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5. 20:02ㆍ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원문]- 백서본
出生入死
출생입사
生之徒十有三
생지도십유삼
死之徒十有三
사지도십유삼
而民生生動 皆之死地之十有三
이민생생동 개지사지지십유삼
夫何故也
부하고야
以其生生也
이기생생야
蓋聞善執生者
개문선집생자
陸行 不避兕虎
육행 불피시호
入軍 不避甲兵
입군 불피갑병
兕无所투其角
시무소투기각
虎无所措其爪
호무소조기조
兵无所容其刃
병무소용기인
夫何故也
부하고야
以其无死地焉
이기무사지언
[해석]
태어난다는 것은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생기되 세상에 아예 나오지도 못하고 사라진 육체생명이 열에 셋 정도는 되고,
세상에 태어났지만 중간에 죽어 버린 육체생명이 열에 셋 정도가 되오.
그런데,
자신이 태어났다고 여기면서, 그것의 움직임을 따라서 살아간다면,
모두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것들도 열에 셋 정도는 되는 것 같소이다.
어째서 그러하겠소?
태어난 것(육체)을 자기자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외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전체와 하나가 된 도인은
뭍으로 나다녀도 코뿔소와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전쟁터에서는 갑옷과 무기도 착용하지 않소.
(도인에게는)
코뿔소가 뿔을 들이 댈데가 없고
호랑이가 발톱으로 할킬 만한 곳이 없으며
창칼이 찌르고 들어갈 만한 곳이 없소이다.
어째서 그러하겠소?
도인은 죽을 것(육체)이 아예 없기 때문이외다.
[해설]
이번 50장은 가장 오래된 곽점본에는 나타나지 않고, 백서본 이후부터 백서본과 기타 왕필본 등 여러본에 나타난 문장입니다.
한문원문은 백서본을 선택해서 해석을 했읍니다.
왕필본은 글자 몇개가 불필요하게 추가되거나 개작되어 있어서 기본 뜻이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있기 때문에, 백서본 원문을 그대로 수정없이 해석했읍니다.
이장의 원문은 크게 상 하 두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상단부는 태어나고 죽는 육체를 자기자신이라고 동일시하는 대부분 범부들의 죽은 자리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묘사하고,
하단부는 육체의 동일시를 초월한 도인의 일원적인 삶의 자리에서 사는 모양을 간단하게 비유적으로 묘사하면서 비교한 내용입니다.
본 해석내용은 기존에 출판된 다른 해설서들과는 좀 다른 내용으로 해석이 된 것 같읍니다.
육체가 태어나는 동시에 죽음도 함께 동반할 수 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사람(民,凡人)들은 몸을 자신이라고 동일시하므로써,
탄생과 동시에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려하니깐,
죽음의 자리(死地)에서 있지도 않은 남들과 투쟁하고 갈등하며 발버둥 칠수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몸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친 도인(善執生者)은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영생(永生)의 자리(절대바탕)에서
남도 없고 나도 없는 일체 하나가 되어 삶을 유지하므로
항상 여유있고 자유로우며, 죽음이 없는 전체적인 삶을 살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出生入死 : 태어남이란 (동시에) 죽음으로 들어감이오.
<出生>은 태어나서 나옴이고, <入死>는 죽음으로 들어감입니다.
즉 육체의 탄생과 동시에 죽음도 함께 동반한다는 말입니다,
자기자신이 태어난 육체라고 여기면 탄생은 가슴에 안고,동시에 죽음도 함께 등뒤에 지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나다"라고 자기를 육체와 동일시하면 "나"라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는 없는 것이죠.
없던 것이 불쑥 태어났다가 돌연히 사라지는 육체는 꿈같이 허황한 것입니다.
반면에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항상 변함없이 있는 절대본체를 자기라고 여기면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한 진아(참나)로 영생(永生)하는 것입니다.
"출생과 "죽음"은 한쌍으로써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항상 붙어 다닐 수 밖에 없읍니다.
육체의 출생이 곧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절대본체인 道는 태어나지도 않기 때문에 죽지도 않읍니다.
따라서 절대본체는 영원하고 항상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出生入死>의 속 의미는 육체의 태어남은 죽음을 함께 동반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육체라고 여기면, 자기는 출생과 동시에 죽음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깃들어 있읍니다.
生之徒十有三 : 생기긴 생겼는데, 세상에 나오지 못한 헛생명이 열에 셋이다.
