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37)

2021. 5. 20. 22:52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이처럼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가 진아지를 얻는데 필요한 마음의 진정한 힘을 줄 수 있기는 하지만(사실을 말하자면 자아탐구만이 이 필요한 힘을 줄 수 있고, 다른 어떤 수행도 그렇지 못하다) .

스리 바가반의 헌신자들인 우리들 사이에서 조차 자기탐구의 길은 어렵지만 염송,명상,요가 등 다른 방법들은 쉽다는 그릇된 관념이 존재하고 또한 전파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진실과 거리가 먼지 살펴 보자. 

 

그러면 이 주제에 관한 스리 바가반의 견해는 무엇인가? 

당신 자신의 말슴을 들어 보자. 

 

( - - -) 모든 길 중 이 길이 가장 쉽다네. 

                            - <진아지 제 4연>

 

(- - -) 이것이 누구에게나 직접적인 길이라네 !

                            - < 가르침의 핵심,제17연>

 

이와 같이 스리 바가반의 견해는, 이 자아탐구의 길이 모든 길 중에서 가장 쉬운 길일뿐 아니라. 

모든 구도자들에게 가장 쉽고 직접적인 길임이 분명하다. 

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왜 스리 바가반은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당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어떤 근거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하면서 그 이유를 알려고 하는 대신, 

도피하듯이 "아, 그것은 바가반께만 쉽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려워"라고 하면서 낙담하고 용기를 잃는다. 

신심이 있어야만 우리가 목표를 확보할 수 있으므로, 이렇게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 스리 바가반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발견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어떤 것을 '어렵다'거나 '쉽다'고 할 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무엇이 어렵고 무엇이 쉬운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 우리가 모르는 것 - 그런 것만을 우리는 어렵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좋아하는 것, 우리가 이미 해 본 것, 우리가 이미 아는 것 - 그런 것만을 우리는 쉽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즉, 우리의 사랑하는 힘, 하는 힘, 아는 힘 안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은 쉬운 반면,

우리의 사랑하는 힘, 아는 힘 안에 이미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어렵다. 

이것이 실로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의 올바른 정의이다. 

이 정의를 가지고 이제 염송, 명상, 요가 들과 같은 다양한 수행을 하는데 필요한 노력과, 

자기 탐구를 하는데 필요한 노력의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쉬운지 살펴 보자.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염송, 명상, 요가 등의 길에서 하는 노력은 2인칭과 3인칭 대상들을 향한 주의에 지나지 않는 반면, 스리 바가반이 가르친 자기 탐구에서 하는 노력은 1인칭을 향한 주의이다. 

염송, 명상 혹은 네 가지 요가 중 어느 하나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2인칭과 3인칭 대상들에 대해 마음의 일념집중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마음의 힘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밖으로 향하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기탐구를 하기 위해서는 1인칭에 집중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는데- 마음의 일념집중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고,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으로 향하기'이다. 

조금만 분석해 보면 우리 각자에게는 (가장 평범한 사람에게조차도) 1인칭을 향한 사랑하기, 하기, 알기의 경험들이 내재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2인칭이나 3인칭 대상들을 향한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이 드러난다. 

어째서 그런지 살펴보자.

 

우리가 어떤 신의 이름, 신의 형상, 신에 대한 여러 태도, 몸안의 여섯군데 차크라 등에 대해 (그 모든 것은 어떤 2인칭이나 3인칭 대상을 향해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을 요한다) 

처음 들을 때, 그것들은 우리에게 새롭다. 아는 것이 새롭고, 사랑하는 것이 새롭고, 하는 것도 새롭다. 

남들에 의해 우리의 내면에서 점화되기 전에는 사랑하기, 하기, 알기의 이 모든 경험이 우리가 모르던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우리의 부모나 연장자들이 우리를 어떤 신의 이름이나 형상 혹은 가야뜨리 같은 어떤 신성한 진언에 입문시켜 준다고 가정하자. 

입문하기 전에는 우리가 그런 진언, 명상 혹은 신의 형상을 알지 못했다. 

입문 한 뒤에야 그런 것들에 대해 알게 된다. 

즉, 그런 진언, 명상 등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경험을 우리가 새로이 습득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런 염송이나 명상의 위대함, 독특함, 힘에 대해 어떤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듣고 난 뒤에애 그런 것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얻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 얻은 하나의 사랑하기 경험이다. 

바꾸어 말해서 이전에는 우리가 그런 것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전에 그런 진언 염송이나 명상을 해 본 적이 없엇고, 신과의 관계에 대한 그런 감정들을 계발한 적도 없었다. 우리는 그 스승의 면전에서 그것을 많이 염하고, 그가 바로 잡아주거나 권하는 대로 해본 뒤에야 염송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즉, 그 진언을 올바르게 발음하고, 적절한 곳에서 음을 높히고 낮추거나 멈출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 얻은 '하기'의 경험이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이전에 그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같은 이치가 명상,조식, 하타 요가, 라자 요가 등에도 해당된다. 

이처럼 2인칭과 3인칭 대상들에 기초한 이 모든 수행에 속하는 사랑하기, 하기, 알기의 경험들은 우리에게 존재했던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새로이 습득한 것임이 증명되지 않는가? 

 

반면에 1인칭에 속하는 사랑하기, 하기 , 알기는 남들이 점화해 줄 필요가 없이 이미 우리의 안에 존재하고 있다!

어떻게 ? 전에 우리는 이미, 모든 사람의 안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늘 당연히 2인칭과 3인칭 대상들에 대상들에 대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했다. 

그래서 첫째로, 자기 자신 사랑하기 경험은 우리에게 내재해 있음이 증명된다. 

