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9. 21:55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화 첫머리에 마하리지가 물었다.
"오늘은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 할까요?"
참석한 사람 대부분은 이전의 대화 모임에 많이 참여했던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마하리지가 스스로가 주제를 정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간의 주제가 다양한 것도 아니었기에 무엇을 이야기하리라는 것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마하리지는 늘 한 가지의 주제, 즉 인간의 참된 본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한 방문객이 이렇게 물었다.
" 인간의 참된 실체를 늘 의식하기 위해서 붙들어야 할 무엇이 있습니까? "
마하리지는 웃으며 그런 사고방식이 모든 문제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붙들을 " 그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에서,
당신은 이러한 일련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습니까?
사실은 사실대로 볼 수만 있다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본다는 것은 보는 자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걸 말하는데,
사실은 사실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봄으로는 곤란합니다.
완전히 부적합하지요.
아주 특별한 종류의 지켜봄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직관적으로 보는 것, 내면으로부터의 봄(in - seeing)이 필요합니다.
그 안에서는 보는 자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제 자체는 이렇습니다.
실체는 없으나 너무나 가득차고 충만해서 다른 주제는 그러한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붙들을 어떤 공식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내면으로부터의 봄"을 알아야 공식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단지 공식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만트라 같은 몇마디 말들만 받아들인 셈이 됩니다. 그 뜻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만트라는 효능은 잃어버리고 만트라에 대한 지식만을 갖게 되겠지요.
이 공식 또는 마하 바카(Maha Vakya)의 진정한 의도는 보는 것을 브라만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항상 기억할 것은 존재하는 이것(this that I am)과 드러나는 그것(that that I appear to be)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현시되지 않은 것과 현시된 것, 실제와 현상,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현시란 현시되지 않은 것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단지 거울에 비치듯 그것이 표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달리 말하면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본래부터 이중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객체란 주체없인 잠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주체 역시 객체 없이는 잠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체로서의 존재하는 이것(this that I am)은 현상으로서의 드러나는 그것(that that I appear to be)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또한 그 안에 내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실체와 그것의 현상 사이에는 불가분의 동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시에서 무엇이 일어납니까?
실체로서 내가 존재합니다. 비록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잠시라도 나는 존재하는 이것(this that I am)이 아닐 수 있습니다.
현편, 현상으로서의 나는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객체(대상)들은 의식 속에서 나타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거울 속의 상처럼 말이죠.
사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식 속의 투영일 뿐 다른 어떤 존재를 따로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나"가 의식입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의식의 내용물인 마음은 객관화의 과정을 밟습니다.
이 객관화의 과정은 이원화의 개념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즉 개념상으로 주체와 개체의 구분, 기쁨과 고통처럼 상호 밀접한 반대 개념을 통해서만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실체적이고 영원하며 순수주체인 "나"가 분리되지 않은 채로, 전체적으로, 성스럽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개념화의 과정에서 인식할 수 있기 위해 드러난 것, 즉 객체(대상)는 두 개의 개념이 주어져야 감지될 수 있습니다. 공간이라는 개념에서 모양과 크기가 주어져야 하며,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기간이 주어져야 인식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전체적이고 잠재적인 실체와 현상 사이의 완전한 일치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 속의 소위 속박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발 붙일 근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속박의 느낌은, 여러분이 한계성과 카르마의 인과에 종속되는 실체라고 생각되는 환상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기본적이고도 본질적인 영속성을 통각(統覺)했다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요소는 드러난 현상을 인식 가능케하는 장치일 뿐이며 따라서 속박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필히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본질을 통각하지 못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요소는 인과 개념의 기본을 형성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속박을 가져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상대적 현시, 즉 세상은 비현시된 절대의 표현이기에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비현시된 절대는 세상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없는 것은 여러분의 잘못된 인식, 즉 어떠한 특정 현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릇된 인식입니다. 그런 것은 정말로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림자는 실체없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실체는 아닙니다.
-라메쉬 발세카 지음, 이명규 역<담배가게의 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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