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22. 10:15ㆍ성인들 가르침/현대선지식들법문
학자와 선승간의 작은 논쟁
-현응 스님과 연세대 신규탁 교수
-현응스님이 신 교수에게
돈오(頓悟)는 중생의 사량으론 맞지 않는 이론입니다.
성철 스님 또한 그의 타고난 재능 때문에 저런 "돈오점수" 소리를 들고 나왔다고 봅니다.
사실을 보면 성철 스님의 개인의 업식 문제입니다.
돈오점수와는 아무 상관없는 소리인 것입니다.
돈오가 바로 된 이는 일체 주장할 것이 없어져 버리며 보조니, 육조니 그런 말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언어는 언어일 뿐 마음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오는 지나가 버린 마음 같은 것이 없는 것이 경험되어질 때를 말합니다.
그래서 돈오는 깨닫는 이의 경험 세계일 뿐, 그 어떤 논리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그림자를 보듬고 세워 보려 하나 그 그림자가 세워지겠습니까.
죽은 육조, 죽은 보조를 다 놔두고 살아 있는 육조, 보조가 나왔으면 합니다.
그 눈을 보고 싶습니다.
이때 보조, 육조를 논함은 해봄직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조와 보조가 경험한 마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해야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론으로 먼저 가신 분들에게 욕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철스님은 그의 식망을 떨쳐버리지 못한 일종의 해오 승(僧)입니다.
맑은 식(識)으로 알기는 아나, 그 아는 것을 그치지 못하고 스스로 애를 먹고 간 분입니다.
그런데 뒷사람들이 그런 것도 모르고 그의 그림자 같은 허튼 소리를 들고 나와 어지러움을 피우는 것은 불법을 망하게 하는 징조입니다.
후학들에게 저런 그럴듯한 이론에 집착하게 한 그의 발상 자체가 공부인에게 지극히 해롭습니다.
성철의 이론은 망상이며 학인에게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의 이론을 보면 돈오는 꿈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림자 돈오입니다.
돈오를 생각하게 하는 그 마음이 곧 망상을 피우고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올바로 된 스승은 깨치기 전에 나오는 말, 돈오니 점수니 둘 다 놔두고 스스로 믿음을 키워 선(禪)을 바로 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돈오는 깨닫는 이의 경험세계입니다. 깨침이 없는 분이 돈오를 기억하고 공부하면 곧 망상입니다.
망상 속에서는 공부가 시작이 안됩니다. 무슨 깨침을 기약하겠습니까.
다만 육조 스님은 그 당시 묻는 이들에게 말해 주었을 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보조 스님 또한 후학에게 가르치기 위한 말하는 방법의 순서일 뿐 그의 마음엔 돈오와 점수같은 마음은 없었던 분입니다.
뒷사람들이 하라는 공부는 않고 돈오점수가 어떻고 하는 것은 성철자신에게도 이익이 없고 후학에게도 혼란만 줍니다. 어떻게 선(禪)의 시작도 안 된 분이 돈오를 그림 그리듯 그려 이러쿵 저러쿵 하겠습니까?
곧 중생의 망념이며, 성철의 무심치 못한 열등감이며, 중생의 시끄러운 소견입니다.
하시려면, 공부를 바로 시작하도록 길을 제시해 주어 믿음을 일으키는 처음 발심이 더 중요합니다.
선을 시작도 안한 이들에게 돈오란 그림을 그려 놓는 것은 망상 위에 망상을 더한 것입니다.
-신교수가 현응스님에게
긴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은 저도 현응 스님께 동감입니다. 그럼 이 문제를 생각해 보세요.
심신에 번뇌를 가지고 있는 중생이 어떻게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선불교에서는 번뇌에 물든 심신의 활동성을 쉬게 하려고 합니다.
번뇌의 사람이 보살행(혹은 수행)을 해도 역시 아인중생수자 등의 상이 남아 진정한 이타행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무심수행을 권하는 걸로 저는 이해해요. 어록에는 그런 것 같아요.
전 수행은 못해 보았거든요. 그리고 성철 스님의 선에 대해서는 그의 인생을 통한 총체적인 삶과 더불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범적으로 사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현응스님이 신교수에게
님은 지금 믿음에 대한 문제를 뒤바꿔 보고 있습니다.
바른 믿음이 자리 잡을 때 내면 경험이 오며 온즉 지혜를 경험합니다.
이땐 스스로 알게 됩니다.
경전도 알고 조사의 글도 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믿음을 근본으로 합니다.
성철스님이 모범된 수행승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를 옛사람과 같은 깨달음을 얻은 이라고 보기엔 너무 서툴고 먼 분입니다.
그는 식업(識業)을 그치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나도 한 때 그 어른을 모시고 살아 봤습니다.
그의 곁에 있어 보면 확실히 업식을 그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헐떡거립니다.
그것은 아는 것과 무심에서 온 지혜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지혜를 만나면 헐떡거림은 없으며, 아는 것 또한 그 근본이 비어 있는 것이어서 들고 다닐 것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님의 답글 고맙습니다.
- 신 교수가 현응스님에게
번뇌의 중생이 어떻게 '바른 믿음'을 낼 수 있을까요?
교학(화엄)의 지위설이 도입되어야 그게 가능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남종선의 범주를 넘어섭니다. 이 점이 선종의 매력이자 한계입니다.
-현응스님이 신 교수에게
화엄이 도입되어도 그 보는 사람이 중생입니다.
역시 화엄이 없어 믿음을 못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데가 있는 것입니다.
경은 말할 줄 모릅니다.
사람이 경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 믿어지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며, 나중에 불경은 깨달음이 온 뒤에 봐야 바로 보는 것입니다. 어찌 중생의 눈으로 부처의 경을 바로 볼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스승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바로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리 달마도 스승없이 깨친 이는 100만 명 중에 1도 없다는 말을 남깁니다.
그리고 선종의 한계는 없는 것이며, 선종을 보는 눈이 한계를 만들고 있을 것입니다.
말을 맺으면서 - - -
먼저 깨달음을 알기 전에 탐,진,치가 무엇인가 알아야 된다고 봅니다.
삼독을 바로 아는 곳에 깨달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깨달음만 구할 뿐, 탐,진,치를 모릅니다. 이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 실체는 들여다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를 바로 알 때라야 그곳에서 깨달음을 만납니다. 돈오와 점수는 그때 논해 봄직합니다.
탐,진,치는 깨달음과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묻는 것 속에서 스스로의 불만을 보이는 것도 곧 탐,진,치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덮어 놓고 나오는 물음은 습관에서 온 것입니다. 물이 찬 항아리에 물을 더 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가리는 좋은 해입니다.
-현응 스님 저 [번뇌를 끊는 이야기](운주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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