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스님 법문] 열 가지 큰 원력(1)

2024. 7. 26. 22:26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법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있고, 종사(宗師)가 법좌에 오르기 전에 있고, 법문 듣는 사람이 자리에 앉기 전에 있고, 종사가 무엇을 말하려는가 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있다.이 도리를 바로 알면 되는데 그것을 모르니 부득이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게 되고 들어야 하는데,교가(敎家)에서 경(經)을 보고 말하는 것과, 선가(禪家)에서 조사종품(祖師宗風)을 드날리는 선리적(禪理的)인 법문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흰 구름 모두 흩어지고, 붉은 해 동녘에서 솟아오르니

낯을 우러러 하늘을 보고, 또 머리를 낮추어 땅을 보고

동서남북을 임의대로 맡기니 마음대로 볼지어다.

白雲消散 紅日東昇

仰面看天 低頭覷地

東西南北 一任看光

 

누구든지 산을 볼 때에 산이 푸르고, 물을 볼 때에 물이 푸르게 흘러내려 가지만,

수행이 그 어느 경지에 올라가면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양을 해야 이 말이 통하지, 자기 심리를 닦지 않은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귀에 담아 놓으면 금강 쇳덩어리를 머금은 것과 같아서 이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말에 계합(契合)하게 된다. 그러니 이제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더니

한층 더 나아가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이 또한 요묘한 도리인 것이다.

 

어떤 경전을 보고 어떤 설법을 들어도 그 내용은 전부 다 내 자성(自性) 자리를 닦아 경성성불(見性成佛)해서, 중생교화(衆生敎化)를 하라는 말뿐이다.

우리가 이 몸을 애지중지하지만,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생리적으로 따져봐도 부모님의 물건이지 내 물건은 아닌 것이다. 참으로 나(眞我)라고 하는할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소소령령(昭昭靈靈)한 그 자리가 곧 나의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수요, 나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모르는 것은 흡사 남의 집에서 단 하룻밤을 자도 주인을 안 찾아 보면 무례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몇십 년을 끌고 다녀도 자기 주인공을 안 찾아보고 또 설사 찾으려 해도 힘이 드는 것이다.

 

석가여래께서도 왕위를 버리고, 설산에 들어가 이 자리 하나 밝혔다.

여러분이 먹고 입고 거주하는 의식주(衣食住), 세 가지 일에 날마다 노력하는 스물네 시간 가운데,

아홉 시간 일하고 다섯 시간 놀고 여섯 시간 잠자고도 네 시간이 남아 있으니, 다만 한 시간이라도 내 주인공을 찾는 여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앉아서 자성자리를 찾고 있지만, 마음은 서울로 쫓아갔다가 부산이나 대구로 갔다 오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나간 일 현재 일 미래 일이 생각나, 그 망상도적이 들어앉게 된다.

집안에 도적이 들어 앉아 있으면 주인이 방에 들어가기도 무섭고 겁이 나서 밖으로 쫓겨나가듯이, 망상 이것이 앞을 가리면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순일하지 못하다.

즉 화두(話頭)가 일념으로 되지 않는다.

 

이것을 순일하게 하려면 수련을 하고 자신을 닦아가서 그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아주 탁한 구정물을 가만히 놓아두면 맑게 가라앉듯이, 이 마음 자리가 본래 고요한 자리지만 자기가 흔들어서 구정물을 일으켜 놓은 것이다.

지극히 고요한 데 들어가 보라. 들어가려 해도 안된다.

망상 이놈이 앞을 가려 주인 노릇을 하니 도무지 그렇게 안된다.

안되지만 수련을 오래 하면 그 분주했던 마음이 다 쉬어져서 쉬고 쉬는 거기서 해야 한다.

 

여러분이 걱정을 하지 않으려 해도 어느 틈엔지 걱정이 생겨서 내보내려 해도 안 나가고 들어와서는 가슴을 치고 머리를 친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게 된다.

내가 늘 말하기를 이 사바세계에서 우리가 나왔는데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바탕 멋들어지게 하고 가자는 말이 그런 까닭이다.

 

늘 근심걱정만 하고 살 바에야 무엇하러 어머님으로부터 나오기는 나욌느냐.

좀 근심스럽고 걱정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다 털어버려라.

우리 인생이 기껏 살아봐야 백 년을 더 사는가.

그러니 늘 쾌활하고 낙관적이고 활기찬 생활을 해야 한다.

근심걱정은 물질 아니면 사람에 관한 것인데, 설사 좀 근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불타의 그 초월한 정신에 계합하여 인생의 노선(路線)과 인생관(人生觀)을 확립해야 한다.

 

여태껏 생활해온 모든 사고방식과 생활관념에 잘못이 있으면 모두 비워버리고, 바르고 참되고 활발한 산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 말씀인데 참선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 자리를 찾는 것이다. 선을 선이라 함은 선이 아니요, 법을 법이라 하면 법이 아니요, 부처를 부처라 하면 부처가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불(佛)이나 법(法)이나 도(道), 이 전부가 일체 명(名)과 상(相)이 끊어졌다.

여러분의 몸을 끌고다니는 것이 혹 마음이다 혹 정신이다 하지만, 어디에 마음이라고 쓰여져 있나? 그 자리를 일체 이름과 모양이 떨어진 자리다.

진리 그 자리, 여러분이 그 진리 한 마디 들어야 한다.

그 법문을 듣고 다만 하루에 반시간이라도 돌이켜 반조를 해봐야 한다.

 

                                                        - 경봉선사 설법집 < 니가 누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