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30. 09:39ㆍ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141회]
11장. 오십마장(五十魔障)
11-5. 식음에 따른 마장(魔障)
11-5-1. 식음마에 갇힌 자리와 다해진 자리
[본문]
阿難彼善男子가 修三摩地하야 行陰盡者는 諸世間性의 幽淸擾動인 同分生機에 焂然隳裂 沉世網紐하고 補特伽羅의 酬業深脈이 感應懸絶하야 於涅槃天將大明悟호대 如雞後鳴에 瞻顧東方하면 已有精色인달하야 六根虛靜하야 無復馳逸하고 內內湛明하여 入無所入하며 深達十方十二種類의 受命元由하고 觀由執元하여 諸類不召하고 於十方界已獲其同하야 精色不沉하고 發現幽秘리니 此則名爲識陰區宇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지를 닦아 행음이 다한 자는 세간의 성품이라고 해야 할 그윽하게 맑고 요동하여 태어날 때부터 함께하는 생의 기틀[同分生機]의 깊고 미세한 벼리의 끈[網紐]이 문득 부서질 것이다.
이와 같이 보특가라의 업을 따르던 깊은 명맥(命脈)의 감응이 아주 끊어지면 열반의 하늘이 크게 밝아질 것이다. 이는 마치 닭이 맨 나중에 울면 동방에 정미로운 빛이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육근이 비고 고요하여 다시 밖으로 치달리지 않고 안과 밖이 고요하고 밝아서[內內湛明] 들어가고자 한 들어갈 곳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시방의 열두 가지 중생들의 목숨을 받는 근원적인 이유를 통달하고 그 연유를 관찰하여 근원을 잡았기에 어디에도 물러가지 않고 시방세계에 한결같이 정색(精色)에 침몰하지 아니하여, 그 나타남이 그윽하고 은밀한 것이니 이것을 식음(識陰)에 갇힌 것이라 한다.
[해설]
수행자가 삼매를 깊히 닦아서 행음이 다한다는 것은, 이제 바야흐로 식음(識陰) 속으로 들어왔다는 말입니다.이 식음의 상태에서 '에고(나)의 바탕의식'이 다 없어져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분생기(同分生機)라는 것은 베단타 스승들이 말하는 원인체(原因體)를 말합니다. 보통 "나라는 느낌"이 나오는 곳을 말하는데, 이것이 에고(무지)의 근원입니다.원인체 이전에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있습니다. 베단타에서는 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초원인체(超原因體)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벼리'라는 것은 그물 전체를 제어하는 굵은 밧줄을 말하는데,모든 현상계와 중생마음을 펼쳤다 거두어들여다 하는 그런 에고의 뿌리의식입니다. 여기서는 행음(行陰)이 없어진 것을 동분생기(同分生機)가 무너졌다고 했는데, 이 동분생기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이후상태를 말하는 것 같으며, 불교유식학적으로 '나'라는 자아의식이 나오는 '제7識'을 말하며, 이것이 행음(行陰)입니다. 따라서 행음(行陰)이 없어지면 '나라는 느낌'이 사라집니다.
또한 '보특가라의 업을 따른다'는 말은, 보특가라는 죽어서 6취(趣)을 취한다고 해서 한문으로 '수취취(受取趣)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죽어서 다른 데로 나고, 또 저기 가 죽어서 다른데로 태어나는 중음신(中陰身)을 말합니다. 과거의 업을 따라 업대로 태어나는 윤회영을 말합니다. 따라서 행음이 없어지면, 보특가라가 업에 따라서 과(果)를 받아 여기저기 태어나는 현상이 없어져서 열반의 하늘이 환하게 열린다는 것입니다.
또 닭이 새벽 늦게 맨 나중에 울면 동쪽하늘이 환하게 밝아온 것을 본다고 했는데, 행음 때에는, 마치 새벽에 첫닭이 울 때는 동쪽하늘이 약간만 희미하게 동이 터오고 어두운데, 식음에 들어 와서는 마치 닭이 새벽 마지막에 울면 이미 동쪽 하늘이 환해진것 같다는 말입니다.
식음에 와서는 6근과 육진이 하나가 되어서 마음이 고요하고 허공같이 맑아져서 더 이상 중생의 분별의식에 떨어지지 않고 어떤 대상에도 머물지를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마음이 맑고 밝아져서 열 두가지 중생들의 생명이 나오는 근본적인 원류(原流),즉 식음(識陰) 속에 안정되게 있게 되어, 행음으로 인해 어두웠던 것이 마치 새벽하늘에 동이 훤하게 밝아온 것처럼,육근(六根)과 6진(塵)이 다 없어져,6근이 하나로 합쳐지므로 막혔고 숨겨있던 은밀한 원리들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가 식음(識陰)에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본문]
若於群召에서 已獲同中에 銷磨六門하고 合開成就하면 見聞通鄰하고 互用淸淨하며 十方世界와 及與身心이 如吠琉璃하야 內外明徹하리니 名識陰盡이라 是人則能 楚越命濁하리니 觀其所由인댄 罔象虛無의 顚倒妄相으로 以爲基本이니라
만일 여러 종류에 태어나 동일함을 얻은 가운데 육문(六門)을 소멸하고 개합(開合)을 성취하면 보고 듣는 작용이 서로 통하고 어울려 호용(互用)에 일체가 청정할 것이며, 시방세계와 몸과 마음이 마치 폐유리(吠琉璃)처럼 내외가 명철(明徹)할 것이니 이것을‘식음(識陰)이 다 한 것이다’고 이름한다.
