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현각선사의 지관(止觀)법문

2020. 6. 18. 22:48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2.초심에서 계합까지의 점진적 단계 

 

1) 초심처에 들기 : 상속지(相續知)에서 찰나지(刹那知)로

 

(1) 상속지 1 : 대상지(감각)

 

[본문]

그다음 마음을 닦는 점진적 차례이다. 무릇 지(知)로써 물(物)을 알면,

불이 있고, 지도 또한 있다. 

復次修心漸次者(복차수심점차자), 夫以知知物(부이지지물), 物在知亦在(물재지역재)

 

[해설]

여기서부터는 '마음을 닦는 점진적 차례'를 논한다. 

영지를 자각하는 초심처에서부터 심층마음의 진리와 완전히 하나 되는 계합이 일어나기까지의 점진적 단계를 설명한다. 초심에서부터 계합으로 나아가는 수행과정에 단계와 순서가 있으므로 '점차'라고 말하지만 그 전체는 결국 하나의 영지의 빛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마치 바다 수면에서부터 깊은 해저에 이르기까지 발이 내려가는 것이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물을 관통하여 궁극에 이르는 것이듯이, 긍극의 지점에서 보면 모든 차이는 방편일 뿐이다. 

뿌리에서 보면 모든 잎이나 꽃들이 그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하나의 뿌리의 생명에서 비롯된 하나의 생명인 것과 같다. 그 근원의 빛, 뿌리의 생명이 바로 영지(靈知)이며, 그것을 처음 알아차리는 순간이 바로 초심처이다. 초심처는 궁극으로 향하는 수행 통로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첫 순간과 같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다음은 물러서지 않고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 문을 통과한 사람을 불과(佛果)에 이르도록 바르게 정해진 중생이란 의미에서 정정취(正定聚)라고 부른다. 초발심이 곧 정각이라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란 말도 그래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초심처에 들어서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망념을 떠나 무념의 영지를 지각하는 초심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인식론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한다. 일상적으로 우리의 앎은 知로써 사물을 아는 것이다. 마음은 외경을 대상으로 삼아 인식한다. 마음과 외경이 직접 부딪치는 순간이 근경화합으로서의 촉(觸)이다. 우리의 일상적 앎의 첫 단계는 5근(根)과 5경(境)이 부딪쳐서 전5식(識)이 성립하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의 5근이 색,성,향,미,촉의 5경과 각각 부딪쳐서 안식,이식,비식,설삭,신식이 성립한다. 전5식은 감각이다. 이 감각의 순간에는 근과 경, 지와 대상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物도 있고 知도 또한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감각의 순간 감각을 그 자체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감각을 의식하여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제6근인 의(意)가 함께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의식이 함께 작동하는 순간을 우리는 '지각'이라고 한다. 감각을 알아차리는 지각은 감각의 다음 찰나이다. 감각은 知로써 物을 아는 것이고, 지각은 그 감각을 알아차리는 知, 즉 지(知)로써 지(知)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상속지 2 : 자기지(지각)

 

[본문]

만약 지(知)로써 지(知)를 알면, 지(知)를 아는 즉 물(物)을 떠나는데, 물은 떠나지만 그래도 지는 있다. 

若以知知知(약이지지지), 知知則離物(지지칙이물), 物離猶知在(물이유지재)

 

[해설]

지(知)로써 물(物)을 알다가 지(知)로써 지(知)를 알게 되는 것은 주관이 객관 대상과 접촉하여 대상을 알다가 다시 그 대상을 아는 그 앎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知)로서 물(物)을 아는 것이 5근과 5경이 부딪치는 감각(전5식)이라면, 지(知)로서 지(知)를 아는 것은 그렇게 주어지는 전5식의 감각내용을 대상의 속성으로 인지하는 지각(제6의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눈에 빨간색이 주어지는 것이 '지로써 물을 아는 것'(전오식)이라면, 그렇게 눈을 통해 들어온 빨간색의 감각내용을 바깥 장미의 빨간색으로 알아보는 것은 '知로써 知를 아는 것'(제6의식)에 해당한다. 

그런데 전5식이 일어나는 찰나와 그 전5식의 내용을 알아채는 제6식이 일어나는 찰나는 동시가 아니다. 

제6의식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이미 앞의 전5식의 대상은 사라지고 없다. 

즉 知로서 知를 알 때는 물(物)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러므로 知가 知를 알 때 '物은 떠나고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知가 知를 알 때 그 知는 현재 있지 않은 物에 대한 知이다. 

 

[본문]

知를 일으켜서 知를 알면, 뒤의 知가 생길 대에 앞의 知는 이미 滅한다. 

起知知於知(기지지어지), 後知若生時(후지약생시), 前知早已滅(전지조이멸)

 

[해설]

知가 일어나서 知를 알게 될 때, 그렇게 아는 知는 현재 순간의 知이지만,

그 知에 의해 알려지는 知는 이전 순간의 知이고 현재는 없는 知이다. 

