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작용'은 있지만 '보는 자'는 없다.

2017. 9. 26. 19:38성인들 가르침/현대선지식들법문


'보는 자'라는 의식은 볼 때만 나타난다. 그러나 보지 않을 때 "보는 자'라는 의식은 사라진다.

만약 '보는 자'가 있어서 본다면, 볼 때는 어디에선가 와서 눈에 머물다가, 보지 않을 때는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

과연 '보는 자'가 활동하지 않을 때 숨어 있는 곳이 있는가?

만약 보는 자가 숨어 있는 곳이 없다면 '보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보는 자'는 실체가 없이 조건에 의해 생겼다가 사라지는 의식현상, 즉 연기한 법(法)이다.

'업보(業報)는 있으나 행위자(作者)는 없다'는 말은 '보는 작용'은 있지만 '보는 자'는 없다는 말이다.

이와같이 대상을 지각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중생들은 지각활동을 하면서 지각되는 대상이 외부에 실재하고, 대상을 지각하는 자아가 내부에 실재한다고 믿고잇다.

하지만 십이입처는 무아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중생들의 착각이며 망념(妄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내부에 존재하는 자아가 보고, 듣는 인지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망념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내육입처(內六入處)이고,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 형태나 소리등을 통해 인지된다고 생각하는 망념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외육입처(外六入妻)이며, 이들을 십이입처라고 부른 것이다.

이처럼 십이입처는 무지한 중생들이 일으키는 망념이며, 이러한 망념이 중생들의 세계의 근원이 된다는 의미에서 부처님은 십이입처를 '일체(一切)'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러한 망념을 가지고 착각 속에서 지각할 때, 외부의 대상을 분별하는 여섯가지 의식,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 연기한다.

십이입처라는 착각 위에 이들 육식(六識)이 연기하여 나타난 의식 구조를 십팔계(十八界)라고 부른다.

그리고 십팔계의 의식구조에서 대상을 경험하는 것을 촉(觸)이라고 부르며, 그 경험을 통해 고락의 감정(受), 생각(想), 의지(思)​ 등이 연기한다.

중생들이 자아라고 집착하고 있는 오온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연기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자아라고 집착하고 있는 오온이라고 하는 망상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연기하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 십이입처와 삽팔계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오온의 실상이 공성임을 깨달아 착각에서 벗어나면, 착각에서 비롯된 망상인 오온,십이처, 십팔계도 사라진다.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보는 나는 존재할 수 없고, 보는 내가 없으면 보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없는 것이 (진정한)우리의 삶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는 보는 주관(眼耳鼻舌身意)도 없고 보이는 객관(色聲香味觸法)도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없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얼굴에 있는 눈,코,귀,혀 등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세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삶 속에서 연기한다는 의미다.

                                             -이중표 역해,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