 연속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위의 문장들과 아래 문장들은 그 내용이 연계성이 없고 의미적으로도 별도로 떨어져 있는 문장들입니다.

 

星人无積(성인무적); 성인은 (지식을) 쌓아두지 않지만 

 積;모으다,쌓다, 저축하다.

도를 깨달은 성인은 지식을 축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지식을 쌓아두지 않는다는 것은 이원적인 지성을 초월한 직관의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이원화적인 생각과 말로 된 개념이며, 일원적인 것이 아니죠.

따라서 성인은 모든 판단을 직관적으로 행할 뿐이며, 어떤 기억이나 지식을 가지고 논리적인 판단을 사용하지 않읍니다. 주객 이원화의 앎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지식의 기억을 사용하지 않고 그때 그때 부딪치는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직관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旣以爲人 己愈有(기이위인 기유유); 처음부터 남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자기가 지니고 있는 지식이 남보다 더 뛰어나게 되며

 旣; 이미,처음부터,본래부터, 以; ~때문에, 爲; 위하다, 人; 사람,남, 己; 자기, 愈; 더욱 더, (남보다) 뛰어낫다. 

 

 도를 이루면 전체가 일체가 되는 상태이므로 아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남을 위해서만 쓰기 때문에, 남에게 나눠주려면 남보다 뛰어난 지식을 저절로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남보다 뛰어 나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지성을 초월한 상태이 있으므로 모든 지식의 수준을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노자도덕경을 공부하면 본래부터 남을 가르치기 위한 공부이기 때문에 자신은 남보다 더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내용으로도 이해 할 수도 있읍니다. 

 

旣以予 己愈多(기이여인 기유다); 처음부터 남에게 베풀어 주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이 남보다 더욱 많아지게 되는 것이오.  

 予; 주다,베풀다.

이 문장도 위의 문장과 비슷하지만, 위의 문장은 지식의 깊이나 가치에 대해서 말한 것이라면,

이번  이문장은 지식의 넓이나 지식의 다양성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남에게 지식을 베풀어주기 위해서는 저절로 남보다 다양하고 많은 지식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 역시 본래부터 이 도덕경은 남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글이므로 이 도덕경을 공부하면 자신의 지식이 남보다 더 폭 넓게 풍부해진다는 내용으로도 이해할 수 있읍니다.

이러한  문장의 내용 때문에 후대의 왕필본 편집자들이 이 81장을 맨 마지막으로 편집해 놓은 것 같읍니다. 

 

故天之道 利而不害(고천지도 이이불해); 그러므로 하늘의 도는 이롭게는 하지만, 손해는 끼치진 않소. 

 여기서 하늘의 도란 노자가 주장하는 무위자연의 도를 말합니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는 많은 제자백가 사상들이 우후죽순처럼 성행하며, 각기 자기가 주장하는 사상이 도라고 내세웠고, 특히 공맹자의 유학이 노자의 무위자연도와 가장 큰 경쟁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며, 그러한 유학등 기타 제자백가의 잡사상들과 차별하기 위해서 , 도가(道家) 측에서는 오직 자기네 노자의 무위자연의 도만을 하늘의 도(天之道)라고 부른 것이죠.

이 노자의 무위 자연의 도는 그것을 닦는 사람에게는 이롭게는 하지만, 손해는 끼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의적이고 의도적인 것이 없이 '있는 그대로' 무위자연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롭게는 할지언정, 전혀 해를 끼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무위자연의 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노자도덕경을 공부하는 것은 이롭기는 하지만, 전혀 손해를 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人之道 爲而弗爭(인지도 위이불쟁); 사람이 도를 깨달으면 가르쳐는 주되, 논쟁은 하지 마시오. 

人;사람, 之;이르다,도달하다,爲; 배우다,가르치다.위하다,되다,하다. 爭; 다투다,논쟁하다.  

 

또한 깨달은 사람이 도를 펼치려고 가르쳐 주되 논쟁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읍니다.

사람들에게 널리 가르쳐 주되, 전체가 일체인 절대상태이므로, 상대적으로 논쟁 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도는 아무리 말과 논리로 논쟁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직접 자기 스스로 체득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노자의 무위자연의 도입니다.

왜냐하면, 이 이원적인 현상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저- 넘어, 이원성을 초월하여 지성으로는 알려지지 않는  비이원성의 절대바탕에 대한 것이므로, 도저히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 넘어, 생각과 개념 넘어의 것이기 때문에 말로 하는 논쟁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 문장에서 왕필본은 <聖人之道>로 바뀌었읍니다.

해석은 "성인의 도는 그저 남을 위할 뿐 다투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읍니다.

 

이번 노자도덕경 마지막 장에서 도를 배워서 깨치면 이롭긴 하지만,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노자 도덕경을 통해서 도를 배우고 또 배운 도를 남에게 가르쳐 주므로써 저절로  도의 심오한 지식을 남보더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또한 남에게 베풀어 줌으로써 저절로 많은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노자 도덕경을 통해서 도에 대해서 더 깊히 공부하게 되면, 저절로 도를 깨칠 수 있는 능력이 향상 될 수가 있는 것이죠.

단순히 글자 풀이나 남이 과거에 해석해논 글귀를 되짚어가며 읽어 보기 보다는 스스로 깊은 명상과 깊은 삼매상태를 체험하고 나서 이 노자도덕경을 해석해 보면,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고도, 남들이 써논 책을 보지 않아도 저절로 훤하게 모든 내용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수천년 동안에 남들이 써 놓은 해석이나 주석서라도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무엇이 잘 된 해석내용인지 즉각적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무한진인- .

2011년 02. 02. 밤11: 55분(음력 경인년 섣달 그믐날 밤. 끝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