徒:헛데이,보람없이,무리,동아리
生之徒 : 헛 생겨난 것. 十有三 : 열중에 셋(3할정도)
<生之徒>는 "살아있는 무리"라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徒>자는 "무리,동아리"라는 뜻으로 보통 사용하지만,
여기서는 <헛되이 또는 보람없이>라는 뜻으로 쓰인 문장입니다.
따라서 <生之徒>는 "생겨 난 것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태안에서 그대로 지워진 생명"을 말합니다.
요즘말로 자궁 속에서 태아상태로 낙태가 되어 헛 생겨난 생명을 말합니다.
이것을 <生之徒> 즉 "헛 태어난 것"으로 표현했읍니다.
전체를 열이라면 셋 정도, 즉 30% 또는 3할정도는 사람으로서 밖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자궁 속에서 그대로 낙태된 육체생명이라는 것입니다.
死之徒十有三 : 태어나긴 했는데 중간에 죽어서 헛삶의 생명이 된 것이 열에 셋이다.
死之徒 : (태어나기는 했지만) 중간에 죽어서 헛 살은 육체가 열에 셋이다.
<死之徒>는 "죽은 무리"라는 뜻이 아니라,
일단 세상에 태어나긴 했는데,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중간에 죽어서 헛살은 육체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육체가 어렵게 태어나긴 했는데 제대로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중간에 죽어버린 육체가 열에 셋, 약 30%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而民生生動 皆之死地之十有三
: 자신이 태어난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 탄생의 움직임을 따라서 살아간다면, 모두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이러한 것들도 열에 셋 정도는 되는 것 같소이다.
而: 같다(동일시하다) 그런데(말이을 조사), 民 : 나(자기자신) ,皆 : 모두
而民生 : 자기자신이 태어난 육체와 같다고 여기면.
生動 : (육체개인으로서) 활동을 일으키다. 즉 육체가 자기자신인 것처럼 육체 동일시 행동을 일으킨다.
<而民生 生動>두 문장을 합쳐서 해석하면,
"태어난(生)육체를 자기자신(民)으로 동일시(而)해서 개체의 활동(動)을 일으킨다면(生),"
<而民生>의 원래 문장은 <民而生>으로 <나자신은 태어난 육체와 같다>이지만,
<而>가 맨앞으로 전치되어 <자기자신을 태어난 것과 동일시 한다면>의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民>은 보통 쓰는 뜻은 "백성" "일반인"이라는 뜻이지만,
이 문장에서는 요즘에 보통사람인 <凡夫>라는 말에 해당하는 개체적인 사람, 나,자기자신을 뜻합니다.
<而民生>에서 <生>은 "태어난 육체"를 말합니다.
<生動>에서 <生>은 "動을 일으킨다"는 뜻이며, <動>은 육체를 자기로 여기는 "육체 동일시 행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에고적인 행위를 일으킨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육체를 자기라고 여기는 육체 동일시 행동을 일으킨다면,
모두가 죽어있는 처지가 되는데, 이것도 열명에 셋, 즉 약 30%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기 자신을 태어난 육체로 여긴다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할까요?
그 답이 바로 맨 처음 문장인 <出生入死> 속에 들어 있읍니다.
즉 <태어나 나온 것은 (동시에)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태어난 육체는 죽음도 함께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죠.
태어남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死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어난 육체는 탄생 그자체가 바로 죽음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육체를 자기자신이라고 동일시하면 바로 죽음의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만일 태어난 육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고, 자신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한 참나라고 여기면, 간단하게 영생(永生)이 되는 것이죠.
사람의 육체가 태(자궁)안에서 생겨서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3할이 없어지고,
세상에 간신히 태어나긴 했지만 중간에 죽어서 헛삶의 육체 생명이 3할이 되며,
육체씨앗이 잉태하여 6활정도는 아예 이세상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죽읍니다.
그런데 나머지 3활도 곧 죽어야 할 육체를 자기자신으로 동일시했으니 죽은 목숨들이나 마찬가지이므로,결국은 생명씨앗으로 잉태된 육체 생명 중에서 9할 ,즉 90%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나머지 10%는 아마도 육체의 자기동일시에서 벗어난 도인(善執生者)집단과 그와 비슷한 종교인이나 구도자같은 유사한 부류들이 차지하는 여유로 남겨 둔것 같읍니다.
夫何故也 : 어찌해서 그러한가?
