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9. 21:49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기 순복
[본문]
ㅇ. 그들 자신('나'와 '내 것')을 신께 온전히 내맡기는 사람들에게는 신이 지금 여기에서 그 자신을 내준다네. 그들 자신을 (신 안에서) 잃어버리고 그것 (브라만)의 형상에 대한 지(知)를 얻은 이들만이 수승하고 순수한 시바 - 체험을 즐기게 될 것이네.
[스리 무르사나르 해설]
자신을 하나님에게 내 맡긴다는 것은 '나'와 '내 것'이라는 관념을 내맡기는 것이다. 하느님이 그 자신을 내준다는 것은, '나'와 '내 것'을 잃어버린 뒤에 존재- 의식-지복만이 남는 것을 뜻한다.
그가 존재-의식-지복으로서 빛을 발하는 것의 본질을 나타내기 위해, 스리 바가반은 "그런 사람은 지(知)를 얻고 지복에 빠진다"고 말한다. '나'와 '내 것'이 상실되자 마자 우리 자신의 성품인 존재,의식,지복은 즉시 빛을 발하기 때문에, 본 연에서는 하느님이 "지금 여기에서" 그 자신을 내준다고 말한다.
[본문]
ㅇ. 장애를 소멸하는 신의 두 발에 대한 (치열한) 명상의 힘을 통해 자신이 형상인 에고-의식이 지멸됨으로써, 신적 근원 안에서 자기를 상실함인 개아의 순복이야말로, 잘 살펴본다면 온갖 힘든 노력인 헌신의 결심이라네.
[해설]
어떻게 하느님의 두 발에 대한 치열한 명상의 힘을 통해 에고- 형상이 해소되는가?
그의 두 발에 대한 치열한 명상은 그를 향한 치열한 사랑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에 대한 그런 치열한 사랑 때문에, 그 구도자는 자신의 몸과 그 몸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의 개인성에 대한 관심을 잃고, 그래서 에고- 형상(그의 형상인 에고의식이) 해소된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 없이 단순히 집중만 해서는 에고 없음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본문]
일체(만물)로서 빛나는 하느님과 별개로는 홀로 존립할 수 없는 그대 자신을 소거하라. 삿되고 변덕스러운 에고가 순복하는 것이야말로 평안이 빛나는 지고의 헌심임을 유념하라.
[본문]
"하느님에게 자아를 내놓는다" 고들 하지만 저 자아가 (애초에) 하느님 외에 누구의 것이었던가? (그러니) 속임수로 하느님의 소유물('나'와 내 것')을 훔친데 대해 참회하고, 그것을 하느님의 연꽃발에 돌려 드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네.
[스리무루가나르 해설]
"우리 자신을 하느님에게 내맡겨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헌신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개아에게 (그럴 수 있는) 별개의 자유가 있을 때에만 자기순복이 하나의 노력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른바 개인아는 항상 하느님의 소유물이므로, 그 자신의 어떤 자유도 없고, 그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신이 하나의 독립된 개체인 '나'로서 일어남으로써 (그것을 하느님에게서) 훔친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단번에 다시 하느님의 안으로 합일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본문]
"제 뜻에 따라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당신의 신성한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면서 신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뻐하는 사람은 마음에 두려움이 있을 이유가 없다네.
[본문]
신의 참된 성품이라고 하는 진아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명상하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원습에 의해 추동되는 다른 생각들이 일어날 여지가 없게 하는 것이, 영혼을 하느님께 드린다는 의미라네.
[사두 옴 해설]
스리 바가반이 <나는 누구인가?>에서 베푸신 이런 말씀이 있다.
"진아에 대한 생각이 아닌 어떤 생각도 일어날 여지를 전혀 주지 않고 진아 안에 확고히 자리 잡는 것이, 하느님에게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본문]
"당신의 바람이 저의 바람입니다."라는 마음 자세로 자신의 바람을 내버리는 것만이, 그대의 바람(욕망)에 의존하는 원초적 은폐력인 비천한 에고가 소멸되는 순복임을 알아야 하네.
[본문]
스스로 무한한 지고자의 소유물(마음, 몸, 세계 등) 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자부심과 애착심으로 붙드는 저 사기꾼(에고)을 내면에서 성찰해 본다면, 그것이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사두 옴 해설]
마음, 몸, 세계는 진아(신)에서 일어나므로, 그것들이 신의 소유물로 묘사된다.
본 연과 다음 연은 자기탐구와 자기순복이 어떻게 서로의 안에서 끝나고,
그 결과가 '에고 없음'인지를 설명한다.
[본문]
활동이 없이 고요해져 시바의 힘에 먹이가 되는 땔나무로서의 진아 안주 안에서, 에고가 늘 번뇌없이 스스로 기뻐하는 평안으로 가득한 그때야말로, 참된 자기순복이라네.
[본문]
달콤한 재거리로 만든 가나빠띠 신상에서 일부를 떼어내어 그것을 그 신상 자체에게 공양 올리는 것처럼, 명료하게 빛나는 생명형상(진아)으로서 안주하는 하느님께 우리가 즐거이 저 생명을 내놓는것(자기순복)도 그런 것이라네.
[스리 무루가나르와 사두 옴 해설]
이원론에서 신에 대한 헌신의 최고이자 최종적 형태라고 그토록 찬양받는 자기순복조차도 스리 바가반의 이 가르침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폭로되니, 다른 모든 형태의 숭배는 무슨 소용이 있을지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 따라서 진아에 안주하여 고요히 머물러 있으면서, 신의 소유물을 찬탈하는 죄인 '나'의 일어남을 결코 용납할 여지를 주지 않는것이 모든 숭배 중에서 최상이다.
[본문]
삭띠를 당신의 왼쪽에 두고 계신 하느님의 두 발에, 무조건적으로 그대의 마음을 두라. 그러면 속임수를 탐색하던 '나'와 '내 것'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지고아가 솟아 올라 번영할 것이네.
* '삭띠를 당신의 왼쪽에 두고 계신 하느님'은 주 시바를 지칭하는 전통적 방식이다.
-스리 무루가나르 지음, 대성 옮김 <진어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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