다시 말해 전5식에 이어 제6의시이 일어나는 경우 제6의식이 전5식을 알게 되지만,

제6의식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앞의 전 5식은 이미 멸하고 없다. 

그러므로 '뒤의 知가 생길 때에 앞의 知는 이미 滅'하고 없다고 말한다.

행정은 "새로 새로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생각 생각이 떨러져 나가는 것을 멸(滅)이라 한다. 

앞의 知로 인해 뒤의 知가 일어나서 뒤의 知가 앞의 知를 알게 되지만, 그때 앞의 知는 이미 먈(滅)하여 없고

뒤의 知만 남게 된다. 뒤에 새로 생겨나는 것이 생(生)이고, 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멸(滅)이다.  

 

[본문]

두 개의 지(知)가 병립되지 않으므로 앞의 지(知)가 멸하니,

멸(滅)한 곳이 지(知)의 경(境)이 되어 능(能)과 소(所)가 다 참이 아니다.

二知旣不並(이지기불병), 但得前知滅(단득전지멸), 

滅處爲知境(멸처위지경), 能所俱非眞(능소구비진)

 

[해설]

知가 知를 알 때에 그 두 개의 知가 동시에 병립할 수 없으므로, 앞의 知가 滅하고 

그 자리에 뒤의 知가 생겨나면서 그렇게 뒤에 새로 생겨난 知가 앞의 知를 안다. 

그러나 뒤의 知가 앞의 知를 알 때 앞의 知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즉 앞의 知가 사라진 그 滅한 곳이 바로 뒤의 知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뒤의 知는 대상이 없는 知, 즉 참이 아닌 知이다. 

그래서 '멸한 곳이 知의 境이 되어 능과 소가 다 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국 제6의식은 이미 사라진 전5식, 이미 사라진 감각을 대상으로 삼는 식이며,

따라서 제6의식의 사려분별은 단지 개념적 동일성에 따라 사물을 고정화하여 파악하는 

허망분별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은 "전념이 멸하고 후념이 생하므로 "병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후념이 능이고 전념이 소이므로 '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본문]

앞의 것이 멸하면서 멸이 知를 이끌어 오고, 

뒤의 것이 알면서 知가 滅을 잇는다. 

前則멸(전칙멸), 滅引知(멸인지), 後則知(후칙지), 知續滅(지속멸)

 

[해설]

앞의 知가 멸하면서 뒤의 知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뒤의 知가 이미 멸한 앞의 知를 인지하면서 앞의 知를 이어간다. 

이렇게 앞의 知는 이미 멸하였으면서도 뒤의 知에 의해 알려지고 뒤의 知 안에 보존된다. 

그리하여 앞의 知와 뒤의 知는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게 된다. 

여기서 지(知)는 곧 념(念)으로 바궈 볼 수 있다. 

전념이 후념을 일으키며 후념은 전념을 이어나간다. 

전념은 실제로는 이미 사라졌지만, 후념 속에서 계속 보존되고 있다. 

이미 없는 전념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후념은 그러므로 참이 아닌 생각, 허망한 생각,

망념(妄念)인 것이다. 

 

[본문]

생멸이 상속하는 것이 그 자체 윤회의 도이다.

生滅相續(생멸상속), 自是輪廻之道(자시윤회지도)

 

[해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을 허망분별 속에서 만들어 내어 집착하는 것이 우리의 제6의식이 하는 일이다. 

우리가 의식하는 이 세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동일시 사물들로 존속하는 이 세계는 우리 의식이 만든 허망분별의 세계이다. 

그런데 의식의 허망분별과 집착으로 인해서 세계는 단지 그렇게 연속하는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실제 그렇게 연속하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의식의 활동이 업(業)이 되어 업력의 종자(種子)를 남기는데, 세계는 그 종자들의 현현, 즉 아뢰아식의 변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허망하게 분별하여 나와 세계가 있다고 계탁하면, 결국 그렇게 계탁한 대로 나와 세계가 눈앞에 드러난다.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결국 우리가 바라는 대로의 현실 또는 우리가 실재라고 믿는 대로의 현실인 것이다. 

실재는 믿음의 실상이다. 우리 의식의 허망분별에 의해 심겨진 업력의 종자에 따라 세계는 만들어지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 속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윤회(輪廻)이다. 이와 같은 생멸의 상속이 결국 윤회인 것이다. 

행정은 이렇게 설명한다. 

"전념이 멸하면서 뒤의 知를 이끌고 뒤의 념(念)이 생겨서 앞에 멸한 것을 이어가므로 생멸(生滅)이 끊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곧 윤회이다. <원각경>에서 '念과 念이 상속하고 순환 왕복하며 갖가지로 취하고 버리니 이 모든 것이 윤회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이 윤회로 빠져드는 우리의 일상의 知를 말한 것이라면, 

이하에서는 그러한 일상의 知를 뛰어 넘는 知, 윤회로부터의 해탈에 이르는 知를 논한다. 

 

                                                              -한자경 지음 <선종영가집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