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선사] 행장(行壯)- 가신 이의 모습(3)

2024. 6. 24. 21:03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경인년 설날,

지공스님은 황제의 아내가 올린 붉은 가사를 입고 방장싱 안에서 대중을 모아놓고 말했다.

"밝구나 법왕이여, 높고 높아 이 나라를 복되게 하는구나. 하늘에는 해가 있고 해 아래는 조사가 있다. 늙었거나 젊어거나 지혜있는 이라면 모두 여기 나와 이 늙은이와 마주 보자/"

대중이 대답이 없자 (나옹)스님은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밝다고 해도 오히려 멀고 먼 말인데, 높고 높아 나라를 복되게 하나니, 해 아래의 조사니 하는 따위를 함께 쓸어 없애버린다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

지공스님은 옷자락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 안팎이 다 붉네."

스님은 세 번 절하고 물러나욌다.

 

그해 봄 삼월, (나옹)스님은 대도를 떠났다.

그리고 통주에서 배를 타고 사월 초파일날 , 평강부에 이르러 휴휴암이라는 절에서 여름 안거를 지냈다. 칠월 열 아흐렛날, 스님이 절을 떠나려고 하니, 그곳 큰스님이 옷소매를 잡고 더 머물다 가라고 했다. 스님은 이 스님에게 게송을 지어 주었다.

 

휴휴암,

지팡이 휘날리며 찾아온

이곳,

일어남도 사라짐도 함께 비워 놓고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쉬고 또 쉬었지요.

휴휴암,

머물면 그 순간 휴휴암이 아니라서

나는 떠납니다.

휴휴암으로

하늘 땅이 편히 쉴 내집이라

하늘로 땅으로

뜻대로 노닐고저,

 

팔월에 정자선사라는 절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사는 몸당 노스님이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나라에도 참선법이 있는가?"

스님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해 뜨는 우리나라에서 해가 떠야

강남 땅 산과 바다는

함께 붉어집니다.

그런 말씀 마시지요.

우리는 우리

너는 너라고

신령한 빛이야

언제나

그 빛이지요.

 

그 노스님은 말이 없었다.

스님은 곧 평산 처림스님을 뵈러 갔다.

평상스님은 마침 승당 안에 있었다.

스님은 곧장 승당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일없이 거닐었다.

평상스님이 물었다.

"스님은 어디서 욌소?"

"대도에서 왔습니다. "

"어떤 사람을 보고 왔소?"

"인도에서 온 지공스님을 보고 았습니다."

"지공은 날마다 무슨 일을 하던가?"

"그 스님은 날마다 천 자루의 칼을 씁디다."

"지공이 쓰는 천 자루의 칼은 그만두고 자네가 쓰는 칼 한 자루나 가져와 보게."

스님은 방석을 들어 평상스님을 후려쳤다. 평상스님은 선상 위에 쓰러지면서 소리쳤다.

"이 도적놈이 나를 죽인다 !"

스님은 평상스님을 바로 붙들어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제가 쓰는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살리기도 합니다. "

평산스님은 '하하' 크게 웃고는 곧 스님의 손을 꼭 잡고 방장실로 들어가 차를 권했다.

스님은 몇 달 동안을 평상스님과 함께 지냈다.

 

어느 날 평산스님은 손수 이런 글을 적어 주었다.

"고려에서 온 혜근 수좌가 이 늙은이를 찾아왔는데, 그가 하는 말이나 토해내는 기상을 보면 부처님이나 조사스님과 걸맞다. 조사의 가르침을 읽어내는 눈이 더없이 밝고, 깨친 바가 높고 험하며, 말 속에는 메아리가 있고, 글귀마다 칼날을 감추었다. 여기 설암스님께서 나의 스승 글암스님께 전해주신 가사 한 벌과 불자 하나를 주어 내 믿음을 나타내고 이 게송을 짓는다."

 

오늘,

이 가사와 불지를

그대에게 맡기련다.

그대는 돌 속에서 꺼낸

티없는

옥이로구나

영영 맑을 그 계행은

깨달았기 때문이지.

선정과 지혜의 빛

함께 갖춘 그대여.

 

지정 십일 년 신묘 이월 초이틑날,

스님이 평상스님의 곁을 떠날 때 평산 스님은 다시 글을 적어주며 스님을 보냈다.

"고려에서 온 혜근수좌가 먼 길을 돌아돌아 이 호숫가에 와서 서로 의지하고 지내다가,

다시 두루 스승을 찾아보고 싶어 내게 거침없이 나아가게 할 글을 써주라고 한다.

토끼 뿔 주장자를 들고 천암 스님의 깨달음 속으로 들어가게. 그곳에서 모든 조사스님들이 세운 방편을 한꺼번에 부숴 버리면, 주고 받을 것 없는 곳에서 반드시 주고받을 것이 있을 것일세.

게송을 지어줌세."

 

운문도 꾸짖는

저 회암의 판수,

모래알 같은 하늘과 사람

한입에 꿀꺽,

밝은 스승 다시 만나

한바탕 눈을 뜨면

그 설법.

열반의 집 속에서

번개치듯

흐르리.

 

                                                                     - 무비 역주 <나옹선사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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