이 사람은 능히 명탁(命濁)을 초월하리니 그 까닭을 살펴보면 망상허무(罔象虛無)한 전도망상(顚倒妄想)으로 근본을 삼았기 때문이다.
[본문]
阿難當知하라 是善男子가 窮諸行空하고 於識還元하야 已滅生滅이나 而於寂滅에 精妙未圓이니 能令己身으로 根隔合開하고 亦與十方의 諸類通覺하야 覺知通脗하야 能入圓元하리니 若於所歸에 立眞常因하야 生勝解者는 是人則墮因所因執하야 娑毗迦羅의 所歸冥諦로 成其伴侶하야 迷佛菩提하고 亡失知見하며 是名第一에 立所得心하야 成所歸果라하나니 違遠圓通하고 背涅槃城하야 生外道種이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라. 이 선남자가 모든 행음이 공(空)함을 궁구해 다하고, 식음(識陰)이 근원에 돌아가 생멸이 이미 멸하였으나 적멸(寂滅)한 가운데 정묘(精妙)가 원만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몸이 그동안 육근에 막혔던 것이 합하여 열리고, 시방의 가지가지 무리들과 함께 각(覺)이 통하고 각지(覺知)가 통하여 원만한 근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니,
이 때 만약 돌아갈 곳이‘진실되고 항상하다’하여 이러한 인(因)을 세워 수승하다는 견해를 낸다면 이러한 사람은‘소인(所因,非依處)을 인(因,依處)이다’고 하는 집착[因所因執]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사비가라(娑毗迦羅)들이‘명제(冥諦)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반려(伴侶)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르고 불지견(佛知見)을 망실하게 되는데, 이것을‘제일(第一)의 소득심(所得心)을 세워 소귀과(所歸果)를 이루려 하는 것이다’고 부르며, 이들은 원통을 어기고 열반의 성(城)을 등지어 외도의 무리에 태어난 것이다.
[본문]
수행자가 행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결국 식음까지 왔는데, 행음이 끝나서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나타나는데, 그 적멸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 정미롭고 묘한 것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식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면 적멸이 원만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물에 비유할 때 상음은 큰 파도가 출렁이는 것이라고 하면 행음은 잔파도가 있는 것으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식음은 미세한 물결조차 없어져서 물이 흘러가긴 가지만 흘러가는 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식음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물이 잔파도가 아직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몸의 육근(六根)이 서로 간에 막혔던 것이 서로 합해져서 통해 버리니깐, 자기의 몸마음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물,무생물들과 함께 깨달아 아는 것이 서로 통하게 되면 홀연히 원래 근원인 식음 자리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돌아간 자리인 식음(識陰)을 가리켜 '진실하고 항상하다'고 세우고 그것을 인(因)으로 착각하여 수숭하다는 소견에 집착한다면 이런 사람은 바로 인(因)의 대상을 인(因)이라고 착각해서 집착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직 중간과정에 있는데 최종 멸진정에 도달했다고 착가하는 것입니다.
'사비가라'는 외도의 일종인데, 마등가가 행한 주문이 바로 이 사비가라의 주문입니다. 이 사비가라 외도가 주장하는 "명제(冥諦)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주장과 같습니다. 명제(冥諦)란 모든 물체의 근원(原因體)을 말하며 식음(識陰)과 같은 단계를 말합니다. 불법을 닦는 수행자들이 식음(識陰)까지 와서 이곳이 최종적인 귀의처(歸依處)라고 여기는데, 그외에도 수많은 수도자들이 이 식음(識陰)을 최종 귀의처라고 잘못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바른 깨달음의 길을 잃어버린 것으로서, 이 식음에 도달하기만 하면 외도(外道)로 변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귀의처를 도달했다" 또는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라면서 자기가 얻은 바가 있다, '내가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그런 소견(所得心)을 세우고 거기에 빠짐으로써, 이러한 견해가 깨달음의 길에서 중간에 샛길로 잘 못빠져서 외도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집착한다
[본문]
阿難又善男子가 窮諸行空하고 已滅生滅이나 而於寂滅에 精妙未圓이니 若於所歸에 覽爲自體하야 盡虛空界의 十二類內所有衆生이 皆我身中에 一類流出이라하야 生勝解者는 是人則墮能非能執하야 摩醯首羅의 現無邊身으로 成其伴侶하야 迷佛菩提하고 亡失知見하며 是名第二에 立能爲心하야 成能事果라하나니 違遠圓通하고 背涅槃城하야 生大慢天의 我遍圓種이니라
아난아!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이 공(空)함을 궁진하고 생멸이 이미 멸하였으나 적멸(寂滅)한 가운데 정묘(精妙)가 원만하지는 못하였으니 이 때 만약 식음의 근원이 구경에 돌아가야할 자신의 몸이라고 보아
‘모든 허공계의 여러 가지 중생들이 다 나의 이 몸에서 한결같이 유출하였다’고 생각하여 수승하다는 견해를 낸다면 이러한 사람은‘할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집착[能非能執]에 떨어져 끝없는 몸을 나타내는 마혜수라(摩醯首羅)와 반려(伴侶)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르고 불지견(佛知見)을 망실하게 된다. 이것을 이름하여‘제이(第二)의 능위심(能爲心)을 세워 능사과(能事果)를 이루려 한다’고 하는데, 이들은 마침내 원통을 어기고 열반의 성(城)을 등지게 되어 대만천(大慢天)의‘내[我]가 두두 원만하다’고 하는 무리에 태어날 것이다.
