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14. 20:00ㆍ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2011. 1. 1. 아침, 아차산에서>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71회]
[한문 원문]-백서갑본
知不知 尙矣
지부지 상의
不知不知 病矣
부지부지 병의
是以聖人之不病 以其病病
시이성인지부병 이기병병
是以不病
시이부병
[한글해석]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면 높이 숭상받지만 (깨달음)
알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면 잘못된 병이오. (無知)
그러므로 성인이 병이 아닌 것은
그러한 무지의 병을 병으로써 여기므로
그런 까닭에 병이 아닌 것이외다.
[해설]
이 장은 곽점본에는 없으며, 누군가가 곽점본 시대가 지나서 후대에 추가로 삽입한 장(章)인 것 같읍니다.백서본에서는 36장, 왕필본에서는 71장에 해당합니다.
한문원문은 백서갑본을 선택했는데,왕필본과 백서을본,기타 모든 본들의 원문이 다소 변형되어 있기 때문에,원본격인 백서갑본에서 말하고자하는 기본 의미가 다르게 왜곡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백서갑본 원문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이 71장의 내용은 앞장인 70장의 내용인 "근원은 오직 모를 뿐이다"라는 주제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읍니다.
내용을 간추려 보면,
알수 없는 의식(앎) 넘어 도의 본체를 깨달으면 고귀한 근원(참나)이 되지만,
의식(앎) 넘어에 있는 도의 본체를 깨닫지 못하면 무지의 병에 걸려 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깨달은 성인이 비정상적인 병의 상태가 아닌 까닭은,
의식을 넘어서지 못한 무지상태가 병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쳤기 때문에,
그 아는 자인 성인은 비정상적인 병의 상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즉, 아는 자는 알려진 대상이 아니죠.
본 해석내용은 기존에 출판된 다른 해석서와는 그 내용이 다르게 해설되었는데,
그 중요원인은 왕필본의 원문이 백서갑본 원문과 다르게 변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노자도덕경 해설은 왕필본으로 해석을 했는데, 왕필본의 원문은 모두 백서을본을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백서을본의 변형된 원문을 따르는 모든 노자도덕경 해설서는 원본격인 백서갑본의 기본 주제와는 전혀 다르게 그 뜻이 지금까지 왜곡되어 전래되어 왔던 것 같읍니다.
이제 백서갑본을 옳바르게 해석해 보면서, 또한 왕필본에서는 어떻게 원문이 변경되어 있으며, 그 왕필본 원문으로 해석한 내용이 원래 백서갑본의 내용과는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살펴 보겠읍니다.
知不知 尙矣(지부지 상의):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면 높히 숭상받지만
知; 알다. 尙; 높다,숭상하다. 矣; 어조사.
<知不知>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 에서 <不知, 알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인식을 초월한 그 넘어를 말하며,보통 깨어있는 의식 넘어 초월상태를 말하는데, 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따라서 <知不知 尙矣>는 도의 바탕에 다달은 도인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尙矣, 높히 숭상한다>라고 덧붙힌 것이죠.
구도자가 도를 얻기 위하여 수행을 한다는 것은 마음 넘어의 모름 속에서 안정되게 머물러 있기 위한 것이며,
온갖 욕망과 외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마음수행을 꾸준히 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킨 다음에, 마음 넘어의 더 깊은 의식으로 들어가서 전체가 하나가 된 삼매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어야 "나"라는 근본 에고의 옷을 벗어 버릴 수가 있읍니다.
"나"라는 존재느낌의 에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참나의 본성을 아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不知不知 病矣(부지부지 병의): 알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면 잘못된 병이오.
病; 병,결점 흠,
<不知不知>"알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 이 문장에서 뒤의 <不知>는 앎 넘어 "주시자"를 말하며, 앞의 <不知>는 "모른다"라고 해석되므로, 이 <不知不知>상태는 보통 도를 모르는 일반인, 즉 무지한 범부의 주객 이원화 의식상태를 말합니다.
