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3. 21:56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스리 라마나를 찾아온 많은 방문객들은 참자아를 깨달은 상태가 어떤 것이며,
특히 깨달은 사람은 자기 자신과 주변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궁금해 했다.
질문 중에는 깨달은 자를 괴짜 취급하는 편견이나 오해에 기인하는 것도 없지 않지만,
방문객들이 스리 라마나에게 제기했단 질문들은 대체로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깨달은 사람은 개체로서의 의식이 없이 어떻게 살아 갈 수 있는가?
2. 깨달은 사람도 분명히 이 세상에서 활동하며 사는데,
어떻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고 말할 수 있는가?
(스리 라마나는 참자아를 깨달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3.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가?
이 세상에 대한 느낌이나 지각이 있기는 한가?
4. 깨달은 사람의 각성된 순수의식은 깨어 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그리고 깊이 잠든 상태의 의식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의 밑바닥에는, 참자아라고 부르는 상태를 체험하는 사람(깨달은 사람)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하나의 가정일 뿐이며, 진실과 부합되지도 않늗다.
이 그릇된 믿음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깨달은 사람의 체험을 이해해 보기 위해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정신적인 틀에 불과하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만 가지고도 그들의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이란 말 그대로 실재를 아는 '개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실재를 깨닫고자 노력하는 구도자들도 있고 이미 실재를 깨달은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궁극적인 실재인 참자아의 입장에서 보면, 깨달은 사람도 깨닫지 못한 사람도 없다.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앎(깨달음)만이 존재한다.
스리 라마나는 이 점을 직접 간접으로 여러 번 설명했으나, 그가 말하는 뜻을 개념적으로나마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질문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관에 어느 정도 맞추어 가면서 대담하곤 했다.
앞으로 나올 대부분의 대화는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는 질문자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스리 라마나 자신이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깨달은 사람의 상태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 * * * *
질문 : 구속되어 있는 사람과 자유로운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보통 사람은 가슴(심장,진아)을 인식하지 못하고 머리로만 살고 있지만, 깨달은 사람은 가슴으로 산다.
그는 여기 저기 돌아 다니며 이 사람 저사람을 만나고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접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인 실재인 브라흐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그는 모든 것이 가슴에서 체험한 진정한 실재인 참자아임을 안다.
질문 : 보통사람은 어떠합니까?
마하리쉬 :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대상을 본다. 그들은 자기와 세상이 분리된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과 현상계를 유지하고 있는 내면의 깊은 진리에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참자아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과 현상계의 배후에는 유일한 궁극적인 실재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영원하지 않고 늘 변하는 사람과 만물의 토대가 되는 영원 불변하는 유일한 실재인 참자아의 각성상태에서 산다.
질문 : 깨달은 사람의 순수의식은 일상적인 체험의 근거가 되는 '나'라는 생각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마하리쉬 :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의 분별이 사라진 순수의식의 가슴이며, 그대의 진정한 모습이 가슴이다.
개인적인 체험의 근거가 되는 '나'라는 생각은 가슴에서 나온다. 가슴 자체는 완전히 순수하다. 하지만 본래적인 가슴의 순수함(사트바) 속에서 활동성(라자스)과 비활동성(타마스, 어둡고 무거운 성질)이 작용함으로써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다.
질문 : 선생님의 말씀은 깨달은 사람에게도 순수한 형태의 에고가 존제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깨달은 사람에게도 에고는 실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마하리쉬 : 어떤 형태의 에고이든 에고 그 자체는 체험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 즉 의식의 첫번째 단계인 깨어 있는 상태와 이 세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에고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깨달은 사람도 깨닫지 못한 다른 사람들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이유로, 깨달은 사람 역시 개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깨달은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이다.
질문 : 그렇다면 깨달은 사람의 경우에는 개체 의식인 '나'라는 생각이 어떻게 작용합니까?
마하리쉬 : 깨달은 사람에게는 '나'라는 개체 의식이 전혀 없다. 깨달은 사람은 분별을 초월한 순수의식과 일체이기 때문에, 그의 본성은 가슴 그 자체이다. 우파니샤드는 분별을 초월한 순수의식을 프라즈나나(충만한 의식)라고 하는데, 프라즈나나가 곧 절대자 브라흐만이며 브라흐만이 곧 프라즈나나이다.
질문 : 깨달은 사람에게도 욕망이 있습니까?
마하리지 : 보통 사람의 마음은 활동성(라자스)과 비활동성(타마스)이라는 두 가지 기질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기적인 에고의 욕망과 나약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순수하고(사트바), 특정한 방향을 고집하지 않으며, 미묘한 지혜로 감싸여 있다. 깨달은 사람은 이런 마음을 통해서 세상과 접촉하기 때문에 그의 욕망 역시 순수하다.
질문 : 깨달은 사람이 현상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참자아를 깨달은 이후에도 현상계가 인지(認知)되는지요?
마하리쉬 : 그대는 왜 현상계와 깨달은 뒤에 현상계가 어떻게 인지될 것인가에 대해 신경을 쓰는가?
먼저 참자아를 깨달으라. 현상계가 인지되든 인지되지 않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잠자는 동안에는 왜 현상계를 인지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그대가 얻을 것은 없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어째서 현상계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일까를 연구해 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현상계를 인지하느냐 못하느냐는 깨달은 사람에게나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나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현상계는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나 다 보인다.
다만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뿐이다.
질문 : 깨달은 사람에게나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나 다 같이 현상계가 인지된다면, 그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깨달은 사람은 현상계를 바라볼 때 보이는 모든 것의 근원인 참자아를 바라보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현상계가 인지될 때이든 인지되지 않을 때이든 자신의 진정한 존재인 참자아에 대하여 무지하다.
스크린 위에 비치는 영화 장면들을 예를 들어 보자.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는 빈 스크린 밖에 없지만, 영화가 시작되면 스크린 위에 여러 가지 장면이 나타난다.
각 장면들은 마치 실제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을 잡아보라. 무엇이 잡히겠는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스크린 뿐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모든 영상이 사라지고, 오직 스크린만 남는다.
참자아도 마찬가지다. 참자아만이 존재하며, 장면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대가 확고하게 참자아의 차원에 거한다면 어떤 장면이 나타나도 그 겉모습에 속지 않을 것이다.
참자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현상계를 실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스크린은 모른 채, 그 위에 나타나는 장명들을 스크린과는 상관없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로 보는 것과 같다.
스크린이 없으면 영상이 나타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대상'도 없다.
이 사실을 알면 보이는 대상을 참자아와는 대른, 객관적인 실체로 생각하는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스크린과 그 위에 나타나는 장면들이 모두 참자아임을 안다.
참자아는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장면들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아무런 형태도 없이 빈 스크린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참자아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상관이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자신이 늘 참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사람도 자기들처럼 무엇인가를 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낀다.
질문 : 깨달은 사람은 현상계를 자신의 일부분으로 보나요? 아니면 어떻게 달리 보나요?
마하리쉬 :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참자아 뿐인데, 무지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구분이 생긴다.
1. 같은 종류
2, 다른 종류.
3. 어느 것의 일부분
현상계는 참자아와 비슷한 무엇이 아니다. 현상계는 참자아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또 참자아의 일부분도 아니다.
질문 : 참자아 위에 현상계가 반영된 것은 아닌가요?
마하리쉬 : 반영되기 위해서는 반영되는 물체와 반영된 상(像)이 있어야 하는데, 참자아의 차원에는 그런 분별이 없다.
-데이비드 갓맨 편집, 정창영 옮김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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