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18. 20:11ㆍ성인들 가르침/불교 교리 일반
만약 '의식을 일으켜(作心)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가지고>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청정한 마음이 의식을 일으키지 않고도 만법을 생각하는 것인가, 의식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만법을 사념하는 것인가.
가령 청정한 마음이 스스로 의식을 일으키지 않고도 모든 법을 분별하는 것이라면 본래 어떤 이유로 의식을 일으켜 제법을 사념하다가 지금은 갑자기 무엇을 매개체로 하여 제법을 사념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의식이 제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 의식은 바로 망념이 된다.
만약 의식이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도 만법을 분별한다고 말한다면 현상(法塵)을 마주 대하면서도 의도적으로 <현상사물을>분별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대상 사물(法塵)을 보지 않음으로써 <모든 만법을> 분별하지 않는 것인가.
<실제로> 마주 대하고 있으면서 <일부로 > 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인가, 완전히 현상사물을 마주 대하지 않는 것이 <만법을 >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사물을 마주 대하지 않는 <것이 사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의식이 마음을 일으켜 제법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인식의 대상(所識)을 식별하기 때문에 '식(識)'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제법을> 마주 대하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이것은 소경과 같은 죽은 법이다.
만약 <제법을> 마주 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인가.
또는 제법이 공성(空性)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법을 분별하지 않는 것인가, 제법이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모든 법이 공성(空性)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것은 <분별식으로써 망식이 아니고> 무진지(無塵智)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제법을 마주 대하고 있어도 보지 않는 것과 같고, 설령 본다고 해도 망념으로 분별하여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치가 아무 장애가 없거늘 무엇 때문에 그대는 무진지가 필요치 않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려고 애쓰는가.
가령 사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인식할 대상으로서> 사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제법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것은 무명망상이 되는데도 다시 제법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겁 많은 사람이 눈을 감고서 컴컴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즉 '처음 눈을 뜨고 컴컴한 곳으로 들어갈 때에 밖은 환하고 안은 어두웠기 때문에 공포심을 느꼈는데, 다음은 눈을 꼭 감고 들어가니 안팎이 모두 컴컴하여 참으로 편안하구나'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비유에서 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 만법을 보고 그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오직 미경무명(迷境無明; 6경의 대상세계는 인연을 따라 임시로 존재하는 것인데, 중생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양 대상에 집착한다고 하여 미경무명이라고 함) 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물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서 제법을 보지 않는 것은 <마치 비유에서 처럼> 마음과 대상 사물이 함께 컴컴하니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의식으로 대상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일정하게 마음이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청정한 마음은 흩어져 버릴 것이다. 또한 의도적으로 제법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번뇌 망상이 어지럽게 요동하는 순간이 된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고요하고 안정된 청정한 마음의 자체가 아닌데, 어떻게 청정한 심체(心體)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단지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하여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 <의식을> 두어 이렇게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으로써 경계를 삼고, 의식이 이러한 경계에 묶여 있는 한 다른 경계를 반연의 대상으로서 용납하지 못한다.
미혹한 중생은 본래 이러한 이치(理)를 모르고 사물에 대해 분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의식으로 고요한 경지를 설정해 놓고> 그것에 매달려 그것을 소중한 보배인 양 집착하여 끈질기게 천착(穿鑿)한다. 그런 다음 <자기가 현재 닦고 있는 경지야 말로> 진정한 삼매에 이르는 길이라고 집착한다. 또한 <그러한 경계에> 의식을 두고 경책함으로서 쉬지 않고 밤낮으로 계속 익혀 왔기 때문에 익숙해져서 다시는 의도적으로 의식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그러한 상태가 계속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의식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모습을 따라 늘 변화해 가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순간순간 망상이 일어나는데도 그것이 무명망상인줄 몰라서 조금도 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제6식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어떻한 수행 위치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문득 내 마음은 고요한 상태에 안주해 있기 때문에 이것이야 말로 진여삼매라고 여긴다. 이와 같이 집착하는 자는 자기의 분수(分量)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람들도> 단지 전일한 마음으로 하나의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의미에서> '지(止)'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멀게는 무진지가 될 수 있는 기초가 되며, 또한 가깝게는 원숭이처럼 들떠 있는 마음을 일시적으로 묶어두는 자물쇠 역활을 한다.
5욕에 깊히 빠져 있고 6근에 따라 대상을 집착하는 사람과 비교할 때 그래도 이것은 몇 천만 배나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의 자체를 고요히 관조하는 진여삼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그것을 진여삼매라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점점 수행이 깊어질 것이다.
세간을 벗어나는 열반법을 성취하고 싶으면 반드시 <망상식인 의식에서 전환된> 무진지를 <가지고 수행하여 금강무애지를 얻고 거기서 더 나아가 묘관찰지를 얻어 구경각을> 성취해야 한다.
이상으로 '지관을 닦는데 있어서 무엇을 의지하여 수행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친다.
이상으로 크게 다섯가지로 문단을 나눈 가운데 첫 번째 지관의 이치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친다.
-남악혜사 지음 원경 옮김 <대승지관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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