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현각선사의 지관(止觀) 법문(6)

2020. 6. 30. 23:09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3) 찰나지 : 영지(靈知)

 

[본문]

지금 말하는 지는 모름지기 지(知)에 관한 지(知)가 아니라 그냥 지(知)일 뿐이다. 

즉 앞으로는 멸(滅)을 접하지 않고 뒤로는 일어남(生)을 이끌지 않아서 

전후(前後)의 연속이 끊어져 중간에 저절로 홀로 있다. 

今言知者 不須知知 但知而己 則前不接滅 後不引起 前後斷續 中間自孤

 

[해설]

윤회를 벗는 해탈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얻어야 할 지(知)는 전념과 후념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지(知), 

이미 사라진 전념을 후념 속에 보존하는 망분별과 망집착의 지(知), 이미 사라진 지(知)에 관한 지(知)가 아니다. 

얻어야 할 지(知)는 오히려 그러한 연속의 흐름 바깥으로 나간지(知), 생멸연속을 끊는지(知)이다. 

이미 없는 과거나 아직 없는 미래를 지(知)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지(知), 오로지 현재만이 있는 지(知), 

그렇게 현재에 작동하는 찰나의 지(知)이다. 지(知)에 관한 지(知)가 아니라 그냥 지(知)일 뿐이다. 

일상의 지(知)가 이미 멸한 지(知)를 이어받고 아직 없는 지(知)를 이끌어 내어 생멸 연속의 흐름을 형성하는 지(知)라면, 그냥 지(知)는 그렇게 있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삼는 허망분별과 망집착의 흐름을 뛰어넘어 오히려 그러한 전후 연속을 끊는 지(知), 따라서 그 자체로 홀로 자재하는 지(知)이다. 

전념 후념으로 이어지는 생멸 연속의 흐름을 찰나에 끊는 지(知)이다. 

행정은 "비추는 본체(照體)가 홀로 서서 꿈속 앎이 의지할 바를 잊는다. 조사(달마대사)는 '공적의 본체(空寂體)에 저절로 본지(本智)가 있어 능히 안다'고 하였다,라고 하여 일상의 지(知)를 뛰어 넘는 해탈의 지(知)를 설명한다. 

꿈 속 앎이 의지할 바를 잃는다는 것은 꿈의 내용이 끝나고 결국 꿈에서 깨어난다는 말이다. 

그러한 찰나의 지(知)가 바로 윤회를 벗는 지(知), 윤회의 흐름 바깥으로 나간 지(知)이다. 

생멸연속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지(知)를 벗어난 지(知), 꿈에서 깨어나는 지(知), 

우리에게 그러한 해탈의 지(知)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해탈의 지(知)가 곧 본지(本智)이고 본각(本覺)이며, 이것이 바로 공적영지이다. 

행정은 "그 지(知)의 지(知)는 일어나고 멸함을 계산하지 않는다. 경에서 '일념도 일어나지 않으면 전후 사이가 끊어진다'고 하였다. 라고 설명한다. 

시간 흐름을 끊는 지(知)는 곧 시간 흐름에 따라 념이 일어나는 지(知)가 아니라는 말이다. 

일념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 바로 생각의 흐름이 멎는 순간이며, 그때의 지(知)가 바로 영지(靈知)이다. 

 

[본문]

'해당하는 본체'(當體)를 돌아보지 않으면 때에 응해 소멸하니, 

지의 본체가 이미 멸하여 탁 트임이 공에 의탁한 것과 같다. 

當體不願 應時消滅 知體旣己滅 豁然如托空 

 

[해설]

시간흐름 속에서 일념도 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의 본지가 그 자체로 비추고 있을 뿐 그것을 다시 대상화하여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스스로 돌아보아 자신이 과거를 현재 지(知)의 내용으로 삼지 않으면, 과거와 현재의 념념상속의 흐름이 끊어진다. 이렇게 념념상속의 흐름을 끊는 지가 바로 공에 의탁한 지이다. 

이러한 지는 우리의 일상적인 지, 즉 시간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지, 없는 과거나 없는 미래에 의탁하여 일어나는 지, 따라서 생명상속의 흐름을 형성하는 지와는 다르다. 

공에 의거한 지는 시간 흐름 바깥의 지, 생멸 상속의 흐름 바깥의 지, 순수한 현재 찰나의 지이다. 

이와 같은 찰나의 지는 허망분별의 세계 바깥, 즉 윤회의 흐름 바깥에 서기에, 생멸의 흐름 너머 탁 트인 허공에 홀로 자재한다. 영지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지가 아니므로, 스스로에게서 능소대립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반대로 스스로를 돌아보아 스스로를 대상화하여 능소관계를 만든다면, 마음은 본래 환이 아니던 것이 환으로 바뀌고, 결국 본래 생멸흐름 바깥에 있던 마음이 다시 흐름 속으로 들어와 윤회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행정은 "혹시 돌아보면 다시 능소가 성립하고, 돌아보지 않으면 태허에 기댄 것과 같다"고 말한다. 

마음이 스스로 돌아보아 시간 지평을 만들고 능소관계를 형성하면 념념상속의 윤회가 성립하고, 그렇지 않고 시간지평을 넘어서고 능소분별을 넘어서면 전체로서의 지각인 영지에 이르게 된다. 

