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의 실제수행방법과 이론 정리(8)

2020. 5. 7. 22:4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수행과정에서 구도자는 이제 수행력에 의해, 무엇이 에고의 흡수 상태(마음의 일시적 가라앉음)이고, 

정확히 어떤 것이 자신이 이제까지 목표로 해 온 진아의식인지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육체의식이나 다른 어떤 부가물이 없는 순수한 자기 존재를 종종 체험하겠지만, 

이것은 여전히 수행단계이지 최종적인 성취가 아니다 ! 왜인가 ?

여전히 번갈아 드는 두 가지 느낌, 즉 어떤 때는 밖으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과 어떤 때는 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안으로 향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느낌과 밖으로 향하고 있을 때는 그런 노력을 놓치고 만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이 단계를 '최종적인 성취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스리 바가반은, "마음(주의)이 이처럼 수행(자기에 대한 주시) 안에 잘 고정되어 있으면, 신의 은총의 어떤 힘이 내면에서 저절로 일어나 마음을 조복시키고 그것을 심장 속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 신의 은총의 힘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존재의 완전한 명료함, 곧 심장 안에서 넘치는 은총과 함께 '나-나'로서 항상 빛나는 지고아(파라마트만)의 형상에 다름 아니다. 

 

자기장 안에 놓여있는 바늘의 성품은 그 녹을 제거했을 때만 자석에 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자력은 그 자기장 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바늘은 그 자기장 내에 내내 놓여있었지만, 

녹으로 인해 잃어버리는 정도만큼만 자석의 끌어당김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2인칭과 3인칭에 대한 주의를 포기하고, 

자기 주시를 붙드는 방식으로써 하려고 하는 모든 일은 녹을 벗겨내는 일과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노력의 결과는, 진아광휘의 퍼져 나가는 빛살로써 일체를 삼키며(즉, 전 우주를 비존재로 만들며) 항상 빛나는 심장, 곧 순수의식의 자기장이 끌어당기는 힘에 우리 자신의 적합한 먹이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성숙한 구도자들은 기꺼이 그리고 반발심없이 진아광휘의 은총을 가진 이 자력에 자신을 내맡길 것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이 힘의 끌어 당김을 두려워하여 외향적으로 될 것이다. (즉, 그들의 주의가 밖으로 향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아를 열렬한 사랑으로써, 그리고 어떤 2인칭이나 3인칭에도 주의를 기울이려는 욕망이 없는 엄청난 무집착으로써, 먼저 우리의 자신을 적합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구도자로서의), 우리의 개인성 자체가 그 힘에 의해 먹히므로 이른바 '우리의 노력'이라는 것마저도 영(零,zero)이 된다. 이처럼 전신에 퍼져 있던 '나'-의식이 심장 안으로 가라앉게 되면 진정한 생시인 지(知,jnana)의 밝음이 일어난다. 이것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죽음은 순식간의 일이다! 잠에서 나오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한 개인적 영혼이다'라는 망상이 제거되는 것도 순식간의 일이다!

참된 지(知)가 밝아옴은 그것을 한 번 언뜻 보고 나서 잃어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

만일 어떤 구도자가 그것이 나타나고 사라진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수행단계에 불과하며, 그는 참된 지(知)를 성취했다고 할 수 없다. 완전한 지(知)의 밝아옴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장시간의 과정이 아니다. 유구한 모든 수행법은 성숙을 이루기 위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원에서 포탄 발사를 준비할 때는 먼저 포신에 화약을 넣고, 도화선을 박고, 돌 몇 개를 넣은 다음 그것을 다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것이 점화되면 천둥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폭발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의 청문, 성찰, 일여내관(一如內觀)과 (들은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무능함 때문에) 울면서 한 기도 끝에 마음이 그와 같이 완전히 순수해졌을 때, 오직 그럴 때만 진아지의 밝아옴이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로서 홀연히 순식간에 터져 나온다! 

이 밝아옴이 시작되자 마자 실재에 대한 명료한 지(知)를 통해 진아의식의 공간은 시작이 없고, 본래적이며, 영원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므로, 이때는 자기를 주시하는 노력조차도 그쳐 버린다 ! 

더 이상 할 일이 없고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이 이와 같이 안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고의 상태이다"

                                                                                                 -수행의 핵심-

 

우리가 지금 생시의 상태로 경험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생시의 상태가 아니다. 

이 생시의 상태도 하나의 꿈이다! 

이 생시와 꿈 간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이 두 상태 모두에서 '내가 있다'는 느낌이 몸을 '나는 이것이다'로서 붙들고,

외부적 대상들을 보면서 활동에 개입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이 생시 상태라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지(知)의 밝아옴, 

곧  우리의 진정한 상태 혹은 진정한 생시이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우리가 한 꿈에서 깨어나 또 하나의 꿈인 현재의 생시상태로 왔다고 하면, 

우리가 이 생시상태에서 깨어난 뒤에는 그것조차도 이와 같은 또 하나의 꿈이 아니란 법이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또 하나의 깨어남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이것이 진정한 생시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가 깨어난다고 느끼는 것이 어떤 상태이든, 어떤 2인칭이나 3인칭들의 존재에 대한 경험이 있는 한, 그것은 전혀 진정한 생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꿈일 뿐이다 !

