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4. 10:10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문 : 참자아가 지금 여기에 항상 있는데, 저는 왜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겁니까?
답 :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는가? 그 말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참나인가 아니면 거짓 나인가?
조사해 보면 그랗게 말하는 자는 거짓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거짓 나가 참나를 가리고 있는 장애물이다.
참나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거짓 나가 없어져야 한다.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 깨달음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다.
사실은 이미 깨달음 상태에 있으며,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깨달음은 새로운 무엇이어야 한다.
깨달음이 지금까지는 없었던 그 무엇이라면 새로 생기는 것이라는 뜻인데,
새로 생기는 것은 또 없어질 것이다.
깨달음이 영원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라면 추구할 가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새로 생기는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지금은 장애물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현존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장애물만 제거하면 된다.
무지가 장애물이다. 무지가 영원한 깨달음을 가리고 있다.
무지만 걷어내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나라는 생각'이 곧 무지이다. 이 생각의 근원을 탐구하도록 하라.
그러면 '나라는 생각'은 소멸될 것이다.
'나라는 생각'은 마치 영혼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 생각은 육체와 더불어 나타났다가 육체와 더불어 사라진다.
'이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리기 위해서는 이 생각의 근원을 탐구하는 길 밖에 없다.
육체가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이 육체가 나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라고 말하는 그 '나'가 누구인지 찾아보라.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다 보면 그대가 말하는 '나'는 사라질 것이다.
문 : 마음은 가슴에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나요?
답 : 수행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문 : 마음이 가슴에 머무는 것이 끝난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답 : 일상적인 상태로 되돌아와 다양한 현상세계를 인지한다.
이런 마음을 밖으로 향하는 마음이라고 하며, 가슴(내면)으로 향하는 마음은 '머무는 마음'이라고 한다.
가슴(내면)으로 들어가는 훈련을 거듭하면 할수록 마음이 결점이 제거되어, 마음은 지극히 순수해진다.
마음이 순수해지면 가슴(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훻씬 더 쉬워진다.
근원탐구를 시작하는 순간 즉시 가슴(내면)에 머물게 된다.
문 : 명상 중에 '사트 치트 아난다'(실재-의식-지복)를 체험한 사람이 명상에서 나온 다음에도 그 체험을 유지할 수 있나요?
답 :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체험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희미해진다. 마땅히 어둠은 참자아의 빛이 비쳐야만 영원히 사라진다. 마음의 습성(바사나)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체험한 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의 습성을 제거하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마음의 습성이 모두 뿌리 뽑힌 다음이라야 흔들리지 않는 깨달음에 머물 수 있다. 오랜 세월 쌓아온 마음의 습성과 싸워야만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문 : 마음의 습성은 차츰차츰 없어지나요? 아니면 어느 순간 일시에 없어지나요?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것은, 이걸 없애려고 오래 수행을 해오고 있는데 점차적으로 나아진다는 걸 느낄 수 없어서 입니다.
답 : 해가 떠오를 때 어둠이 차츰차츰 없아지는가? 아니면 일순간에 없어지는가?
문 : 탐구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답 :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정도가 깨달음이 얼마나 접근했느냐를 가리키는 척도가 된다.
하지만 깨달음 자체는 향상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언제나 깨달음일 뿐이다.
참자아는 언제나 깨달음 상태에 머물러 있다. 생각이라는 장애물이 그걸 가리고 있을 뿐이다.
목적지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했는가는, 참자아는 늘 깨달음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을 얼마나 제거했느냐로 측정할 수 있다. 생각은 생각을 일으키는 당사자가 점검해서 제거해야 한다.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들어가라. 거기에서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문 : 늘 여러가지 의심이 생깁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 : 한 가지 의심이 일어났다 사라지면, 다른 의심이 또 일어난다. 그 의심이 사라지면 또 다른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따라서 모든 의심이 없어질 가능성은 없다. 누구에게 의심이 일어나는지를 찾아보라. 의심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가서 거기에 머물러라. 그러면 의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일체의 의심을 없애는 방법이다.
문 : 어떤 대답도 기대하지 말고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까? 누가 누구에게 묻는 것입니까? 어떤 마음 가짐으로 물어야 하나요? 묻는 '나'는 참자아인가요, 아니면 에고인가요?
답 :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나'는 에고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 질문을 하는 에고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할 때 어떤 마음 가짐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대가 갖고 있는 마음가짐을 없애야 한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든지, 또는 나는 누구라든지 하는 등등의 마음가짐을 없애야 한다. 그대의 진정한 본성은 항상 그 자체로 현존한다. 그대의 본성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될 필요는 없다. 그대의 본성은 어떤 태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실재이다.
문 : 하지만 내가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탐구가 결국은 공허한 말장난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요? 혹은 만트라를 반복하듯이 끝없이 이 질문을 되풀이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답 : 참자아 탐구는 결코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다. 또 어떤 만트라를 반복하는 것과 같지도 않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탐구가 정신적인 질문으로만 끝난다면 그렇게 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근원을 탐구하는 목적은 마음의 모든 힘을 근원(내면)으로 모으는 데 있다. 그러므로 '내'가 또 다른 '나'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참자아 탐구는 마음의 모든 힘을 기울여 참자아의 깨달음에 머물고자 하는 강렬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결코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다.