[해설]
수행자가 행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결국 식음까지 왔는데, 행음이 끝나서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나타나는데, 그 적멸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 정미롭고 묘한 것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식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면 적멸이 원만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때 식음이 나온 근원이 돌아갈 자리를 자기의 몸으로 삼고, 온 허공 안 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모두 내 몸 속에서 하나로 흘러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며 수승하다는 소견을 낸다면, (원만한 본래의 자리는 일체가 끊긴 자리인데 여기 식음 속에서 '진실하고 항상하다'는 생각에 떨어져버리는 것임) 이러한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하는 집착에 떨어집니다. 따라서 마헤수라(색구경천의 천왕으로 신통이 자재함)같이 끝없는 몸을 나타내는 자들과 동일한 소견을 가진 외도가 되어 부처님의 옳바른 깨달음법을 잃어버리고 옳바른 불지견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가 만물의 지배자로서 만물을 자기가 만들어냈다고 하는 능위심(能爲心)을 세워서 만물이 스스로 자기가 만들어 낸 결과로서의 피조물이라는 능사과(能事果)를 이룬다는 외도의 견해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원통을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리면서 마헤수라의 하늘인 대만천(大慢天;색구경천)에 머물러서 '내가 두루 원만하다'는 외도무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 비상(非常)을 상(常)이라고 집착한다
[본문]
又善男子가 窮諸行空하고 已滅生滅이나 而於寂滅에 精妙未圓이니 若於所歸에 有所歸依하야 自疑身心도 從彼流出하고 十方虛空咸其生起라하야 旣於都起의 所宣流地에 作眞常身하야 無生滅解호대 在生滅中하야 早計常主하야 旣惑不生하고 亦迷生滅하야 安住沈迷하
면서 生勝解者是人則墮常非常執하야 計自在天으로 成其伴侶하야 迷佛菩提하고 亡失知見하리니 是名第三에 立因依心하야 成妄計果라 違遠圓通하고 背涅槃城하야 生倒圓種이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이 공(空)함을 궁진하고 생멸이 이미 소멸하였으나 적멸(寂滅)한 가운데 정묘(精妙)가 원만하지는 못하였으니‘돌아가 귀의할 곳이 있다’고 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도 거기서 유출되었고, 시방허공도 모두 거기에서 생기지 않았나 의심할 것이다.
이와 같이‘모든 것이 셍겨나 흐르는 곳이 진실되고 항상한 몸이다’고 하여 생멸이 없다는 견해를 내어, 이렇게 생멸하는 가운데 상주하는 것이라고 미리 계탁하여, 이미 불생멸(不生滅)도 모르고 생멸(生滅)도 미혹하여 미혹에 안주하면서 수승하다는 견해를 내개 되는데, 이러한 사람은‘항상하지 않는 것을 항상하다’고 하는 집착[常非常執]에 떨어져 자재천(自在天)의 주장과 반려(伴侶)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르고 불지견(佛知見)을 잃을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제삼(第三)의 인(因)에 의지한다는 주장을 세워 잘못된 결과[忘計果]를 이룬 것이다’고 하니 원통을 어기고 열반의 성(城)을 등지게 되어 전도된 원만한 무리[顚倒種]에 태어날 것이다.
[해설]
수행자가 행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결국 식음까지 왔는데, 행음이 끝나서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나타나는데, 그 적멸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 정미롭고 묘한 것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식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면 적멸이 원만할 텐데 그렇지가 못한데, 만약 돌아갈 자리와 돌아가 의지할 곳이 있다고 여겨 스스로의 몸과 마음도 여기(식음)에서 나왔고, 시방의 허공세계도 모두 여기(식음)에서 생겨났으며, 생겨나는 모든 것들이 퍼져 흐르는 곳이 바로 여기(식음)라고 헤아려서, 진실하고 항상한 몸은 생멸이 없다는 견해를 일으키고 생멸기운에 있으면서 상주(常住)한다고 미리 헤아려, 이미 불생(不生)에도 현혹되고 생멸(生滅)에도 미혹하여 혼미 속에서 안주하면서 이것이 수숭하다는 견해가 생긴다면, 이런 사람은 바로 '항상하지 못한 것을 항상하다'고 하는 집착에 떨어져서(왜냐하면 생멸기운에 있으면서 상주(常住)할 수는 없음) 자재천(自在天)을 헤아리고 그들과 함께 반려자가 되어 부처님의 옳바른 깨달음법을 잃어버리고 부처님의 지견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이름하여 세번째로 인(因)에 의지하는 인의심(因依心)을 세워 '잘못 헤아리는 결과(妄計果)'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고 원통을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리면서 전도된 종자만을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 것(다)과 앞에 것(나)은 모두 식음으로부터 일어났으나 계탁이 같지 않습니다. 앞(나)에서는 식음이 바로 나이니 내가 능히 만물을 낸다고 계탁했다면, 여기(다)에서는 나는 식음으로부터 나왔으며 식음은 참으로 항상하다고 계탁했으므로, 이점이 좀 다릅니다.