 

진실로 우리의 진정한 생시(우리의 진정한 상태)는 (어떤 종류의 몸에도 결부됨이 없이) 우리의 존재만이, 다른 것의 도움도 없이(어떤 것의 의존도 없이), 그리고 '우리' 아닌 그 어떤 것도 인식함이 없이 빛나는 상태이다.

올바른 생시의 정의는 자기와 별개의 어떤 것의 존재도 앎이 없이, 완전한 진아의식과 자기 존재의 단일성이 있는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진정한 생시를 판정할 수 있다. 

스리 바가반은 다음 시구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생시다.

 

자기를 잊어버린 채 육신만을 자기로 여기며 무수한 탄생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자기를 알고 자기가 되는 것은, 

온 세상을 헤메고 다니던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네. 

이와 같이 알라.  -<진아에 대한 5연시> 제 1연. 

 

하나의 장소인 큰 홀 안에 벽 두 개를 새로 세우면 홀이 세 개의 방으로 나누어지듯이, 

영원하고 비이원적이고 본래적이며 부가물이 없는 우리의 존재-의식도, 두 가지 몸 부가물(생시의 몸과 꿈의 몸)에 기인 하는 생시와 꿈이라는 상상적인 벽 두 개가 그 가운데서 - 원습으로 인해 외관상 일어날 때는 생시, 꿈, 잠이라는 세 가지 상태로 보인다. 

만약 이 두 가지 새로운 상상적인 일어남인 생시와 꿈이 없다면, 남아 있는 것은 진아의식이라는 한 가지 상태뿐일 것이다. 경전에서 우리의 본래적인 진정한 상태, 곧 진지(眞知)-생시를 '네 번째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세 가지 상태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미성숙한 구도자들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다른 세 가지 상태는 참으로 실재하지 않으므로, 이 상태(네 번째 상태)가 실은 유일하게 존재하는 상태인 첫번째 상태이다. 그런 그것을 '네 번째'로 부를 필요기 전혀 없고 하나의 '상태'라고 할 것도 없다. 따라서 그것은 '상태들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를 뚜리아띠따(turiyatita), 곧 '네 번째를 넘어선 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뚜리아띠따를 어떤 다섯 번째 상태로 꼽아서는 안된다. 

스리 바가반이 이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깨어 있는 잠의 상태를 뚜리아띠따, 곧 그것들을 넘어선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생시, 꿈, 잠의 상태를 경험하는 이들을 위한 것일 뿐이네. 뚜리야만이 실제로 존재하며, 외관상 세 가지 상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뚜리아 그 자체가 뚜리아띠다라네. 이와 같이 용감하게 이해해야 하네 ! - <실재사십송 보유 32연>

 

처음 세 가지 짙은 상태와 네 번째, 다섯 번째 상태가 (경전에서 받아들여지고)있는 것은, 

잠의 어두운 무지를 뚫고 빛나는 뚜리야(진아의 상태) 안에 잠겨 거기에 확고히 안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네. -<진어화만 제567연>

 

앞에서 말한 자기 주시를 통해 우리가 자신의 존재-의식 안에 점점 더 확고하게 고정되면 원습들은 소멸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일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상상적인 원습에 의해 외관상 창조되어 왔던 생시와 꿈의 상태도 소멸할 것이다. 그럴 때 살아남는 하나의 상태를 더 이상 '잠'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된다. 

 

생시와 꿈의 원인이었던 시작없는 불순수한 원습이 소멸되면, 

나쁜 결과(즉, 따마스)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여겨지)고 하나의 공백이며 무지라고 조롱받던 잠이, 

뚜리아띠따 그 자체임을 알게 될 것이네 ! 

 

우리의 본래적 상태인 진정한 생시야말로 지고의 실재이다. 

이 진정한 생시는 새로이 얻은 어떤 상태로서 경험되지는 않으므로,

해탈자에게 그 해탈의 상태는 하나의 생각이 되지 않는다!

즉, 그에게는 속박이 실재하지 않으므로 해탈에 대한 어떤 생각도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속박에 대한 생각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올 수 있겠는가? 

속박과 해탈이라는 생각은 자신이 속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한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고의 지복을 성취하여 속박도 해탈도 없는 진아의 상태 안에 머무르는 것이,

바가반 라마나가 명하는 방식으로 참으로 주님께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야 말로 스리 라마나의 길이다. 

 

지고의 지복을 성취하여 속박도 해탈도 없는 이 (진아의) 상태 안에 

머무르는 것이 참으로 주님께 봉사하는 것이다.   - <우빠데샤 운디야르 제29편>-

 

                                         -스리 사두 옴 지음, 대성 옮김 <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