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선사] 악취가 나는 말(惡氣息)

2024. 8. 30. 22:16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옛 스님이 이르시되,

"이 문에 들어와서는 지해(知解)를 두지 말라. "

하시고 또 이르시되,

"간절히 천착(穿鑿)을 금한다."

하시고 또 이르시되,

"지묵(紙墨)에 오를까 두려워한다. "

하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부처님께서 말갈타국에서 외부와의 문을 막고 수행하신 일과

달마대사께서 소림(少林)에서 면벽(面壁) 하신 일이 오히려 전적(傳迹)이 부끄럽고,

임제 선사의 할(喝)과 덕산스님의 방(榜)이 또한 마음을 훔치는 귀신을 면치 못하거늘,

어째서 장구(章句)를 찾아서 따내어 어지러운 언설로 사람을 속이며 무리를 미혹시킬 것인가.

 

영리한 이가 산각산 생기기 전과 한양성 만들어지기 전과 선학원(禪學院) 창립하기 전에 알아가더라도 오히려 허물이 적지 않고 크게 우둔함이어늘 하물며 한강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관악산 빛에 눈을 붙임이랴.

말세가 되어서 그러한가. 불법의 기운이 변천함인가 !

소위 본색납자(本色衲子)가 입술을 나블거려 지식을 과장하며 휘호를 일삼아 가지를 당기고 넝쿨을 끌어다가 지분(脂粉)을 발라서 무시겁래(無始劫來)의 업식종자(業識種子)를 희롱하여 생사의 뿌리와 싹을 일으킴이랴.

 

조금이나마 선가의 가풍을 드러낼 것 같으면 전 조선의 선원(禪院)에 선중(禪衆)이 삼십 명, 이십 명, 삽여 명이 함께 모인 것을 낱낱이 한 삼십 방망이를 주어서 쫓아 헤쳐버리고 껄껄 웃고 돌아오면 조금쯤 그럴듯할 것이나 우선 나부터 말한 몇마디 말이 악취나는 말(惡氣息)이 되어 가추(家醜)를 드날려 대중에게 쏘여 마쳤으니 참으로 이른바 혹 때려다가 혹 하나 붙인 셈이다.

참으로 우습고 우습도다. 피를 토하도록 울어도 소용없으니 입을 다물고 남은 봄을 보내느니만 못하리라.

 

그러나 모든 부처와 조사가 어지러이 말하신 것이 큰 자비의 원력으로 출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삼각산이 생겨나고 한양성이 만들어지고 선학원이 창립되었던 것이다.

어서 정진하여 이 위없는 큰 도를 대중에게 권발하소,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에 이 몸을 제도하리요.

백천만 겁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만난 김에 부리런히 닦아보세.

 

동산화상(洞山和尙)이 자신을 경계하여,

"한낱 허환한 몸이 능히 몇 날이나 사는데 저 부질없는 일을 위하여 무명(無明)을 기르는고"

하셨으니, 우리 중생들의 조석으로 용심하는 것을 관찰하여 보면 모두가 성현의 꾸짖으신 일이로다. 탐욕과 성냄과 질투와 아만과 게으름으로 죄업의 불에 나무섶을 더하며, 헐뜯고 칭찬하는 시비와 득실영욕으로 항상 쓰는 재보로 삼으니, 어찌 가련하지 않으리오.

법계(法界)를 깨달아 닦으면 범부가 성현 됨이 한 생각 사이에 일어나니,

나의 지식이 짧으나 대강 들어 말해보자.

 

탐욕이 일어날 때에 탐심이 나는 근본을 살펴보면 본래 공적(空寂)하여 없는 마음을 제가 스스로 일으켜서 무한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누에가 제 몸 속에서 실을 내어 제 몸을 결박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관찰하여 당장에 미혹을 한 칼로 두 쪽을 내서 다시 상속하지 말라.

상속하면 범부의 망령스러움을 그대로 사용함이여,

억압하여 끊어서 나지 않게 하면 이승(二乘)에 항복함이여,

당처가 공적하여 끊음없이 끊어야 대승(大乘)의 깨달은 지혜요,

깨달은 지혜가 둥글게 밝아서 생각마다 어둡지 않으면,

탐욕과 애착이 곧 해탈의 진원(眞源)이요, 마왕이 곧 호법(護法)의 선신(善神)이 된다.

 

탐애 질투와 아만과 게으름이 또한 이와 같아서 마음 마음이 깨달아 파(破)하면 마음 마음이 부처다. 그러므로 육조대사(六祖大師)가 이르시되,

" 앞생각이 미(迷)하면 중생이요, 뒷생각이 깨달으면 부처요,

앞생각이 경계에 집착하면 중생이요, 뒷생각이 경계를 떠나면 부처니라." 하였다.

그런즉 부처와 중생이 한 생각 사이에 나의 마음 쓰는 대로 성립되니

이것이 곧 살활자재(殺活自在)의 기권(機權)이다.

이 기권을 잡아쥐고 나의 수중에 뜻대로 수용하는 동시에야 어찌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할까 근심하리오. 마음마음이 깨달아서 깨달음이 순숙(純熟)하면 자연히 항상 깨닫게 되리니 항상 깨닫기 때문에 대각(大覺)이요, 대각이기에 각사(覺士)라 한다.

 

무연(無緣)의 대자비로 유연중생을 제도하면 그 누가 대장부, 천인사(天人師), 세존이 아니리요.

그런즉 성불은 마음에 있고 겉모양 치장에 있지 않다.

또 깨달음은 지혜로 깨달아 살피는데 있고, 의식으로 널리 힘들여 구하는데 있지 않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시되,

"고기가 뼈를 바꾸어 용이 됨에 그 비늘을 바꾸지 않고 범부가 마음을 돌이켜 부처가 되어도 그 얼굴을 고치지 않는다. "고 하였다.

 

언제나 불심은 스스로 뜻을 얻은 뒤에 스스로 도를 이루는 것이요,

필경 언어 문자에 속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뜻을 얻고는 말을 잊는다 하시고 또 마음을 얻으면 세간의 껄끄러운 말이나 자상한 말이 모두 법문이요, 마음을 잃으면 염화미소(拈花微笑)가 또한 말뿐이라 하였다.

 

그런즉 위에 제시한 갈등이 마음을 얻음인가 마음을 잃음인가.

그러므로 몸이 혈기있는 사람은 기상을 나타내보시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십만팔천 리나 멀어진다.

그러면 머뭇거리지 않음이 도리어 얻음인가?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기를,

 

밤길 걸을 때 흰 것을 밟지 마소.

물이 아니면 돌이올시다.

 

                                                                       <禪院 제 2호, 193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