즉 일원적인 도를 모르는 이원적인 무지한 상태를 "病"의 잘못된 상태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선불교의 선사들 어록에는 "無知한 것이 病"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의식상태는 몇몇 깨달은 도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無知의 病>을 앓고 있는 <無知의 환자>들입니다.
道라는 것은 자기의 변하지 않고 영원한 원래 참본성을 말하는데, 이 참본성을 알지 못하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이 현상세계를 실재한다고 여기므로써 물질적인 욕망과 외물에만 집착되어 영원한 자기 참본성을 잊어 버리는 허무한 삶을 살아가게 되므로,
이러한 무지상태를 다른 표현으로 말해서,
실재가 무엇인지 모르는 비정상적인 병(病)의 상태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도의 측면에서 보자면 깨닫지 못한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은 <無知의 病>을 앓고 있는 셈이죠.
그래서 이 세상사람들을 무지의 병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인류 역사상에서 위대한 큰 성인들이 간혹 세상에 나타나서 무지한 세상사람들에게 실재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침을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인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도를 배우는 조직이 생기면서 종교가 일어나고 큰 종교집단으로도 발전하는 것이죠.
그런데 아이러니칼 한 것은 그러한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오랜기간 성장하고 형성된 각 종교조직들이 세월이 오래 흘러감에 따라, 자기종교의 특정이념과 종교창시자의 숭배에만 집착하도록 신도들을 붙들고 있으며, 오히려 있는 그대로 자유스러운 인간본성을 한가지 인의적인 개념의 틀 속에 묶여 있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무지상태를 더욱 가속화시키며,지역간,민족간,종교간의 갈등과 대립,반목,등의 인류고통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때가 있읍니다.
따라서 종교 또한 그 발생초기와는 다르게 인류의 무지와 갈등을 더욱 조장하는데 한목을 하고 있다고 보아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읍니다.
요즘에는 일부 종교의 성직자들까지 적극적으로 속세의 정치적,사회적 갈등을 앞장서서 부추기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좀 심한 곳도 있을 것이고, 좀 덜한 종교도 있겠죠.
그러나 종교의 원래 목적은 사람들을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성인의 말씀으로 빛을 밝혀서 길을 인도해주고, 다양한 계층간의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을 영적인 자비심으로 해소하는데 그 힘을 쏫아야 겠지요.
道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면 그것이 <無知>상태입니다.
道나 참나,불성,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빠싸하게 잘 알아서 해당 종교의 경전을 앞장에서부터 몽땅 다 외울수도 있고, 거꾸로도 달달 외울수 있으며, 또 남에게 유창하게 해설을 해줄 수 있으며,아예 평생동안 그것만 직업으로 전공하여 선진국 일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몇개나 받은 사람일지라도, 참나의 본성을 체험적으로 직접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한낱 <無知人>에 불과 합니다.
반면에 도에 대한 이론이나 학식은 몰라도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서 전체와 하나상태가 되어 있다면 그는 무지한 사람이 아니고, 도를 아는 자, 즉 도인인 것입니다.
한편 위의 두문장 <知不知 尙矣, 不知不知 病矣>를 다른 측면으로 해석한 기존의 해석서에 대해서 언급해 보겠읍니다.
위의 한문문장을 해석하는 방식의 일예를 들어보면,
위에 있는 본 해석에서는 원문 문장을 뒤에서부터 앞으로 향해서 거꾸로 읽으며 해석했읍니다.
또 다른 해석방법으로는 문장을 앞에서 부터 차례대로 뒤로 읽으며 해석하는 방식도 있는데,
백서갑본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해 보면,
知不知 尙矣 ;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으뜸이다.
不知不知 病矣; 모르고서 모른 (척하는) 것은 병이다.
