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28. 23:55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스리 라마나의 철학적인 견해는 천년 이상 인도 철학사의 주류를 이루어 온 아드바이타 베단타(不二元論)와 매우 흡사하다.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수행에 관한 부분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리 라마나는 참자아 탐구를 옹호하는 반면,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추종자들은 참자아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것을 정신적으로 확언하는 명상 수행을 권한다.
'나는 브라만이다', '내가 그이다' 라는 것이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정신적인 확언(긍정)인데, 이 명제를 만트라로 사용하여 명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 명제의 의미에 대하여 명상하거나, 이 진술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을 체험하고자 노력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스리 라마나가 권하는 참자아 탐구는 흔히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아드바이타 베단타 추종자들은 '나는 브라흐만이다'라는 것이 그 대답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라고 하면 '나는 브라흐만이다'라는 정신적인 대답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스리 라마나는 이런 태도를 올바르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이 질문의 대답에 정신적으로 아무리 강력하게 집중을 하고 반복해 되뇌어도 마음은 결코 근원으로 가라앉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일종의 만트라처럼 사용하는 것 역시 똑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이런 것은 모두 참자아 탐구의 핵심을 놓친 것이라고 했다.
스리 라마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마음을 분석하여 그 본성에 대한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한 질문이 아니며, 만트라 역시 아니하고 했다. 이 질문은 생각이나 인식의 대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생각하고 인식하는 자에게로 관심을 되돌리는 것을 돕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서야 체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생각과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참자아가 아닌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정신적으로 물리쳐야만 참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힌두교 신앙 또한 범하기 쉬운 오류 중의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네티 네티(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 수행이 바로 이런 접근법이다.
이 수행을 하는 사람은 나와 동일시되는 모든 대상을 부정한다. '마음은 내가 아니다.' '육체는 내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계속 부정해 나가다 보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참자아에 도달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흰두교에서는 이 수행을 '자아 탐구;라고 부르는데, 스리 라마나가 권하는 수행법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혼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스리 라마나는 전통적인 '네티 네티' 수행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방법은 지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결코 마음을 넘어갈 수 없다고 했다.
'네티 네티'수행의 효과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때면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렇게 식별하는 행위 중에는 '나'라는 생각이 늘 있으며, 육체와 마음은 '내가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그 '나'까지 없애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부라만이다'는 긍정의 길을 가는 사람이나 '네티 네티'하며 부정의 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마음으로 참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마음의 활동을 통해 참자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 믿음이야말로 자아 탐구 수행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근인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 대한 대표적인 경우가, 참자아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육체에 있는 가슴 센터(신장 차크라)에 의식을 집중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스리 라마나가 말하는 가슴(Heart)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긴 오해이다.
이런 오해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 주제와 관련된 스리 라마나의 가르침을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리 라마나는 가끔 '나'라는 생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면서, 이 생각은 오른쪽 가슴에 있는 센타에서 출발해서 통로를 타고 머리로 올라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 센타를 '가슴 센타'라고 부르면서, '나'라는 생각이 참자아 속으로 들어가 소멸되는 것을, 가슴 센타로 돌아와 사라진다고 표현했다.
그는 또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 참자아를 체험할 때, 가슴 센타가 마음과 세상의 근원이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각성(覺醒)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그는, 가슴은 결코 육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라는 생각이 오른쪽 가슴의 센타에서 나왔다가 다시 그곳으로 들어 간다는 것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스리 라마나는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거나, 마음의 근원을 찾으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참자아를 탐구하는 동안 오른쪽 가슴에 있는 쎈타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스리 라마나는 그런 뜻이 아님을 여러 차례 지적했다.
마음 또는 '나'의 근원은 육체에 있는 어느 특정 부위에 집중함으로써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라는 생각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의식을 가슴 쎈타에 집중하는 것은 좋은 수행법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가끔 있긴 했지만, 이런 방법을 참자아 탐구와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스리 라마나는 간혹 가슴에 대한 명상은 참자아에 도달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이 말하는 가슴에 대한 명상이 오른 쪽 가슴에 있는 쎈타에 집중하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슴 '자체'를 명상하라고 가르쳤다. 가슴 '자체'는 육체의 어떤 특정 부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 '자체'란 내면에 존재하는 참자아를 가리킨다. 참자아의 진정한 본성은 육체의 어떤 특정 부위에 집중함으로써가 아니라, 참자아 '자체'로 존재함으로서만 깨달을 수 있다.