둘째로, 매일 우리는 잠 속에서 우리 자신을 '나는 몸이다'라는 느낌 - 곧 '우리' 아닌 것 - 으로부터 쉽게, 힘들이지 않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분리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은 진아로서 머무르기 경험이 우리에게 내재해 있음을 증명한다. 

셋째로, 어떤 사람이 자기 몸조차 볼 수 없는 아주 깜깜한 방안에 혼자 앉아 있다고 가정할 때, 누군가가 방 밖에서 "내 책이 자네 곁에 있는가?" 하고 물으면 그가 " 그게 있는지 모르겠네"하고 대답한다. 

그러나 "자네가 존재하는가?" 하고 물으면 "물론, 분명히 존재하지!" 라는 대답이 금방 돌아 온다. 

그는 2인칭과 3인칭 대상들의 존재를 알기 위해 필요한 빛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진아-빛(진아-의식)에 의해 그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더욱이 모든 사람은 몸과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깊은 잠 속에서조차 '내가 있다'는 앎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앎은 우리에게 내재해 있음이 분명한 반면, 2인칭 3인칭 대상들에 대한 앎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註 :잠 속에서도 "내가 있다"는 앎의 경험이 있다는 것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아 참 잘잤다!'하면서 일어난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잠 속에서도 존재하는 의식이 배면에  내재해 있었다는 증명이다. >

이 두 가지 예는 우리 자신의 존재함에 대한 알기 경험은 가장 평범한 사람에게 조차 내재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스리 바가반이 우리에게, 우리가 이미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좋아하라고 조언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렵다고 할지 모른다. 

 

만약 당신이 우리에게 지금까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렵다고 말할지 모른다. 

또 당신이 우리가 이전에 도달해 보지 못했고 그래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에 우리가 있기 바란다면, 

그것은 어렵다고 보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기, 하기, 알기의 경험들은 1인칭에 관해서만은 우리에게 이미 분명하게 내재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으므로, 위에서 말한 '쉽다'와 '어렵다'의 정의의 견지에서 보면 자기 탐구의 길에서 하는 노력, 곧 1인칭에 에 대한 주의 기울이기가, 염송, 명상, 요가  등에서 하는 노력, 곧 2인칭과 3인칭 대상들에 대한 주의 기울이기에 지나지 않은 그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모든 길 중에서 이 길이 가장 쉽다"거나 "이것이 누구에게나 집적적인 길"이라는 스리 바가반의 말씀을 뒷바침하는 근거가 실로 그와 같다. 

이런 맥락에서 스리 바가반은 "진아는 지금 여기 있고, 늘 성취된다"고 거듭하여 이야기하곤 했다. 

스리 바가반은 "이것이 누구에게나 직접적인 길이다"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마음의 힘이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고 해도 - 이 길을 통해서 자신의 근원에 안주 하는데 필요한 참된 마음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자기 주시, 즉 진정한 '안으로 향하기'를 닦는 것 자체가, 마음에게 다른 어떤 표적을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스리 바가반의 가르침이 갖는 독특한 위대함이 이와 같다.  

 

에고 속으로 탐구하는 길(에서의 노력) 외에는, 

행위와 같은 다른 길들에서 하라고 하는 노력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대는 심장 속의 보물인 진아를 얻어 그것을 즐길 수 없을 것이네.

                                    - <진아화만, 제885연>

 

더욱이 신이 2인칭이나 3인칭 대상들 중의 하나일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럴 수 없다 ! 왜냐하면,

 

2인칭과 3인칭들은 뿌리인 1인칭(에고)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일 뿐이고( ---) 

                                            -<자기 탐구 11연시, 제8연>

 

'나는 몸이다'라는 형상의 1인칭(에고)이 존재해야만, 2인칭과 3인칭도 존재할 것이네( - -)

                                              -<실재사십송 제14연>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 < 아루나찰라에 바치는 8연시,7연>

 

라고 한 것이 스리 바가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즉, 2인칭과 3인칭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는 이 몸이다'라는 하나의 생각의 형상으로 일어나는 1인칭(거짓된 에고)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신이 2인칭이나 3인칭 중의 하나라면, 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에고의 은총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

그런데 만약 존재의 형상 자체인 신이 자신의 존재를 위해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신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신은 결코 2인칭이나 3인칭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히 이 거짓된 1인칭이 일어나기 위한 근원이자 기반으로서, 

즉 1인칭의 실체(실재하는 측면)로서 존재하고 빛나야 한다. 

신, 곧 브라흐만은 이처럼 늘 '나'의 실체로서 빛나고 있으므로, 

마음으로 하여금 자기를 주시하는 수행을 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신을 추구하는 것이며, 

유일하게 실효성있는 요가이다. 

따라서 자기 주시가 참된 신- 주시이다 !

 

오, 바가반, 당신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나'를 관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

'나'를 관하는 것은 무념으로 머무는 것에 다름 아니며,

무념으로 머무는 것은 '나'로서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 깊게 깨어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주시인데, 굳이 주시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 <스리 라마나 사하스람 제99연>

 

우리는 이미 앞에서 '내가 있다'(진아)가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또 이제 우리는 완전한 행복의 바다인 신이 1인칭의 실체로서 빛난다는 것을 알게 되엇으므로,

만일 우리가 자기를 탐구하여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하여 비진아(즉, 실제로는 우리가 아닌 것들)를 모두 부정하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 빛날 것이다. 

그러면 경전에서 권하는 다른 수행법들을 통해 불행(어느 때에도 존재하지 않는 속박)을 제거하려고 기울이는 모든 노력이 불필요해지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제 우리는 자기탐구 - 즉, 우리를 비진아에서 분리시켜 우리 자신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마하요가-의 방법을 살펴보자. 

                                                                   대성 번역 <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