어째서 그러한가? 하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
즉 바로 위에 있는 문장인 "자기자신이 태어났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이 세상 보통 범부들은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삶을 살고 있다,"는 구절에 대하여 스스로 왜 그러한가를 묻는 것이죠.
以其生生也: 그 태어난 육체를 (자기자신으로 여기며)살아가기 때문이다.
以;~로써~로 여기다.~때문에 ,其 : 그(대명사, 자기자신을 가리킴) ,
以其生 : 태어난 것(육체)을 자기자신으로써 여기기 때문에
生也 : 살아간다.
<以其生生也>는 "태어난 것(육체)을 자기자신으로써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라고 해석이 됩니다.
즉 태어난 육체를 자기자신으로 동일시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언젠가 불시에 육체가 죽으면 자기자신도 죽어 없어져 버린다는 죽음의 공포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죽음의 공포감을 지니고 있는 개체적 인간마음은 항상 자기 존재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끝없는 욕망과 에고적인 자존심, 존재욕구를 삶의 기간동안에 확장하려고 알게 모르게 남을 해치며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육체를 자기자신으로 동일시한다면,
육체 자체는 공간적으로 아주 미미하게 작고, 시간적으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찰라적인 한계성의 불안 때문에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욕망에 빠지고 자기존재의 확장과 연장을 위하여 자기도 모르게 남을 해치는 행위를 하게 됨에 따라 더욱 더 악습의 업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삶이란 죽어있는 것과 다를 바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자기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환상의 육체를 자기자신으로 동일시하며 살아가므로 진아의 상실,즉 참나가 죽은 삶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이 육체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신의 구원"이며, 참자기의 진정한 본성을 회복하는 옳바른 삶의 자리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는 작은 육체가 아니고, 모양없고 속성없는 전체적인 "無"이면서, 자각(전체앎) 자체라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육체의 자기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가 있읍니다.
그렇게 육체의 자기 동일시상태에서 벗어나서
전체와 하나가 된 "無"의 순수의식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아래 문장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善執生者>즉 "깨달은 도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읍니다.
蓋聞 善執生者 : 듣건데, 전체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이(도인)는
蓋聞 : 대략 들리는 바에 의하면, 蓋 : 대략. 뚜껑, 덮다. 聞:들리다,듣다.
善執生者 : 순수의식에 안정되어 살아가는 도인. 善 : 착함,순수함. 執 : 잡다,가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善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道人)는" 하고 다음 말이 이어집니다.
노자도덕경에서 <善>은 보통 현재 한국사회에서 쓰이는 "惡하다"의 반대의미인 "착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일체가 오직 자기자신으로써 평등하게 여기는 도인의일원적인 순수의식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執>은 "가지고 있다 또는 지니고 있다"의 뜻이며, <善執>은 "善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生者>는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석이 되죠.
따라서 <善執生者>란 "일체와 하나가 된 순수의식으로 안정되어 살아가는 도인"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 <善執生者>가 바로 <육체를 자기자신으로 여기는 육체의 자기동일시에서 벗어난 초인(超人)>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일개 사람이라기 보다 신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는 神人입니다.
자신은 육체가 아니고, 전체 우주라는 것을 깨친 眞人입니다.
따라서 이런 도인은 육체관념이 없읍니다.
물론 외부에서 볼 때에 감각작용에 반응하고 보통사람처럼 밥도 먹고 일상을 즐기며 사는 것 같지만, 그런 외부적인 것은 조작없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반응에 따라갈 뿐입니다.
그런 도인은 항상 내면에서 전체와 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그 사람을 보는 상태와 그 도인의 실질적인 내면의식상태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 이는 자기가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런 공포감이나 목숨에 대한 어떤 집착도 가지고 있지 않읍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래 내용에 비유적으로 나오고 있읍니다.
陸行 不避兕虎 : 뭍으로 다니면서도 코뿔소와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陸행: 뭍로 간다. 不避 : 피하지 않는다. 兕: 코뿔소, 虎: 호랑이.
여기서 뭍이란 아마도 쟝글같은 밀림 숲이나 산속을 말하는 것 같읍니다.
또한 이 속세세상을 비유적으로 뭍이라고 하고, 코뿔소나 호랑이는 속세의 욕망,유혹,쾌락의 대상 등을 비유한다고 볼 수도 있읍니다.
도인은 숲 속이나 산속에서도 코뿔소나 호랑이와 마주쳐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속세생활에서도 어떤 욕망이나 유혹의 대상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비유로도 볼 수도 있읍니다.
