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부처님은 뛰어나신 분이다'라고 말한다면,이 사람은 경계에 미치고 미혹되어 있는 상태에 있다.

2020. 6. 5. 23:32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 어떻게 해서 자심(自心)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 일체법이 유(有)라고 견(見)하는데 유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심에서 분별하여 유견(有見)을 작(作)한 것이다. 일체법이 무(無)라고 견(見)하는데 무가 스스로 무인 것이 아니라 자심에서 분별하여 무견(無見)을 작(作)한 것이다. 내지 일체법도 또한 이와 같다. 모두 자심으로 분별하여 탐착이 있다는 견(見)을 작(作)한 것이며, 분별하여 탐착이 없다는 견(見)을 작(作)한 것이다. 

탐착이란 어떤 것인가? 탐착이라는 지해(知解)를 작(作)하여 자심에서 그 견(見)을 일으킨 것이다. 

까닭에 자심의 분별일 뿐 처소가 없다. 이를(이렇게 解함을) 망상이라 한다. 

스스로 말하길 모든 외도의 분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도 또한 망상이다. 

스스로 생각도 없고 분별도 없다고 하는 것도 또한 망상이다. 

행함에는 법행(法行 : 법에 따른 행, 법에 계합한 행)이어서 아(我)의 행이 아니라 하거나, 아(我)가 행함이 아니란 것도 아니라 하며, 좌(坐)함에는 법좌(法坐 : 법에 계합한 坐)이기에 아(我)가 좌(坐)한 것이 아니라 하고, 아(我)가 좌(坐)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하며, 이와 같이 해(解)를 작(作)하는 것도 또한 망상이다. 

[해설]

일체법, 일체의 지견(知見)은 모두 그것이 있어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심(自心)에서 분별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지해(知解)함도 또한 망상이다. 그러한 지해 또한 마음에서 분별하여 일어난 것인 까닭이다. 

따라서 그렇게 알았으되 마음이 거기에 머무를 수 없다. 마음은 본래 처소가 없고, 머무르는 바가 없기에 그러한 지해가 얻어졌을 때 거기에 마음을 둘 바도 없어야 한다. 그 지해에 마음을 두어 버리면 (머물러 버리면) 이미 무심(無心), 무주(無住), 무상(無相)인 뜻에 어긋나 버린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거니 무슨 지혜이든 이미 망령이다. 그래서 궁극에는 마음을 잊어야 한다.(忘心) 

 

[본문]

법사가 말하였다.

" 원대(遠大)한 뜻을 취하고자 하건대 번뇌 습기를 모두 멸진하여야 한다."

 : " 어떤 것을 정결(正結 : 근본번뇌)이라 하고, 어떤 것을 여습(餘習 : 남은 습기)이라 합니까?

 : "생멸이 정결(正結)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어리석은 이들의 여습(餘習)이다. 써서는 안된다."

[해설]

'불생불멸'도 하나의 법상(法相)으로서 지해(知解)의 대상이 되면 이 또한 기심(起心), 기견(起見)의 습(習)이 된다. 

그래서 법상(法相)을 능지(能智)로 용(用)하는 행에서 떠나야 한다. 

 

[본문]

 : "법에 의거해야 합니까? 사람에 의거해야 합니까?"

 : "내가 해(解)한 때에는 인(人)과 법(法: 가르침,법문)에 모두 의거하지 않았다. 

네가 법에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지 않는 것도 또한 하나의 상자(箱子)를 통해 내다보는 것과 같다. 사람에 의거하고 법에 의거하지 않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

[해설]

어떤 법이나 사람에 의거하여 수행함은 하나의 상자(箱子)를 통해 내다보는 것과 같아 온전한 행이 되지 못하고, 

온전한 성취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느 특정의 방향에 한정되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인(人)과 법(法)에 의거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이때는 가야할 길도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한다 함이 없는 가운데 길이 있어 본연(本然)의 자심(自心)이 항상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본래 있었겠는가 ! 

 

[본문]

또 이른다.

"만약 '몸에 숨이 있을 때는 인(人: 我見,我相), 법(法: 一切相,法相)에 미치고 미혹됨을 면하며, 정신이 있을 때도 또한 그러하다. 왜냐하면 지(智:認知)를 귀하게 여긴 까닭이다.'고 하면, (이사람은) 인(人),법(法)에 미치고 미혹된 것이다. 만일 일인(一人)을 귀중히 여겨 옳다고 한다면 바로 이 사람은 미혹하여 혼란을 면치 못한다. 내지 부처님이 뛰어난 분이라 하는 자도 또한 미치고 미혹됨을 면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경계에 미혹된 때문이다. 이 사람의 믿음으로 마음이 무겁게 된 까닭이다. 

[해설]

살아 있을 때는 지(智,여기서는 認知,知覺)가 있기 때문에 광혹(誑惑)되지 않다고 함도 인(人:人我), 법(法:法我)에 미치고 미혹된 것이다. 인지(認知),지각(知覺)(受)도 동(動)하는 상(相)이고, 오온(五蘊 :색수상행식) 가운데 수온(受蘊)으로서 이 또한 영상(映像)이고 전변(轉變)의 상인 까닭이다. 

모든 경계는 분별을 떠나 있는데 옳다고 하거나 가장 뛰어나다고 함은 망(妄)이다. 

이를 경계에 미혹됨이라 한다. (경계는 분별을 떠났는데 이를 무슨 경계라 분별하는 미혹). 

부처님을 믿는 마음으로 마음이 무겁게 되어 있어 본연의 활달한 마음이 아니다. 

 

[본문]

'어리석은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은 사람 가운데 뛰어나신 분이다' 하고,

'열반은 법 가운데 뛰어나다'고 하면, 바로 인(人), 법(法)에 미혹하여 혼란된 것이다. 

만약 법성,실제(眞如佛性,一心)는 지(知)하는가, 지(知)하지 않는가를 물을 수 없다고 하거나 자성(自性)은 생멸하지 않는다고 함도 또한 스스로 미치고 미혹된 것이다. 

[해설]

여기의 말들은 모두 경론에서 설하는 법문이며 올바른 가르침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함은 모두 미치고 미혹된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함은 모두 인아(人我)와 법아(法我)를 얻을 수 없는데, 여기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라 생각하고 말하면 여기에 이미 인아와 법아가 있다. 또한 훌륭하다고 함에도 훌륭한 자인 인아와 훌륭하다는 법아가 있다. 그러나 일체법은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不可思議)란 사량(思量)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다. 인아(人我)와 법아(法我)는 단지 이름일 뿐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박건주 역주, 담림편집 <보리달마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