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적인 앎이 끝날 때, 주시자는 주시자로서 살아남지 못한다.

2021. 8. 10. 19:55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 다스보드 제 4 講 - 

"상대적인 앎이 끝날 때, 주시자는 주시자로서 살아남지 못한다. 

그때 '나'(에고)의 자존심은 그냥 사라진다" 

                                       -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제 6장10절, 16구]

 

브라흐만은 이원성이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브라흐만은 오직 하나이며, 그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주로써 나타닜습니까? 

 

다양한 장신구들에는 금만 존재할 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나중에 그것들은 팔찌,장식고리,목걸이 등으로 불립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르지만 기본은 금이고, 그 외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때 나타나 보이는 모양들은 결국 사실이 아닙니다.

비록 금을 구부리고 비틀어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지라도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금일 뿐입니다. 

이름과 형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실재하지 않습니다. 

 

왜 히랄랄(다이아몬드)이라고 부릅니까? 

바로 얼룩이가 나와있으므로.그것을 다이아몬드라고 발설하지 않습니다. 

이름과 형상의 세계는 가짜이며, '의식'만이 진실합니다.  

금의 경우는 색상과 외관이 같습니다. 

낙타가 황금으로 만들어지더라도 금이고, 비슈누 신이 금으로 만들어지더라도 금입니다. 

그 모든 것에는 오직 금만이 존재합니다. 

 

'존재'는 모든 것에 스며있습니다. 

심지어 무생물, 예를 들어 의자에도 있습니다. 

의자 속에 있는 것은 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서는 다른 모든 것은 개념들입니다. 

브라흐만 외에는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분류하지 않고 보면 '보는 자'는 더 이상 없습니다. 

'나'라는 에고는 뿌리가 뽑혀야 합니다. 

이것이 베단타에서 전체적인 투쟁의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태양을 삼키는 두 악마, 라후와 케투와 같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일식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태양이 악마 라후와 케투에 의해 삼껴졌다고 말합니다.)

 

불 그 자체는 '불가촉천민'의 집에서 나온 것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태양처럼 찬란할 때라도 라후인 '나'가 당신을 방해하려 옵니다. 

진아는 영원히 빛나지만 '나(에고)'에게 삼켜먹힙니다. 

 

에고(나)가 사라지는 곳, 

그것이 궁극적 체험의 징표입니다. 

에고는 '브라흐만'이 아니지만 그와 같이 나타납니다. 

모든 것은 의식입니다. 

 

"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탄생과 죽음은 이 '나'(에고)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오대 원소와 의식은 있는 그대로이지만,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는, 욕망으로 가득찬 그 미묘한 육체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와만라오는 이제 끝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이름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이 왔습니다. 

당신이 어떤 특별한 존재(나)라는 것을 마음에서 지워버리십시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표시'입니다. 

 

"내가 (깨달음을) 체험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라후에게 삼켜져 있습니다. 

즉 여전히 착각 속에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들어 올리는 것은 손인데, 사람은 "내가 들어 올린다"라고 말합니다. 

눈이 보지만 사람은 "내가 본다"라고 말합니다. 

코가 냄새를 맡지만,사람은 "내가 냄새를 맡는다"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진아의 힘인데, 사람은 "내가 해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힘은 모두가 신에게 딸린 것입니다. 

 

이 오만한 '나'라는 에고는 누구입니까? 

그는 궁전에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해 봅시다. 

그는 왕을 제압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경전을 연구해 보면 그의 존재 자체가 가짜임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다시 한번 "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한 가지 상태가 있습니다.

- 바로 지복(至福)상태입니다. 만약 두 가지(이원화)가 있으면 고통입니다. 

"하나'가 있는 곳에는 지복(至福)이 있습니다. 

 

                             -Amrut Laya ( The Stateless State) 싯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법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