라)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집착한다
[본문]
又善男子가 窮諸行空하고 已滅生滅이나 而於寂滅에 精妙未圓이니 若於所歸에 知遍圓故로 因知立解호대 十方草木도 皆稱有情하야 與人無異라하며 草木爲人하고 人死還成十方草木이라하야 無擇遍知로 生勝解者는 是人則墮知無知執하야 婆吒霰尼의 第一切覺으로
成其伴侶하야 迷佛菩提하고 亡失知見하리니 是名第四에 計圓知心하야 成虛謬果라하나니 違遠圓通하고 背涅槃城하야 生倒知種이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이 공(空)함을 궁진하고 생멸이 이미 소멸하였으나 적멸(寂滅)한 가운데 정묘(精妙)가 원만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일체를 분별해 아는[所知] 앎이 두루 원만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知]으로 인하여 수승하다는 견해를 세우는데, 시방의 초목도 다 정(情)이 있어서‘사람과 다를 것 없다’하여 초목도 사람이 되고, 사람도 죽어서 시방의 초목이 된다고 하는 등, 가릴 것 없이 두루 다 안다하여 수승하다는 견해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앎이 없는 것을 앎이 있다고 하는 집착[知無知執]에 떨어져‘일체가 다 깨달음[覺]이다’고 고집하는 바타(婆吒)와 선니(霰尼) 등과 반려(伴侶)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르고 불지견(佛知見)을 잃게 된다.
이것을 이름하여‘제사(第四)의 원만히 아는 마음[圓知心]을 계탁하여 그것으로 헛되고 잘못된 결과[虛謬果]를 이룬 것이다’고 하니 원통을 어기고 열반의 성(城)을 등져 전도(顚倒)된 지견(知見)의 무리[倒知種]에 태어날 것이다.
[해설]
수행자가 행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결국 식음까지 왔는데, 행음이 끝나서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나타나는데, 그 적멸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 정미롭고 묘한 것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식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면 적멸이 원만할 텐데 그렇지가 못한데,만약 알 대상(所知)에 대하여 두루 원만하게 알기 때문에 그 아는 것으로 인하여 견해를 세우고, 세상의 풀과 나무도 모두가 정(情)이 있는 것이어서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면서, 초목도 사람이 되고 사람도 죽으면 다시 세상의 풀과 나무가 된다고 말하며, 가릴 것 없이 두루 아는 것이 수숭한 것이라는 견해를 세우는데, 이런 사람은 바로 '아는 것이 없는 것(無知)을 안다(知)'고 하는 집착에 떨어져 일체법에 지각이 있다고 하는 바타와 산니(초목도 지각이 있다고 주장하는 외도)와 같이 일체가 깨달음이라고 고집하는 자와 함께 반려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미혹하여 깨달음에 대한 지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소지(所知)는 관하는 대상인 식음(識陰)인데, 식(識)에 지(知)가 있어 일체법이 지(知)로 말미암아 변화해서 일어난다고 여깁니다. 지(知) 자체가 제법에 원만하고 두루하다고 헤아리고 분별함으로서 드디어 다른 견해를 세우니 무정물에도 앎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이름하여 네 번째로 '원만하게 아는 마음'을 헤아려 헛되고 잘못된 결과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고, 원통(圓通)을 어기고 열반성을 져버리면서 전도된 지(知)의 종자만을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원지(圓知)를 인지심(認知心)으로 잘못 헤아리고 분별하여 과지도 마침내 헛되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지(無知)를 지(知)라고 한 것이 전도된 앎입니다.
마) 무생(無生)을 생(生)이라고 집착한다.
[본문]
又善男子가 窮諸行空하고 已滅生滅이나 而於寂滅에 精妙未圓이니 若於圓融한 根五用中에 已得隨順하고 便於圓化에 一切發生이라하야 求火光明하고 樂水淸淨하며 愛風周流하고 觀塵成就하야 各各崇事하야 以此群塵으로 發作本因이라하야 立常主解하면 是人則墮生無生執하야 諸迦葉波와 幷婆羅門의 勤心役身하야 事火崇水하야 求出生死로 成其伴侶하야 迷佛菩提하고 亡失知見하리니 是名第五에 計著崇事하야 迷心從物하고 立亡求因하야 求妄冀果라하나니 違遠圓通하고 背涅槃城하야 生顚化種이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이 공(空)함을 궁진하고 생멸이 이미 멸하였으나 적멸(寂滅)한 가운데 정묘(精妙)가 원만하지 못하였으니 이 때 만약 원융하여진 근(根)이 서로 작용하는 가운데 수순함을 얻게 되면 문득‘원융하게 사대(四大)가 변화하는데서 일체가 발생한다’고 하여 불의 광명을 구하고, 물의 청정함을 좋아하며, 바람의 유통함을 사랑하고, 티끌의 성취함을 보아, 제각기 숭배하여 섬기면서‘사대(四大)가 여러 가지 경계[塵]를 만들어내는 본인(本因)이다’고 하여 상주한다는 견해를 세우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은 무생(無生)을 생(生)이라고 하는 집착[生無生執]에 떨어져 몸과 마음으로 불을 섬기고 물을 숭배하면서 생사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가섭파(迦葉波)와 바라문(婆羅門)들의 반려(伴侶)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르고 불지견(佛知見)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을‘제오(第五)의 제멋대로 숭배하고 섬기는 일을 헤아려 어두운 마음으로 사물을 따르면서 허망한 인(因)을 세우고 허망한 과(果)를 바라는 것이다’고 한다. 이들은 마침내 원통을 어기고 열반의 성(城)을 등지게 되어 사대(四大)가 굴러서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하는 무리[顚化種]에 태어날 것이다.
