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36-3)

2018. 10. 24. 10:16성인들 가르침/불교 교리 일반



-계환스님 지음 <대승기신론의 세계>-


[논-50]

용훈습(用薰習)이란 곧 이 중생의 외연의 힘이니, 이와 같이 외연에 무량한 뜻이 있으나 간략히 두 가지로 설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차별연이고, 둘째는 평등연이다.

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제불 보살 등에 의지하여 초발의로부터 이 도를 구하기 시작하여 내지 불과를 얻을 동안까지  혹은 보기도 하고, 혹은 생각함이 있어, 혹은 권속 부모 여러 친척이 되고 혹은 급사가 되며, 혹은 아는 친구가 되고 혹은 원수 집안이 되며, 혹은 사섭법을 일으키며, 내지 일체 지은 바 무량한 수행의 연으로 대비의 훈습력을 일으켜 능히 중생으로하여금 선근을 증장하여 혹은 보거나 혹은 들어서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이 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연(近緣)이니 속히 득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원연(遠緣)이니 오래 걸려 득도하기 때문이다.

이 근과 원의 두 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증장행연이고, 둘째는 수도연이다.

평등연이란 일체의 제불보살이 모두 일체의 중생을 도탈시키고자 서원하여 자연히 (이들을) 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않으며, 동체지력이므로 응당히 (중생의) 보고 들음에 따라 지은 업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중생은 삼매에 의지해야 이에 평등하게 제불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해설]

용훈습은 외연의 힘을 말하는데,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사람 각자에 다른 차별연이 있고, 다음은 어느 사람에게도 공통되는 평등연이 있다.

차별연에도 깨달음의 기연이 된 아주 가가운 연(近緣)과 돌이켜보면 저것이 연이었나 하는 머나먼 연(遠緣)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수행 증장시키는 연(增長行緣)과 깨달음을 받은 연(受道緣)의 두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제불의 용대(用大)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용대란 부처의 보신(報身)과 응신(應身;化身)을 말한다. 즉 진여의 용대에서 보신이나 화신이 나타나고 그것이 외연이 되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말한다. 보신,화신이라 하여 교학적으로 따질 필요는 없으며, 진여의 작용이 어떠한 형상을 가지고 나타나 그것이 외연이 되어 중생을 인도한 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따라서 진여의 정용(淨用)이 부처의 용대(用大)에서 완전하게 실현되며, 중생에 대해서는 밖으로부터 작용해서 돕는 활동을 한다. 그 활동을 용훈습이라고 한다.

첫번째 차별연은, 개인 마다 각각 다른 연이기 때문에 중생의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존재나 작용은 모두 차별연이라 할 수 있다. 즉 보살이나 부처가 모든 중생의 지위나 형편에 따라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도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발심을 한 이후부터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모습을 나타내기도하고 중생의 염원을 들어 주기는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수의 모습으로 나타나 여러 가지 행위로 중생이 깨달음에 가까이 가도록 힘을 다하기도 한다. 불보살이 이처럼 모든 기연(奇緣)을 내세워서 수행자에게 작용하는 것은 대자비에 의한 훈습력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모든 중생의 능력이나 소질에 맞추어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이익을 얻는다. 그 때문에 차별연(差別緣)이라 한 것이다.

아울러 차별연은 다시 근연과 원연으로 나누어 설명되는데, 근연(近緣)이란 능력이 있고 수행이 원숙한 사람을 신속하게 구제하는 것이며, 원연(遠緣)이란 수행이 아직 충분히 진척되지 않고 근기가 원숙하지 못한 사람을 오랜 시간에 걸쳐서 구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이 상당히 진행되어 있으면 신속하게 구제할 수 있지만, 발심한 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은 빨리 구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가르치고 인도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진여의 작용은 수행이 진척된 사람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가까스로 발심한 한 사람, 처음 도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오랜 기간에 걸쳐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여의 내훈습의 원연인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영원히 작용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 영원한 훈습의 힘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그래서 근연(近緣)이든 원연(遠緣)이든 두 단계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른다. 두 단계란 증장행연(增長行緣)과 수도연(受道緣)을 말한다.

먼저 증장행연은, 수행을 증장하게 하는 연(緣)으로써 육바라밀과 같은 수행을 증장시켜 주는 연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여를 깨닫기까지의 방편행이며, 깨달음의 앞 단계까지만 작용한다. 그 다음 수도연이란, 증장행연의 수행증진에 의하여 새로운 깨달음의 지혜가 얻어지는 연이다. 즉 불도를 수용하는 연으로써 진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증장행연은 다른 말로 하면 정진노력이고, 수도연이란 구제이고 깨달음이다. 길고 긴 시간 정진행을 계속하지 않으면 결코 깨달음은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것에도 통한다. 사업에 있어서도 학문에 있어서도 증장행연의 성숙없이 그 완성인 수도연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평등연은, 진여의 작용(用大)이 불신(佛身)이 되어 나타나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 평등연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무한한 대비(大悲)에서 나오는 것이며, 부처님이나 보살이 위대한 힘으로써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구제하는것을 말한다. 부처님이나 보살의 무한한 자비는 자연히 모든 사람들에게 훈습을 주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중생은 부처와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평등하게 이들을 구제하기를 원하므로 바로 평등연이라 한다. 이쪽에서 견문(見聞)하는 힘만 있으면 언제라도 부처님은 그 모습을 나타내는 법이며, 그것이 부처님 자비의 작용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보살은 항상 사람들을 구하고자 작용하며 차별대우가 없는 것이 바로 평등연이다. 어떤 사람도 삼매에 들어 똑같이 부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 따라 차별하는 자비가 아니라 일체에 평등하게 미치는 자비이다. 이 부처님의 지력(智力)은 인간이 분별하는 천박한 지력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동체(同體)의 지력(智力)에 의한다. 동체의 지력이란 범부와 성인, 더러움과 깨끗함,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동일체로 볼 수 있는 지혜의 힘의 작용인 것이다.

요컨대 여기서 말하는 진여훈습의 작용은 우리의 능력의 있고 없음, 수행의 우수함과 저열함, 기간의 길고 짧음 따위를 충분히 이해한 바탕 위에서 설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계환스님의 대승기신론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