여기서 <~척하는>이라는 의미를 가진 한자는 이 문장에 하나도 없는데도,기존의 대부분의 왕필본 해석서들은 이러한 <~척하는>이라는 부사를 우리말 해석에 붙혀 왔읍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보니 앞문장인 <知不知 尙矣>는 말의 의미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맞추어 지지만,
뒷문장인 <不知不知 病矣>는 <모르고서 모른 (척하는) 것은 병이다>라고 해석이 되는데, 문장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또한 말뜻이 적절하게 연결되는 것 같지가 않읍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을 해본 이천 몇 백년전의 백서을본(왕필본) 필사자는 두번째 문장인 <不知不知 病矣>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변경하여, 해석하기 쉽게 백서본 원문을 아예 바꾸어 버렸읍니다.
백서을본에서부터 바뀌어진 문장이 바로 <不知知 病矣>로써 지금의 왕필본, 기타 모든 본에 있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것은 병이다>이렇게 해석되어, 보통사람이 이해하기는 아주 쉬은 문장으로 되어있읍니다.
현재의 대부분의 왕필본 해석서들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은 으뜸이고,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은 병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읍니다.
얼뜬 해석 내용을 보면 <겸양의 덕>으로 이해하기도 쉽고,아주 그럴듯하게 보이는데, 실은 백서갑본에서 전달하려는 원래 뜻으로 부터는 완전히 벗어난 잘못된 번역입니다.
위의 백서갑본은 <이 마음 넘어에 있는 도를 알면 높히 숭상받는 것이고, 마음 넘어의 도를 모르는 것은 무지의 병이다>라는 뜻을 가르쳐준 글인데, 왕필본은 단순히 많이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겸양의 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전장(66,67,68장)에서도 <겸양의 덕>에 대한 문장이 나왔지만, 엄밀히 말해서 '겸양의 덕'은 노자의 "있는 그대로" 무위자연의 道,德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공맹자의 유교적인 인(仁),예(禮)의 색채가 더 짙은 개념입니다.
따라서 백서 갑본의 원문을 개조한 백서을본부터 이렇게 문장이 개조되어 있으므로 중간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공맹자의 유교적인 교훈에 가깝게 변형시켰다고 볼 수 밖에 없읍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노자도덕경을 전문으로 연구하여 책을 출판한 학자들조차 이 부분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읍니다.
여하튼 백서을본부터,왕필본, 기타 대부분의 통용본들이 이와같이 잘못 개조된 문장으로 지금까지 해석해 온 것을 보면,
노자 도덕경의 이 장을 처음으로 접하는 본인으로서는 참으로 그 동안 수 많은 학자들이 많은 연구와 번역을 해 왔을 터인데, 왜 이러한 변경된 원문과 빗나간 해석들이 아직까지도 그대로 지적되지 않고 후대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수해 오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 장은 원래 백서갑본에서는 <의식넘어 도를 깨달으면 높이 숭상받고, 의식 넘어 도를 모르면 무지의 병에 걸린 상태>라는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던 문장인데,
백서을본부터 왕필본,하상공본 등 그 이후에 나온 모든 본들은 단순히 <학식을 많이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것은 높은 것이고, 몰라도 아는 척하는 것은 병>이라는 의미로 잘못 전달하고 있읍니다.
말하자면 백서갑본은 <일원적인 도의 깨달음>에 대해서 말한 것인데,
백서을본부터 그 이후 왕필본등은 <이원적인 겸양함의 덕>으로 전달되어진 것입니다.
是以聖人之不病(시이성인지부병); 그러므로 성인이 잘못된 병이 아닌 것은
그런데 현시대에도 마찬가지이지만,아마도 중국 고대사회에서도 도인이나 구도자, 혹은 도를 공부하는 사람을 평범하게 보지 않고 좀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를 지닌 특이한 사람으로 본 것 같읍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에 대한 일반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려고 한 말인 것 같읍니다.
성인은 도를 깨달았으므로 이 현상세계가 꿈과 같다는 것을 깨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실재하는 참본성을 알고 있으므로, 도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정상상태로써 높이 숭상받아야 할 높은상태이지만,
이 세상이 꿈과 같이 허황하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은 도의 관점에서 보면 <비정상적인 병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무지한 사람들은 깨달은 성인을 보고 평범하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병의 상태라고 여기므로, 여기서 깨달은 성인은 <잘못된 병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특별히 내세워서 말하고 있읍니다.
