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2. 22:57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도지법사(道志法師)가 도살하는 거리를 지나다가 연법사(緣法師)를 보고 물었다.
"도살꾼이 양을 죽이는 것을 보았습니까?"
연법사가 말하였다.
"저의 눈이 멀지 않았는데 왜 보지 못하겠습니까?"
도지법사가 말하였다.
"연공(緣公)께서 바로 그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법사가 말하였다.
"분명히 그것을 보았습니다."
도지법사가 다시 물었다.
"만약 상(相)이 있는 견(見)을 지으면 바로 범부견(凡夫見)입니다. 성품이 공하다는 견(見)을 지으면 바로 이승견(二乘見)입니다. 비유(非有), 비무견(非無見)을 지으면 바로 연각(緣覺)의 견(見)입니다.
불쌍히 여겨 연민하는 견(見)을 지으면 바로 애비견(愛悲見)이고,
용심(用心)하는 견(見)을 지으면 바로 외도견(外道見)입니다.
식(識)의 견(見)을 지으면 천마견(天魔見)입니다.
색(色)과 비색(非色)을 견(見)하지 않으면 응당 다시는 견(見)이 있지 않을 것인데
견(見)을 얻음이 있어 가지고 (어떻게) 여러 잘못을 멀리 떠나겠습니까?"
연(緣)법사가 말하였다.
"저는 그러한 여러 종류의 마음의 견(見)을 모두 짓지 않았습니다.
이름으로 견(見)을 짓는 것을 끊었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여러 망상을 짓는 것이 스스로 미혹하여 혼란한 것입니다."
[해설]
연법사는 그러한 장면을 보았으되 아무런 견(見)을 지은 바 없었다.
이를 견(見)함 없이 견(見)함이라 한다.
견문각지(見聞覺知)하되 견문각지함이 없는 자리이다.
그런데 도지(道志)법사는 단지 견(見)의 잘못만 알고, 견(見)함 없이 견(見)하는 자리를 알지 못하였다.
도지법사는 견(見)이 있으면 잘못이라는 견(見)에 빠져 있었다.
[본문]
어떤 사람이 연(緣) 법사에게 물었다.
"왜 저에게 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십니까?"
답하였다.
"내가 만약 법을 세워 당신에게 가르쳐 준다면 이는 바로 당신을 제접(인도)하는 일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법을 세운다면 바로 당신을 미치고 미혹되게 합니다. 즉 당신을 잘못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법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 사람에게 설하여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지 이름이 있고 글자가 있는 것은 모두 당신을 미치고 미혹되게 하는 것입니다. 대도(大道)의 뜻을 바로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도를 얻어 어떤 것으로 쓸 것입니까? "
다시 물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해설]
법을 설한다 함은 설할 수 없는 법을 설한다는 잘못이 있고, 듣는 자는 그 법상을 인지하고 향하게 되기 때문에 본래(본심)의 자리에서 붕 뜨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말을 닫는다.
<유마경>에서 유마거사와 같이 말을 닫음으로써 큰 뜻의 설을 함이 되는 것이다. 중생의 처지에 응하여 어쩔수 없이 법을 설하지만 궁극에는 그러한 뜻을 알아야 한다.
대도의 뜻은 항상 어디에나 본래로 구현되어 있는 까닭에 특별한 형상을 떠났고, 그래서 이름할 바도 없는 것이다. 만약 억지로 특별히 이름하여 말해줄 수 있고, 이에 의해 이를 얻는다 하더라도 이미 본래의 언제 어디에나 구현되어있는 것을 가져다가 어디에 쓴다는 말인가. 이를테면 허공이 이미 본래로 어디에나 있는데 그 허공을 가져다가 어디에 쓸 것인가. 일체가 오직 마음 뿐이어서 마음 아닌 곳이 없거늘 그 마음을 가져다가 어디에 따로 쓸 곳이 있겠는가. 일체가 오직 마음일 뿐이거늘 마음이라 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본문]
후에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안심(安心)합니까?"
답한다.
"대도심(大道心)을 발하지도 아니한다. 내 당념당처의 마음에 즉하여 지(知)할 바 없고,
고요하여 (무엇을) 깨닫는다 함도 없다."
[해설]
안심하지 못하는 것은 당념당처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안주하지 못하며, 여기에서 떠나 다른 어떤 자리를 얻고자 하고 향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도심을 발함도 이미 무원(無願) 무구(無求)의 당념 당처에 대도(大道)가 갖추어져 있음을 모르고, 다른 이상향에 향하게 하여 마음을 붕 뜨게 만드는 것이 된다. 일체는 얻을 바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 무원(無願)의 행이 되어야 한다.
[본문]
또 묻는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답한다.
"당신이 발심하여 도에 향하고자 하면 간교한 마음이 일어나 마음이 있다는 데에 떨어진다
만약 도를 일으키면 교위(巧僞)의 마음이 생긴다.