[해설]
수행자가 행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결국 식음까지 왔는데, 행음이 끝나서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나타나는데, 그 적멸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 정미롭고 묘한 것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식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면 적멸이 원만할 텐데 그렇지가 못한데, 이 때 만약 원융해진 육근이 서로 작용하는 가운데 이미 이를 따르게 되었다면, 바로 원융한 사대의 변화로부터 일체가 나온다고 하여, 불의 광명을 구하고, 물의 청정을 즐기며, 바람이 두루 유통하는 것을 좋아하고, 육진(六塵)의 성취를 보고, 각각 숭상하고 섬기어 '이 사대(四大)를 가지고 여러 가지 경계가 만들어지는 본인(本因)이다'라고 하여 상주한다는 견해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무생(無生)이 생(生)이다'라고 하는 집착에 떨어져 여러 가섭파(부처님의 제자인 우루빈나 가섭, 가야 가섭 및 나제 가섭 등 가섭삼형제를 말함,이들은 부처님 제자가 되기 전에는 화룡(불)을 섬기는 외도 였음)과 아울러 바라문들이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써가면서 불을 섬기고 물을 숭상하며 생사를 벗어나려는 이들과 반려자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잊어버리고 부처의 지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름하여 '숭상하고 섬기는 것'을 헤아려 집착하여 '마음을 모르고 사물을 따르는 것'이라 하고, 헛된 것을 구하는 망구인(妄求因)을 세워 헛된 결과를 바라는 망기과(妄冀果; 지,수,화,풍의 사대가 일체 만물의 근본이라고 착각하여 인(因)이 아닌 것을 헛되이 구하고, 이를 숭상함으로서 성불할 것이라는 과보를 헛되이 바라는 것을 말함)를 구하여 원통을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리면서 전도된 변화의 종자들만을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바) 무귀처(無歸處)를 귀의처(歸依處)라고 집착한다.
[본문]
又善男子가 窮諸行空하고 已滅生滅이나 而於寂滅에 精妙未圓이니 若於圓明에 計明中虛하야 非滅群化하고 以永滅依로 爲所歸依하야 生勝解者는 是人則墮歸無歸執하야 無相天中의 諸舜若多로 成其伴侶하야 迷佛菩提하고 亡失知見하리니 是名第六에 圓虛無心으로 成空亡果라하나니 違遠圓通하고 背涅槃城하야 生斷滅種이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이 공(空)함을 궁진하고 생멸이 이미 멸하였으나 적멸(寂滅)한 가운데 정묘(精妙)가 원만하지 못하였으니 이 때 원명(圓明)한 가운데 원명을 허(虛)하다고 계탁하여 잘못되어 모든 변화를 멸(滅)이라 하고, 영원히 소멸한 곳[永滅依]으로써 귀의할 곳을 삼아 수승하다는 견해[勝解]를 내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돌아갈 곳이 아닌 곳을 돌아갈 곳이라고 하는 집착[歸無歸執]에 떨어져 무상천(無相天) 가운데 순야다(舜若多) 등과 반려(伴侶)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르고 불지견(佛知見)을 잃을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제육(第六)의 원만하게 허무하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공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과[空亡果]를 이룬다’고 한다. 이들은 마침내 원통을 어기고 열반의 성(城)을 등지게 되어‘구경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무리[斷滅種]에 태어날 것이다.
[해설]
수행자가 행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결국 식음까지 왔는데, 행음이 끝나서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나타나는데, 그 적멸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 정미롭고 묘한 것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식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면 적멸이 원만할 텐데 그렇지가 못한데, 이 때 만약 그 원명한 자리에서 그 '밝음이 모자라다'고 헤아려서, 여러 가지 변화하는 것들은 적멸의 자리가 아니니, 영원한 적멸의 자리를 의지함으로써 귀의할 곳을 삼는 것이 수숭하다는 견해를 일으키면, 어떤 사람은 '돌아갈 곳이 없는 곳을 돌아 갈 곳'이라고 하는 집착에 떨어지니, 무상천(無想天: 無色界天-공무변천, 식무변천, 무소유천 및 비상비비상처천 등으로 구성됨) 가운데 모든 순야다(虛空神)들과 반려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에 미혹하여 부처의 지견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갑니다.