가슴과 가슴 쎈타에 대한 그의 말이 혼동을 불러 일으킬만한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글이나 대화를 기록한 어록집 어딜 보아도, 오른쪽 가슴에 있는 쎈타에 집중하는 것이 참자아 탐구라는 말은 한 구절도 없다. 이 문제와 관한 그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자아 체험에는 가슴 쎈타에 대한 각성이 포함되지만, 가슴쎈타에 집중함으로써 참자아 체험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 * * *
문 : 저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면서 '육체는 내가 아니다'. '숨과 기운도 내가 아니다.'는 식으로 내가 아닌 것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답 : 그렇다, 그게 지성으로 갈 수 있는 한계이다. 그대가 탐구하는 방식은 지성적이다. 모든 경전은 지성을 통한 탐구는 진리를 직접 드러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성은 진리로 인도 하는 역활 밖에는 하지 못한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데에는 그렇게 부정하는 '나'가 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식의 부정으로는 그렇게 부정하는 '나'를 끝내 부정하지 못한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 또는 '나는 저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말하는 '나'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남는 이 '나'가 에고 또는 '나'라는 생각이다.
다른 모든 생각은 이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일어난다.
따라서 '나'라는 생각이 모든 생각의 뿌리다. 이 뿌리가 뽑히면 동시에 다른 생각들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라는 뿌리를 찾도록 하라. '나는 누구인가?'를 묻도록 하라. '나'의 근원을 찾으면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순수한 참나만이 남을 것이다.
문 : '나'의 근원을 어떻게 찾습니까?
답 : 깊히 잠들어 있든 꿈을 꾸고 있든 깨어 있든, 그 어느 때나 '나'는 항상 현존하고 있다. 잠을 자고 있던 그대와 지금 말하고 있는 그대는 동일한 그대이다. 그대가 어떤 차원에 있든지 '나'라는 느낌은 항상 있다.
그대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대가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항상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항상 존재하고 있는 그 '나'가 누구인지를 찾아라.
문 : 저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때마다 '나는 죽을 운명의 육체가 아니라, 의식이고 참자아'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그 즉시 '참자아가 어찌하여 환영의 세계에 들어왔는가?'라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을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이 되겠지요.
답 :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은 에고 또는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탐구하려는 노력이다. 그대는 이 탐구를 하면서 '나는 이 육체가 아니다,'는 식의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만을 물음으로써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대가 말한 것같은 다른 생각들이 일어날 여지를 주어서는 안된다.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에만 집중해야 한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 즉시 그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난 것인지를 묻도록 하라.
만약 '나'에게 그 생각이 일어났다는 대답이 나오면, 다시 그 '나'가 누구인가, 그리고 '나'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도록 하라.
문 : 경전에서는 '네티 네티'를 통해 껍질을 벗어 버리리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요?
답 :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육체나 감각이나 마음 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잘못이 일어난다.
그릇된 동일시가 일어나면 참나는 보이지 않는다. '네티 네티'를 통해 껍질을 벗어버리라는 가르침은, 이렇게 참나가 아닌 것들로 뒤범벅이 된 상태에서 참나를 가려내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네티 네티'는 참자아가 아닌 것을 버리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참자아를 찾으라는 가르침이다.
참자아는 무한한 '나'이다. 이 '나'는 완전하고 영원하다. 이 '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하지만 다른 '나', 흔히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일시적이다.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이 일시적인 나는 계속 변하는데, 이 변화가 누구에게 일어나는 것인지 찾아보라.
분명히 '니'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라는 생각에 집중하도록 하라.
그러면 그 생각이 가라앉는다.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라.. 그러면 참자아만이 남을 것이다.
문 :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만트라 외듯이 반복해야 합니까?
답 :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만트라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라는 말은 모든 생각의 근원인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으라는 뜻이다.
문 :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구절에 대해 명상해야 되나요?
답 : 경전에 나오는 '나는 브라흐만이다' 라는 구절은, 이 말에 대해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자신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가 곧 자기 속에 깃들어 있는 브라흐만이라는 뜻이다. '나'를 찾아 보라. '나는 브라흐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브라흐만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나'를 찾기만 하면 된다.
문 : 참 어렵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답 : 여러가지 수행법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참자아를 탐구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브라만이다'를 반복하거나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경우에는 행위자가 있어야 한다. 행위자가 누구인가? '나' 아닌가?
그 '나'가 되라. 이것이 직접적인 방법이다. 다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도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하는 자리에 도달한다.
-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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