왜냐하면 도인은 육체를 자기자신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육체의 죽움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감각기관의 유혹에 홀리지도 않으므로, 코뿔소든 호랑이든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전체와 하나가 된 도인은 대상이 없이 모든 것이 자기자신이므로 두려워하거나 유혹당할 대상이 없는 것이죠.
入軍 不被甲兵 : 전쟁터에서도 갑옷과 무기를 착용하지 않는다네.
육체를 자기자신이라고 여기는 육체동일시에서 벗어난 도인은 전쟁에 임하더라도 자기 목숨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몸을 보호하는 갑옷이나 무기를 착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감각기관이나 욕망을 억지로 피하거나 보호 또는 억제하지 않는다는 비유로도 볼 수가 있읍니다.
궁극을 깨달은 도인은 몸이 없기 때문에 잃어 버릴 것도 없고 보호해야 할 것도 없이 자유롭다고 표현한 말 같읍니다.
兕无所投其角 : 코뿔소는 뿔을 들이 댈 데가 없고
외딴 쟝글 속에서 코뿔소가 어떤 짐승을 발견하고 뿔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도인에게는 육체가 없으므로 코뿔소가 뿔을 박을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도인이 저절로 발산하는 순수한 생기에너지로 인해 도인 주변에서는 야생 맹수들조차도 공격하지 않고 아주 순하게 변한다는 사실은 구도자들 사이에서는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일상 삶에 대한 제자들의 기록을 보면, 어느 때에 인근의 아루나찰라산에 제자 한명을 대동하고 산책을 나갔다가 산 중턱에서 벵갈호랑이나 표범을 만났지만, 그 맹수가 마하리지 일행에게 덤벼들지 않고 마하리지의 눈치를 보며 슬슬 피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 몇군데 나옵니다.
이렇듯 도인에게는 맹수도 덤벼들지 않는다는 것은 동화 속의 전설같은 사람들이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여러군데의 기록에서 발견됩니다.
이것은 도인이 육체 동일시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보편적 의식 안에 있으므로서 맹수들도 그 도인의 순수한 의식상태에 어느정도 동화되고 있는 것 같읍니다.
그러나 도인의 미세한 몸은 일체인 전체 우주세계가 되므로, 누가 누구에게 공격하거나 공격 당하는 등, 주객 이원적인 세계에서 초월해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읍니다.
虎无所措其爪 : 호랑이는 발톱으로 할킬 곳이 없으며
도인은 육체가 없고, 전체와 하나로 동화되어 있으므로
호랑이도 발톱으로 할킬 곳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읍니다.
나와 대상으로 이원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어떤 에너지 흐름이나 관계가 주간과 대상사이에 형성될 것이지만, 만일 전체가 대상없이 일원적인 하나가 된다면, 주관과 대상이 구분없이 모두가 일체이므로, 오직 움직임없는 바탕, 참나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원적인 순수상태를 비유적인 표현으로 묘사한 것 같읍니다.
兵无所容其刃 : 창칼은 찌르고 들어갈 만한 곳이 없네.
모양도 없고, 어떤 속성도 없으므로 어떤 공격에도 먹혀들어가지가 않는다는 것이죠.
즉 주관과 대상이라는 상대적인 관계가 있어야 서로간에 찌르고 베는 싸움이 전개되는데, 모두가 하나인데 누가 누구와 싸우고, 누가 누구를 찌르고 베겠읍니까?
즉 태어난 육체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면,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일원적인 순수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夫何故也 : 무슨 까닭인가?
위에 열거한 여러가지 도인(善執生者)의 기이한 현상들이 왜 그런가? 하고 묻고 있읍니다.
以其无死地焉 : 도인은 죽음(육체)이 없기 때문이네.
以: ~때문이다. 其: 그(참나, 도인,善執生者), 无死地 : 죽음이 없다.
태어난 육체는 죽음이 있지만, 도인(참나)은 자기육체와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없는 것이죠.
도인은 몸이 있긴 하지만, 몸이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도인은 몸이 있던 없던 상관없이 항상 있는 그대로의 참나상태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도인은 죽음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고 육체에 대한 집착도 없는 것이죠.
육체가 태어나든 또한 육체가 죽든 상관없이 영원불멸하는 참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도인은 육체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어떤 상황에 부딪치드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번 50장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내용이긴 하지만,
모든 정신수행과 구도체계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육체의 자기 동일시" 문제를 깨우쳐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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