이를 이름하여 원명(圓明)함을 잘못 이해하여 공무심(空無心)에 떨어지는 원허무심(園虛無心)으로 비어 없어지는 공망과(空亡果;空하여 없어지는 단멸의 경계를 과로 삼는 것)를 이룬다고 하고, 원통(圓通)을 멀리 여의고 열반성을 저버리면서 단멸의 종자만을 생겨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 '탐내서는 안될 것을 탐하는 집착'에 떨어진다
[본문]
又善男子가 窮諸行空하고 已滅生滅이나 而於寂滅에 精妙未圓이니 若於圓常에 固身常住호대 同于精圓하야 長不傾逝라하야 生勝解者는 是人則墮貪非貪執하야 諸阿斯陀의 求長命者로 成其伴侶하야 迷佛菩提하고 亡失知見하리니 是名第七에 執著命元하야 立固妄因하야 趣長勞果라하나니 違遠圓通하고 背涅槃城하야 生妄延種이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이 공(空)함을 궁진하고 생멸이 이미 멸하였으나 적멸(寂滅)한 가운데 정묘(精妙)가 원만하지 못하였으니 이때 만약 원만하고 항상한 곳[圓常]에서 견고한 몸으로 항상 머물고 싶어서‘정미롭고 원만한 성품과 같이 목숨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여 수승하다는 견해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탐낼 수 없는 것을 탐내는 집착[貪非貪執]에 떨어져 오래 살기를 구하는 아사타(阿斯陀) 등과 반려(伴侶)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르고 불지견(佛知見)을 잃게 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제칠(第七)의 장명(長命)의 본원을 집착하여 그것으로 견고(固)한
망인(妄因)을 세워 수명만 늘이는 피곤한 과[長勞果]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들은 마침내 원통을 어기고 열반의 성(城)을 등지게 되어 부질없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무리[妄延種] 태어날 것이다.
[해설]
탐내지 말아야 할 것을 탐내는 집착입니다. 수행자가 행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결국 식음까지 왔는데, 행음이 끝나서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나타나는데, 그 적멸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 정미롭고 묘한 것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식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면 적멸이 원만할 텐데 그렇지가 못해서, 몸이 상주(常住)하기를 탐내어 영원히 죽지 않으려는 생각을 내면 곧 탐(貪)과 비탐(非貪)의 집착에 떨어져 오래 살기를 구하는 아사타(오래산 신선의 이름)들과 반려가 되어, 목숨의 근원에 집착하여 견고하다는 망인(妄因)을 세우는 것이라 하고 오래도록 수고로운 결과를 향해 나아갈 뿐, 원통을 멀리 저버리고 열반성을 어기면서 헛되이 목숨을 연장하려는 망연(妄延)의 종자만 생겨나게 합니다.
아) 진실하지 못한 것을 진실하다고 집착한다
[본문]
又善男子가 窮諸行空하고 已滅生滅이나 而於寂滅에 精妙未圓이니 觀命互通하고 却留塵勞호대 恐其消盡하야 便於此際에 坐蓮華宮하야 廣化七珍하며 多增寶媛하고 恣縱其心이라하야 生勝解者는 是人則墮眞無眞執하야 吒枳迦羅로 成其伴侶하야 迷佛菩提하고 亡失知見하리니 是名第八에 發邪思因하야 立熾塵果리니 違遠圓通하고 背涅槃城하야 生天魔種이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이 공(空)함을 궁진하고 생멸이 이미 멸하였으나 적멸(寂滅)한 가운데 정묘(精妙)가 원만하지 못하였으니 이때 만약 목숨이 서로 통함을 보고 세속의 욕망[塵勞] 잡아두고 싶고 또 소멸할까 두려워 문득‘이 기회에 연화궁(蓮華宮)에 앉아서 일곱가지 보배를 널리 진열해 놓고 미인[寶媛] 모아 마음대로 즐겨야 한다’고 하며‘이것이 가장 수승한 일이다’고 견해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하는 집착[無眞執] 떨어져 타지가라(吒枳迦羅)들과 반려(伴侶)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르고 불지견(佛知見)을 잃을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제팔(第八)의 사특한 생각의 인[邪思因] 내어 치성한 욕망의 과[熾塵果] 세우려 한다’고 하니 원통을 어기고 열반의 성(城)을 등지게 되어 부질없이 천마(天魔)의 무리[天魔種] 태어날 것이다.