以其病病(이기병병); 위에서 말한 무지의 병을 병으로써 여기므로
以; ~라 여기다. 其: 그,(위에서 말한 무지의 병)
위에서 말한, 무지의식 넘어의 참나를 깨치지 못한 것이 무지의 병이라는 것을 도인은 명확하게 안다는 말입니다.
즉 앎을 넘어서지 못한 주,객 이원적인 상태가 자기의 참본성을 모르는 무지상태, 이 무지상태가 심각한 병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능력은 이원적인 앎을 벗어나 참본성을 깨친 사람만이 아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고 무지 속에 그대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잘못된 병의 상태를 있는지 조차도 자각하지 못하는 <無知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지한 줄 명확하게 알았다면 그는 도를 깨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여러가지 책을 많이 보아서 무지(無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그 이원화의 지성적으로 아는 그 자체가 바로 無知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무지를 아는 상태라는 것은 완전히 나라는 에고를 벗어 버리고 전체와 하나가 된 일원적인 보편적 의식에 완전히 합일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이원적인 지성으로 이해했다고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를 벗어났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 느낌'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요즘 망년회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해서 하던 얘기 또하고, 또 지꺼리며 횡설수설하는 사람에게 옆에 친구가 '야,너 지금 많이 취했어'하고 충고해주면, '나 아직 멀쩡한데, 하나도 안취했어'라고 우기는 사람처럼, 이 세상 모든 자칭 지성인들이 자신은 무지에 취해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자기가 무지하지 않다고 남에게 주장하는 것이 바로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증거인것이죠.
그러나 성인은 말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무지의 병에서 벗어났으므로, 그러한 도를 모르는 무지가 잘못된 병의 상태라는 것을 명확히 꿰뚫고 있는 것이죠.
是以不病(시이부병) ; 그 때문에 병이 아닌 것이외다.
성인은 이 이원적인 현상세계의 앎이 무지의 병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는 주시자로써, 무지를 지켜보고 있으므로, 무지의 병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지를 아는 무지의 주시자는 무지할 수가 없죠.
무지를 명확하게 알게되면 저절로 무지에서 벗어납니다.
잘못된 병임을 아는 자, 보는 자 자체는 잘못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는 자, 보는 자는 그 보여지는 대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현상세계 모든 것은 하나의 의식이 움직이고 있는 의식 변화현상인데,
그 움직이는 의식을 지켜보는 주시자는 항상 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있읍니다.
따라서 성인은 무지에서 멀찍암치 떨어져서 주시하고 있으면서,
무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은 절대로 무지의 병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 71장에서 <모르는 것 넘어를 아는 것>이 바로 도(道)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모르는 것>이란 마음의 인식을 초월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모르는 것 넘어를 모르는 것>이 바로 <無知의 病>이라는 것도 알았읍니다.
이 무지의 병에서 벗어난 사람이 바로 도를 깨친 도인인 것이죠.
흔히 기존 종교에서는 이 <모르는 것 넘어>를 <神>이라고 부르고 있읍니다.
그래서 그 신에게 기도하고, 헌신하고, 신의 말씀을 찬양하며, 신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염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읍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대상으로도 볼 수도 없고, 알수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의 마음 넘어, 의식 넘어가 "그것"입니다. 자기 앞에서 거치장스럽게 앞을 가리는 마음과 의식을 걷어 버리면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그 거치장스러운 마음의 장막을 걷어 내려면,
그 마음의 "앎" 영역을 건너서, "모름"의 컴컴한 지대를 넘어가면, 전체가 오직 밝음으로 비쳐오는 광명의 언덕이 있읍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참본성 또는 "참나"이며, 여기 노자도덕경에서 말하는 "道의 본체"입니다.
2011년 새해에는 아무쪼록 하시는 일마다 만사형통(萬事亨通)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
<약 1000년정도 묵은 고려시대 연꽃씨앗에서 1000년만에 피어난 연꽃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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