 

[본문]

고요한 짧은 시간에 오직 각(覺)이 있을 뿐 얻는 바는 없다. 

그러므로 각이면서 또 무각이지만, 무각의 각이므로 목석과는 다르다. 

寂爾少時間 唯覺無所得 旣覺無覺 無覺之覺 異乎木石

 

[해설]

생멸의 흐름을 끊는 본래적 지는 그 한 찰나를 비추는 지이며, 아무 것도 대상으로 삼지 않으므로 적적에 머무는 무연의 지이다. 오직 그 자체 만으로 비출 뿐 대상적으로 알려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 지로 인해 얻은 바가 없다고 말한다. 대상적으로 일려지는 것이 없기에 각이 없는 무각과 같지만, 그 자체가 스스로를 비대상적으로 자각하고 있기에 단순한 무각이 아니다. 자각성이 없는 돌이나 나무등의 무정물과 달리 스스로를 자각하는 영지의 비춤이 있기 때문이다. 주와 객, 근과 진의 분별을 넘어선 마음 자체의 자기자각이기에 본지 또는 영지라고 한다. 

행정은 "근과 진을 벗어나 밝게 거울처럼 비추니, 어찌보지 못하고 모르는 채 그것을 품고만 있을 뿐인 목석(木石)이라고 하겠는가? 라고 말한다. 

함허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품는다'의 그것은 거울의 비춤(鑑照)이다. 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은 거울처럼 반연되는 대상과 무관하게 항상 스스로를 비추면서 그 비춤을 스스로 자각하는 본각(本覺)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본각 내지 자각성이 없는 목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본문]

이것이 초심처이니, 아득하게 생각이 끊어져 잠시 죽은 자와 같아져서 

능소가 갑자기 잊혀지고 미세한 연(緣)이 모두 청정해진다. 

此是初心處 冥然絶慮 乍同死人 能所頓忘 纖緣盡淨

 

[해설]

시간 흐름에서 벗어져 나와 그 한 찰나에 본지를 자각하는 것이 수행을 통해 이르고자 하는 첫번 째 단계이다. 

이를 마음 수행의 첫번째 경지인 '초심처'라고 한다. 

전념과 후념의 흐름을 끊는다는 것은 결국 일념도 일어나지 않는 것, 생각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멎고 능소 분별이 멎으면, 우리는 그 한 찰나에 시간 흐름 밖에 서 있게 된다. 

시간 흐름 바깥에 무엇이 있는가?

능소분별이 사라지고 안팎으로 모든 연(緣)이 청정해지면, 그렇게 일체분별이 멎은 상태에서 마음은 마치 죽은 자처럼 고요해진다. 그 고요함 속에 드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무변(貿邊)의 공(空)인 텅 빈 마음, 일체의 번뇌와 염오를 떠난 자성청정심이다. 마음이 마음 밖에 남을 세워 능소로 분별하지 않고 일체를 자신 안에 포용하는 전체로서의 마음 본래 자리로 돌아가면, 그곳이 바로 본래 처음의 마음자리인 '초심처'이다. 이 초심처에 들어간 마음이 바로 능소분별을 뛰어넘은 마음, 자성청정심의 마음이다. 

행정은 "그 취지는 모두 념을 떠나 '고요한 지'(寂知)로 돌아가는 것이다. 

달마대사는 '바깥으로 모든 연을 끊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임이 없어져 마음이 담벼락과 같아지면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라고 설명한다. 마음이 능소분별과 주객분별 속에 살면 밖으로 대상을 구해 분주하고 안으로 평안을 찾아 헐떡이게 된다. 바깥으로의 치달음과 안으로의 열망이 모두 멈추어 벽처럼 부동의 마음이 되어야 도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고요하게 비고 적막하여 마치 각이 무지 같지만, 무지의 성품이 목석과는 다르다.

이것이 초심처이니 이해하기 어렵다. 

闃爾虛寂 似覺無知 無知之性 異乎木石 此是初心處 領會雜爲

 

[해설] 

마음이 념념으로 이어지는 시간 흐름 바깥에 서면 모든 생각의 내용이 사라지므로 일체가 비어 고요하다. 

마음에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이 없으니 마치 아무런 지가 없는 무지상태인 것 같지만, 마음 자체의 순수한 자기지가 있으므로 돌이나 나무와 같은 무정물의 상태와는 다르다. 

이와같이 전념에서 후념으로 이어지는 일상적 대상의식 방식을 넘어서서 마음 본바탕의 순수한 자기 자각성에 이르는 것, 초심처에 이르는 것, 이것은 마음 안에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이 멎어 무념이 되어야 그 경지에 이르게 된다. 

초심처는 전체 수행 과정의 첫 순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전체 과정의 방향과 힘이 담겨 있다. 

마치 멀리뛰기에서 발을 떼는 출발의 순간이 발이 땅에 닫는 마지막 순간을 결정하는 것과 같다. 

초심처에서 자각하는 마음의 영지는 수행자를 마음의 근원으로 이끌어간다. 

그만큼 초심처는 새로운 경지의 출발이므로 일상의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행정은 "이 각(覺)은 타고난 것으로 목석과는 다르다. 경에서 '두루 밝게 깨달아 아는 것은 마음의 념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고 설명한다. 초심처의 순수한 자는 념을 따라 얻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 한자경 지음 <선종영가집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