[본문]
진실하지 못한 것을 진실하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수행자가 행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결국 식음까지 왔는데, 행음이 끝나서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나타나는데, 그 적멸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 정미롭고 묘한 것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식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면 적멸이 원만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며,이때 목숨이 서로 통하고 있음을 관찰하고, 머물러 있는 번뇌가 두려워 이를 물리쳐 소진시키면서, 바로 이때에 연화궁에 앉아 일곱 가지 보배를 널리 모양을 바꿔가며 예쁜 여인들을 많이 모아 마음대로 즐기는 것이 수숭한 것이라는 견해가 생기게 되면, 이런 사람은 '진실하지 못한 것을 진실'이라고 하는 집착에 떨어져 타지가라들과 반려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에 미혹하여 부처의 지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이름하여 삿된 생각을 하는 사사인(邪思因; 삿된 생각을 일으키는 원인)을 내어 번뇌가 치솟는 치진과(熾塵果; 결과로서 번뇌가 치성하게 일어나는 것)를 세우는 것이라 하고, 원통(圓通)을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리면서 천마(天魔)의 종자만을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자) 대승을 믿지 않는 소승 성문에 떨어진다
[본문]
又善男子窮諸行空하고 已滅生滅이나 而於寂滅精妙未圓이니 於命明中分別精麤하며 疏決眞僞因果相酬라하야 唯求感應背淸淨道하니 所謂見苦斷集하며 證滅修道하야 居滅已休更不前進하야 生勝解者是人則墮定性聲聞하야 諸無聞僧增上慢者로 成其伴侶하야 迷佛菩提亡失知見하리니 是名第九圓精應心하야 成趣寂果리니 違遠圓通背涅槃城하야 生纒空種이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이 공(空)함을 궁진하고 생멸이 이미 멸하였으나 적멸(寂滅)한 가운데 정묘(精妙)가 원만하지 못하였는데도, 이때 만약 목숨이 밝아진 가운데에서‘정미로움과 거침을 분별하고, 진실과 허위를 밝히며, 인과(因果)가 서로 갚아지는 것이다’고 하여 오직 감응(感應)만 구하고 청정한 도(道)를 등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苦)를 보고 집(集)을 끊으며, 멸(滅)을 증득하려고 도(道)를 닦아서 멸(滅)에 이르고는 그만 쉬어 다시 전진하지 아니하면서 수승하다는 견해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정성성문(定性聲聞)에 떨어져 증상만(增上慢)인 더 듣고 배우려하지 않는 마귀[無聞比丘]들과 반려(伴侶)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르고 불지견(佛知見)을 잃을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제구(第九)의 정미롭게 응하는 마음[精應心]을 원만히 성취하여 고요에 떨어진 과[趣寂果]를 이루었다’고 하니 원통을 어기고 열반의 성(城)을 등지게 되어 공(空)에 집착하는 무리[纒空種]에 태어날 것이다.
차) 소승근기의 성문에 떨어진다
[해설]
궁극의 적멸에 이르지 않고 직전에 만족하려는 것입니다.수행자가 행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결국 식음까지 왔는데, 행음이 끝나서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나타나는데, 그 적멸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 정미롭고 묘한 것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식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면 적멸이 원만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며,이때 만약 정신이 밝게 깨어 있는 가운데서, 미세하고 거친 것을 분별하고, 진실과 허위를 밝히며, 인(因)과 과(果)가 서로 갚아가는 것이라고 하여 오직 느낌으로 응하는 것만 찾고, 청정한 도를 저버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괴로움을 보고 그 원인을 끊어 적멸을 증득코자 도를 닦아 적멸에 이르러서는 쉬기만 하고 다시 전진하지 않는 것이 수숭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를 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정성성문(定性聲聞; 소승근기로 성품이 정해진 자, 대승을 믿지 않는 성문)에 떨어져 더 들으려고 하지 않는 수행자로서 증상만(增上慢)에 빠진 무리들과 반려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에 미혹하여 부처의 지견(知見)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원정(園精)에 응하는 마음으로 적멸의 과(果)를 성취하였다고 하고, 원통을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리면서 공(空)에 속박되는 종자만을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차. 정성(定性)벽지불에 떨어진다
[본문]
又善男子가 窮諸行空하고 已滅生滅이나 而於寂滅에 精妙未圓이니 若於圓融淸淨覺明에 發硏深妙하야 卽立涅槃하고 而不前進하야 生勝解者는 是人則墮定性辟支하야 諸緣獨倫인 不廻心者로 成其伴侶하야 迷佛菩提하고 亡失知見하리니 是名第十에 圓覺脗心으로 成湛明果리니 違遠圓通하고 背涅槃城하야 生覺圓明不化圓種이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이 공(空)함을 궁진하고 생멸이 이미 멸하였으나 적멸(寂滅)한 가운데 정묘(精妙)가 원만하지 못하였으니 이때 원융(圓融)하고 청정(淸淨)한 각명(覺明)에서 심묘(深妙)한 것을 연구 발명하고, 이것이 열반이라 하여 전진하지 않으면서 수승하다는 견해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정성벽지(定性辟支)에 떨어져서 회심(廻心)하지 못하는 연각(緣覺)과 독각(獨覺)들의 반려(伴侶)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르고 불지견(佛知見)을 잃게 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제십(第十)의 원융한 깨달음에 통하는 마음으로 고요하고 밝음에 머무는 과[湛明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들은 마침내 원통을 어기고 열반의 성(城)을 등지게 되어 깨달음은 원명(圓明)하나, 중생교화가 없는 원적(圓寂)의 무리[不化圓種]에 태어날 것이다.
[해설]
벽지와 같이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만족하여 고집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행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결국 식음까지 왔는데, 행음이 끝나서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나타나는데, 그 적멸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 정미롭고 묘한 것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식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면 적멸이 원만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며,이 때 만약 원융하고 청정한 밝은 깨달음으로 심묘(深妙)한 경지에 이르러(하지만 아직 식음에 가리고 있어 본래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 바로 열반이라고 내세우며,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으면서 수숭하다는 견해를 내면, 어떤 사람은 정성 벽지불(본각의 자리를 말하며, 이 자리에 이르러 견해를 세우면 마구니가 되어 소승의 오경(悟境)으로 타락하여 담명과(湛明果)를 이룬 것에 불과하게 됨)에 떨어져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는 연각이나 독각들과 반려가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에 미혹하여 부처의 지견을 잃게 됩니다. 이것을 원각에 맞는 마음으로 맑고 고요한 담명과(湛明果; 연각 등 벽지불이 스스로의 오경(悟境)을 열반으로 삼는 것)를 이루었다고 하고, 원통(圓通)을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리면서, 깨달음의 원명(圓明)이 완전한 원만(圓滿)이 아닌 달라진 원명(圓明)의 종자만을 생겨나게 합니다.