문 : 아침이나 저녁에 잠깐씩 참자아 탐구를 하는 것으로도 충분한가요? 아니면 항상, 글을 쓰거나 걸으면서도 해야 하나요?
답 : 그대의 진정한 본성이 무엇인가? 글쓰는 것인가? 걷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는 것인가?
영구불멸하는 자아는 실재 뿐이다. 그대는 참자아의 순수한 현존상태를 깨달을 때가지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 그대가 일단 그 안에 안주하게 되면 더 이상 괴로움이 없을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생각의 근원을 찾아 헤멜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걷고 있다'거나 '나는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한, 그 생각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탐구하도록 하라.
문 : 일어나는 생각을 계속 물리치는 것도 참자아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답 : 디딤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근원탐구는 그대가 그대의 참자아에 밀착할 때 시작된다. 그때는 이미 생각의 흐름이 끊어진 다음이다.
문 : 그렇다면 근원탐구는 지적(知的) 탐구가 아니군요?
답 : 그렇다. 근원탐구는 지적인 탐구가 아니라 내적인 탐구다. 초보자에게는 마음을 집중하고 탐구하라고 가르침다. 하지만 마음이란 게 무엇인가? 마음은 참자아가 투사(投射)되어 나타난 것이다. 마음이 누구에게 나타나는지, 또 어디서 일어나는지 찾아보라. 그러면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나라는 생각' 자체가 사라지고 참자아의 순수한 의식만이 끝없이 확장된다.
문 : 제가 스리빈도 아쉬람에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신이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실 수 있도록,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완전히 비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은 대충 이런 내용의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그건 올바른 태도다. 능력은 위에서 내려온다. 그것이 직접적인 체험이다.' 저는 여기서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답 : 진정한 그대 자신이 되라. 위에서 내려오거나 나타나는 것은 없다. 에고를 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이미 현존하고 있다. 그대는 지금도 그 상태에 있다. 결코 거기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대는 마음을 비운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마음이 빈 것을 보고 있는 그대가 있다는 뜻이다.
그대는 또 무엇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 무언가를 보고자 하는 기대, 무엇을 얻고자 하는 욕망 등은 모두 에고의 활동이다. 그대는 에고의 덫에 걸린 것이다. 지금 그대가 하는 말은 진정한 그대가 아니라 에고가 하는 말이다. 진정한 그대 자신이 되라. 그것 말고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새롭게 어딘가에 도달했다면, 언젠가는 거기를 또 떠나야 한다. 이런 되풀이 되는 방황을 끝내고 진정한 그대 자신이 되도록 하라. 진정한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도록 하라. 태어나고, 가고,오고,다시 돌아가는 윤회의 수뢰바퀴에서 벗어나 참자아에 머물도록 하라.
문 : 참자아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 : 참자아를 안다는 것은 참자아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대가 어찌 참자아를 모를 수 있는가? 그대는 거울을 보지 않고는 그대의 눈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거울이 없으면 그대의 눈이 없는 것인가? 마찬가지다.
참자아가 그대에게 객관적으로 인식되지 않아도 그대는 늘 참자아 상태에 있다. 참자아가 객관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대는 '나는 참자아를 알 수가 없다' 고 말할 때, 그것은 주관과 객관이라는 상대적인 지식의 범주에서 알수 없다는 뜻이다. 그대는 상대적인 지식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대 자신도 상대적으로 인식하려고 한다. 이런 잘못된 정신의 습관 때문에 그토록 분명한 참자아를 모르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때문에 참자아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문 : 선생님은 존재를 말씀하십니다만, 존재가 과연 무엇입니까?
답 : 그대의 의무는 이것이 되거나 저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나(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 that I am)라는 말은 모든 진리의 요약이다. 여기에 이르는 방법은 '고요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고요하라'는 말은 그대가 생각하는 그대 자신을 소멸시키라는 뜻이다. 그대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형상과 모양은, 혼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라는 관념을 포기하라, 고요해지기만 하면 참자아를 깨닫는다.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참자아에 대한 앎은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아는 것이 유일하게 추구할 가치가 있는 최고의 앎이다. 이것을 표적으로 삼아 모든 에너지를 여기에 집중하여, 가슴으로 예리하게 깨닫도록 하라.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이 앎은, 흥분과 고통으로 뒤얽힌 마음의 활동이 멎고, 투명해 질 때 그 순수한 의식에 비친다. 이 순수한 의식은 형태가 없는 참자아인 가슴 속에서 항상 빛나고 있음을 알도록 하라. 이 앎은 자신을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관념으로 존재하는 그 어느 것과도 연관시키지 않고, 자신을 완전한 실재로 보는 사람에게 알려진다.
-데이비드 갓맨 편집,정창영 옮김<있는 그대로> 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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