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業報)는 있으나 행위자(作者)는 없다

2017. 9. 29. 12:14성인들 가르침/현대선지식들법문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자아(自我)'가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나고, 만져지고 생각되는 '세계' 속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아와 세계는 공간 속에 있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과 같은 물질적 실체들과 의식과 같은 정신적 실체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생각이 오온, 십이입처, 십팔계 같은  세간(世間)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간은 무명에서 연기한 괴로움 덩어리이기 때문에 이것들의 공성(空性)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불교이다. 이 공성을 깨닫게 되면 곧 열반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중생이 자기라고 애착하는 내육처(內六處, 眼耳鼻舌身意)와 외부의 세계로 생각하는 외육처(外六處,色聲香味觸法), 그리고 여기에서 연기한 오온(五蘊)이 멸하고 사라진 세계인 것이다.


도데체 이런 세계가 어떻게 가능하며, 그 세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일까?

모든 존재와 생명이 사라진 허무와 죽음의 세계일까?

그렇지 않으면 생사가 없는 열반의 세계가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중생의 세계 저편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오랜 의문이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궁금증일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열반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는 큰 의문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잡아함경(249)> 에서는 아난 존자와 같은 분도 이러한 의문에 빠져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아난존자가 사리불 존자에게 물었다.

"육촉입처(六觸入處)를 멸진하고 욕탐을 떠나면, 멸하고 사라져 버린 후에 다시 남는 것이 있습니까?"


이러한 아난의 질문에 사리불은 "남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은 모두 무의미한 말(虛言)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만약 '육촉입처를 멸진하고 욕탐을 떠나면 육촉입처에서 생긴 모든 것이 멸하여 사라진 후에 모든 허위(虛僞)를 떠나 반열반(般涅槃)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부처의 말씀입니다."


열반의 세계가 중생의 세계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세계는 허위의 세계이고, 열반의 세계는 허위를 떠난 세계라는 것이 이 경의 의미다.

열반은 우리 삶의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지, 수행을 통해서 얻게 되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쳐 준 열반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八正道)인데, 필정도는 계(戒), 정(正), 혜(慧) 삼학(三學)에 포함된다. <맛지마 니까야>44. (교리문답 작은 경)에서는 팔정도와 삼학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위싸카 존자여, 성자의 팔정도에 세 가지 온(蘊)이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싸카 존자여, 세 가지 온에 성자의 팔정도가 포함됩니다. 위싸카 존자여,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은 계온(戒蘊)에 포함되고, 정정진(正精進)과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은 정온(正蘊)에 포함되며,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는 혜온(慧蘊)에 포함됩니다. "


이와 같이 팔정도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의미한다.

불교의 수행을 간단히 정리하면, 계율을 잘 지켜서(戒), 마음을 안정시키고 통일시켜(定), 지혜로 사성제의 도리를 깨달아(慧), 허위를 더나 열반을 성취하는 것(解脫)이다.

이러한 팔정도의 수행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견도(見道)로서 팔정도가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다. 이것을 '길을 발견했다'는 의미에서 견도라고 한다.

다음은 직접 길을 따라서 가는 단계이다. 이것을 '팔정도를 수행한다' 의미에서 '수도(修道)'라고 한다.

마지막은 열반을 성취한 단계다. 이것을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무학도(無學道)'라고 한다.

그런데 견도와 수도를 팔정도라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만, 목적지에 도달한 무학도를 팔정도라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하게 생각 될 것이다. 길은 목적지로 가는 과정인데, 무학도를 팔정도라고 하는 것은 목적지와 과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잡아함경>(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 나오는 가르침인 "업보(業報)는 있으나 행위자(作者)는 없다"는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무아와 공의 실상이다.

팔정도의 수행에도 업보는 있으나 행위자는 없다. 이와 같이 무아와 공의 세계에는 팔정도의 수행은 있지만, 팔정도도 없고, 팔정도를 수행하는 수람도 없고, 팔정도를 수행하여 얻게 되는 열반도 없다.

<반야심경>에서는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소득(無所得)이란 열반이 수행의 종점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열반이란 팔정도를 수행하여 얻게 되는, 팔정도와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팔정도가 빈틈없이 완벽하게 실천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견도는 어떻게 살것인가를 추구한 결과 팔정도가 바른 삶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고, 수도는 그 사람을 열심히 사는 것을 의미하며, 무학도는 더 이상 애쓸 필요없이 저절로 그렇게 살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업보는 있으나 행위자는 없다'는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다.

팔정도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면 삶이 그대로 팔정도가 되는 것이니, 여기에 팔정도를 실천하는 삶(業)과 그 결과 팔정도가 저절로 실현되는 삶(報)은 있지만, 팔정도를 실천하여 열반을 얻은 자, 즉 팔정도의 행위자(作者)와 팔정도를 실천하여 그 행위자가 얻게 될 열반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열반이다.

열반을 성취한 후에 무엇이 남는가를 묻는 아난 존자에게 사리불 존자가 그런 물음은 무의미한 말이라고 하면서, 허위를 떠난 것이 열반이라고 한 것도 같은 의미다.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를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허위의 삶에서, 허위를 버리고 업보가 뚜렷한 실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열반이라고 할 뿐, 열반을 성취하여 따로 얻을 것은 없다.

팔정도는 견도와 수도의 단계에서는 도성제가 되지만, 무학도의 단계에서는 그대로 멸성제가 된다.(下略)

                                            -이중표교수 역해,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에서 발췌-