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6. 21:35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마하리지 : 세계를 지각하는 자는 세계 이전입니까, 아니면 세계와 함께 생겨납니까?
질문자 : 정말 이상한 질문이군요 ! 그런 질문을 왜 하십니까?
마하리지 : 그 정답을 모르면 그대가 평안을 발견하지 못할 테니까요.
질문자 : 아침에 깨어나면 세계는 저를 기다리면서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세계가 먼저 생겨납니다. 저도 생겨나지만 훨씬 나중이며, 가장 올려 잡아도 제가 태어났을 때입니다. 몸은 저와 세계 사이를 매개합니다. 몸이 없으면 저도 없고 세계도 없을 것입니다.
마하리지 : 몸은 그대의 마음 안에 나타나고, 그 마음은 그대의 의식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그대는 의식이라는 강을 지켜보는 부동의 주시자인데, 이 강은 영원히 변하지만 결코 그대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그대 자신의 불변성은 워낙 명백해서 그대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대 자신을 잘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런 모든 오해와 착각이 해소될 것입니다. 물에 사는 모든 미물들은 물 안에 있고 물없이는 존재할 수 없듯이, 모든 우주는 그대 안에 있고 그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질문자 :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릅니다.
마하리지 : 신은 그대 마음 속의 한 관념입니다. 사실은 그대가 신입니다. 그대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 내가 있다"입니다. 여기서 "지금 여기"를 제거하면 "내가 있다"가 남는데, 이것은 범접할 수 없습니다. 말은 기억 속에 존재하고, 기억은 의식 속에 들어오며, 의식은 자각 안에 존재하고, 자각은 존재의 수면에서 빛이 반사되는 것입니다.
질문자 : 하지만 저는 세계가 어떻게 제 안에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나는 세계 안에 있다"는 아주 명백한데 말입니다.
마하리지 : "나는 세계다. 세계가 나다." 라고 말하는 것조차 무지의 한 표지입니다. 그러나 나와 세계의 동일성을 명심하고 삶 속에서 확인하면, 어떤 힘이 내 안에서 일어나 무지를 파괴하고 그것을 완전히 태워버립니다.
질문자 : 무지의 주시자는 무지와 별개입니까? "나는 무지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의 일부 아닙니까?
마하리지 : 물론 그렇지요. '내'가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있다"가 전부이며, 다른 모든 것은 추론입니다. 그러나 그 추론이 하나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각하기와 보기의 모든 습관을 파괴하십시오. "내가 있다"는 느낌은 더 깊은 어떤 원인의 현현인데, 그것을 진아, 신, 실재 혹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무방합니다. "내가 있다"는 세계 안에 있지만, 그것은 세계에서 나가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수면에 일렁이는 달은 물에서 보이지만, 그것은 하늘에 있는 달에 의해 생긴 것이지 물에 의해 생긴 것은 아닙니다.
질문자 : 하지만 제가 그 주안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아가고 움직이면서 저의 존재를 갖는 이 세계는 제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 곧 미지의 세계, 있는 그대로의 세계, '절대적 물질'의 세계 -- 이 물질이 무엇이든-- 위에 비친 저 자신의, 저의 상상의 한 투사물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의 창조물인 세계는, 궁극자, 곧 실재하는 세계와는 아주 다를 수 있겠지요. 마치 영화의 스크린이 그 위에 영사되는 화면들과 아주 다르듯이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이 절대적 세계는 저 자신과 아주 독립하여 존재합니다.
마하리지 : 정말 그렇지요. 그대의 마음이 상대적인 비실재성의 세게를 그 위에 투사한 절대적 실재의 세계는 ('사람'인) 그대 자신과 독립해 있습니다. 그것이 곧 그대 자신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말입니다.
질문자 : 용어상의 모순은 없습니까? 독립성이 어떻게 동일성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변화의 움직임을 조사해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변하지 않을 때 변할 수 있는 것은 그대에게서 독립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은 변치 않는 다른 무엇과도 하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원성은 상호작용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상호작용은 변화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절대적으로 물질적인 것과 절대적으로 영적인 것,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과 전적으로 객관적인 것은, 바탕과 본질 양면에서 동일합니다.
질문자 : 3차원 그림에서처럼 빛이 그 자신의 스크린을 형성하는 거로군요.
마하리지 : 어떤 비유도 무방하겠지요. 파악해야 할 주요 요점은 그대가 자기 자신 위에 그대 자신의 상상물인 세계를-- 기억에, 그리고 욕망과 두려움에 기초한 세계를 -- 투사헤 왔다는 것, 그리고 그대가 자기 자신을 그 안에 가두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주문을 깨뜨리고 자유로워지십시오.
질문자 : 그 주문을 어떻게 깨드립니까?
마하리지 : 사고와 행동에서 그대의 독립성을 주장하십시오. 어쨌든 무든 것은 그대 자신에 대한 그대의 믿음과, 그대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실재한다는 확신에 매달려 있습니다. 왜 자신의 믿음을 의문시 하지 않습니까? 분명 이 세계는 그대가 의식의 스크린 위에 그린 것이고, 전적으로 그대 자신의 사적인 세계입니다. "내가 있다"는 느낌만이, 비록 세계 안에 있어도 세계의 것이 아닙니다. 논리나 상상으로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내가 있다"를 "내가 없다"로 바꿀 수 없습니다. 자신이 존재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그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그대 자신의 투사물이라는 것을 일단 깨달으면 거기서 벗어납니다. 그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그대 자신을 벗어나게 할 필요는 없지요! 그 그림이 어떤 모습이든, 어름답든 추하든, 그대가 그것을 그리고 있고, 그대는 그것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대에게 그것을 강요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 그것은 상상적인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습관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상상적인 것은 상상적인 것으로 보고 두려움에서 벗어나십시오,
이 양탄자의 색상은 빛에 의해 드러나지만 빛이 그 색상은 아니듯이,
세계는 그대가 원인이지만 그대는 그 세계가 아닙니다.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을 신이나 섭리라고 부를 수도 있겟지만,
궁극적으로 그대가 곧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지, 그 반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어떤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 질문을 던질 그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 엠 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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