즉 원명한 본각(本覺)의 자리에 이르러 수숭하다는 견해를 세우니, 그 소견으로 말미암아 마사(魔事)가 되어, 깨달음의 원명(圓明)이 소승(小乘)의 오경(悟境)으로 타락하여 담명과(湛明果)를 이룬 것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완전한 원명(圓明)이 아닌 달라진 원명(圓明)이 되는데, 이는 아상(我相)을 세우는 것이므로 보살이 되지 못하고 성문,연각 등 이승(二乘)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11-5-3. 식음마의 피해를 알려 정법을 보호하도록 당부하시다.
[본문]
阿難如是十種禪那로 中途成狂이어나 因依迷惑하야 於未足中에 生滿足證은 皆是識陰의 用心交互일새 故生斯位어늘 衆生頑迷하야 不自忖量하고 逢此現前에 各以所愛先習迷心으로 而自休息하야 將爲畢竟所歸寧地하고 自言滿足無上菩提라하야 大妄語成하리니 外道邪魔는 所惑業終하면 墮無間獄하고 聲聞緣覺은 不成增進하리라
아난아! 이 열 가지 선나(禪那)로 중도에 잘못된 견해[狂解]를 이루거나 미혹으로 말미암아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만족하게 증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식음(識陰)에서 작용하는 마음이 서로 교차하여 이러한 지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이 어리석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이러한 현상을 만났을 때에 제각기 본래 애착하고 미혹된 마음으로 필경에 돌아갈 곳[歸寧]인 줄 여기고,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만족하였노라 히여 대망어(大妄語)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도나 사특한 마구니는 받는 업보(業報)가 끝나고 무긴 지옥에 떨어지며, 성문과 연각은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본문]
汝等存心하야 秉如來道호대 將此法門하야 我於滅後에 傳示末世하야 普令衆生으로 覺了斯義하며 無令見魔로 自作沈孹하고 保綏哀救하야 消息邪緣하며 令其身心으로 入佛知見하면 從始成就하고 不遭岐路하리라
너희들은 온 마음으로 여래의 도(道)를 붙들어 이 법문을 가져다가 내가 멸도한 뒤의 말세에 전하여서 중생들에게 이 뜻을 깨닫게 하고, 견마(見魔)에게 스스로 깊은 죄를 짓지 않게 하라. 또한 부처님의 법을 잘 보호하고 구원하여 사특한 인연을 쉬고 몸과 마음이 불지견(佛知見)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성취하고 기로(岐路)를 만나지 않게 하라.
[해설]
이러한 열 가지 선나를 수행하는 도중에 그릇된 소견을 이루어 미혹함으로서, 아직 부족한 상태에 있으면서,만족하게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는 것은, 모두가 식음(識陰)이 작용하는 마음이 서로 어울리기 때문에 그러한 마구니의 경계가 생겨나는 것인데, 중생들이 미혹해서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여래의 도를 받들어 이 법문을 가지고 말법시대에 이를 잘 전하여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 근본을 따르게 하고 샛길을 만나지 않게 전법을 보호하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식음(識陰)이 다 할 때까지 생기는 마구니는 경계에 대한 집착으로 견마(見魔)라고 합니다. 행음(行陰)에서는 외도견을 이루나 식음에서는 그 경계에 집착하여 머물러 스스로 외도(外道)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0가지 식음마 중 앞의 8가지는 외도를 나타낸 것이고, 끝의 2가지는 성문과 연각입니다. 대승의 견지에서는 정성성문과 정성연각도 부처님이 가르친 소승법에 의지해서 수행하여 과(果)를 얻었지만 그래도 적멸을 성취한 성불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구니에 해당이 됩니다.
이것은 적멸에 이르는 마지막 기로에서 도를 궁구함에 있어 나아갈 곳을 잃고 중도에서 잘못된 이해를 해서 나타나는 경계에 미혹되는 것입니다. 적멸의 자리는 그 경계마저 사라진 후에 현전(現前)하는 것인데, 오히려 경계를 궁극의 자리로 여기고 마침내 마음을 쉬고 궁극의 귀의처(歸依處)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스스로의 그릇된 견해와 잘못된 알음알이가 마구니가 되어 자기에게 과(果)로써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식음마를 전체 간단히 정리해 보면,
1. 소인(所因)을 능인(能因)으로 집착한다.
2.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집착
3. 비상(非常)을 상(常)이라고 집착한다
4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집착한다
5. 무생(無生)을 생(生)이라고 집착한다.
6. 무귀처(無歸處)를 귀의처(歸依處)라고 집착한다
7. '탐내서는 안될 것을 탐하는 집착'에 떨어진다
8. 진실하지 못한 것을 진실하다고 집착한다
9. 대승을 믿지 않는 소승 성문에 떨어진다
10. 정성(定性)벽지불에 떨어진다.
-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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