마음이 있는 방편은 모두 간위(奸僞)를 생한다.
[해설]
당념당처의 본래 자리를 떠나 다른 이상향에 향함은 이미 간교한 마음이고, 마음을 동(動)하게 한다.
또한 무엇을 꾸며 이상향으로 삼는 행위이며, 꾸미는 가식의 마음이다. 또한 이미 무심(無心)의 뜻에 어긋나 있다.
한 마음 일어나면 일체 허위의 법이 생한다. 그래서 궁극에는 마음을 잊어야 한다.
[본문]
또 묻는다.
"왜 간위(奸僞)라고 합니까?"
답한다.
"지해(知解)를 쓰고 이름을 끌어 오면 백 가지 교위(巧僞)가 일어난다.
간위(奸僞)를 끊고자 할 때는 보리심을 발하지 말고, 경론(經論)의 지혜를 쓰지 않아야 한다.
만약 능히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비로소 몸의 기운이 잘 일어나려 하게 된다. (또한) 정신이 소생하듯 (하게 되는데 그러)하면 해(解)를 귀하게 여기지 말고, 법을 구하지 않으며, 지혜를 좋아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하면 조금 한가하고 고요하게 된다)
[해설]
도를 닦는다고 마음을 열심히 쓰는 것은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한다. 그러하니 도를 향한 방심이나 여러 인위(人爲)의 행을 버려야 몸과 마음에 기운이 돌고 정신도 맑아져 생기가 오르게 된다.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억지 수행은 원기를 손상시키고 소모시킨다. 그래서 마음으로 마음을 어떻게 하려는 행,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엇을 얻으려 하고 마음을 어떻게 하려고 하니 그 마음에 교위(巧僞)의 작의(作意)가 있게 된다.
보리심을 발함이 성불의 인(因)이 되는 것이지만 입문(入門)할 때 이미 발심하였거나 이후에 발심하였으면 그로써 이미 성불의 인이 심어진 것이다. 자꾸 이를 되뇌이며 마음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된다. 특별한 지혜 법문을 좋아하여 마음이 그 방향에로 향해지게 함도 당념 당처의 본심에 즉함을 방해한다. 당념 당처의 본심이 바로 무시(無時)이래의 자성불(自性佛)이다. 여기에서 다시 무엇을 바라고 향할 바가 있겠는가.
[본문]
"만약 묘해(妙解)를 구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스승으로 삼지도 않게 될 것이며,
또한 법(가르침)을 스승으로 삼지도 않아 자연히 홀로 걸어갈 것이다. "
[해설]
본심의 얻을 바 없는 자리를 뚜렷이 께달은 까닭에 의지할 아무 것도 없다.
무소유(無所有)인 가운데 일체법은 수중월(水中月)과 같아 걸릴 바가 없다.
걸릴 바가 없으니 의지할 바도 없고, 홀로 간다.
[본문]
또 이른다.
"네가 귀신에 홀린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 또한 너를 제접(인도)해 줄 수 있다. "
묻는다.
"어떤 것을 귀신에 홀린 마음이라 합니까?"
답한다.
"눈을 감고 선정에 드는 것이다."
[해설]
귀신에 홀린 마음이란 본래 상념함이 없는 마음에 상념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상념은 다 귀신 경계이고 망령이다.
그런데 눈을 감고 선정에 들면 선정의 경계가 상념이 되어 버린다.
즉 머리에 선정의 느낌 내지 상념이 떠오르게 된다. 즉 귀신 경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선정의 경계가 마음에 떠오르면 그 고요함 등의 맛에 떨어져 취(醉)하게 되는데 이는 단지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의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눈 감고 수선(修禪)하면 귀신 소굴이 된다고 하였다.
여러 달마도(達磨圖)가 모두 환히 뜬 눈으로 그려진 뜻도 여기에 있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의 뜻도 여기에 있다.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이 없어야 즉사(即事)의 조사선이 된다.
일체의 상념을 떠나는 데는 눈을 확 뜨는 것이 제일이고,
수행자가 눈을 감은 상태에서는 상념 떠난 무심(無心), 즉심(即心), 즉사(即事)의 경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처음 초심 때 마음이 산란하거나 눈이 필요한 경우 잠시 눈을 감고 좌선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눈을 뜨고 좌선해야 한다.
- 담림대사 편집,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
'성인들 가르침 > 초기선종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가현각선사의 지관(止觀) 법문(7) (0) | 2020.07.21 |
---|---|
누가 허공을 안심하게 할 수 있겠는가? (0) | 2020.07.17 |
영가현각선사의 지관(止觀) 법문(6) (0) | 2020.06.30 |
영가현각선사의 지관(止觀)법문 (0) | 2020.06.18 |
만약 '부처님은 뛰어나신 분이다'라고 말한다면,이 사람은 경계에 미치고 미혹되어 있는 상태에 있다. (0) | 2020.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